전주기행(2) - 기린봉

by 전영웅


2월 초의 공기는 코끝이 아렸다. 제주의 한기서린 바람을 맞다가, 육지의 냉기 가득한 겨울바람을 맞아보니 그랬다.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닌 줄 알지만, 그래도 산 정상이라고 기린봉 꼭대기의 공기는 나를 찌르듯 흘렀다. 바람이라고 하기엔 약한, 공기의 흐름같은 것임에도 그러했다.


약간은 흐릿한 공기에 오후의 햇살이 잘게 부서져 퍼지듯, 도시 전체에 내리고 있었다. 전주시내는 회색이었다. 회색의 도시는 내 기억과는 다르게 넓어져 있었다. 마치 증식하는 미생물처럼, 언덕과 산 사이를 뒤덮으며 북쪽의 너른 자리로 번지고 있었다. 적당한 높이의 산 언저리나 언덕 중간 즈음까지도 회색의 도시는 알뜰하게 뒤덮고 있었다. 전주가 이렇게 넓은 도시였던가 싶을 만큼 말이다. 도시가 넓어지니 내 기억 속에 선명하던 풍남초등학교는 상대적으로 눌려 쪼그라든 성냥갑 같은 모습으로 아래쪽에 보였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서, 기억 속에서도 들리던 나직한 도시의 소음이 빵반죽 발효되어 부풀듯 올라왔다.


남쪽으로 멀리 모악산이 보였고,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아래로 아중저수지가 보였다. 저수지 건너 송천역도 보였다. 기억 속의 두 사물은 그대로였지만, 주변은 아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아중저수지 제방 앞으로는 모텔과 연립주택이 난립한 시가지가 되었고, 철로를 중심으로 주변역시 제각각의 건물들과 도로가 생겨 차들이 쉴 새없이 다니고 있었다. 시간이 참 많이 흐르긴 했다. 어림잡아도 35년이니, 토건족 중심의 자본주의가 황량한 들판이나 위치 좋은 논밭 미나리꽝을 가만 놔 둘리 없었다. 전주는 그렇게 내 어릴적 기억과는 다른 도시가 되어 있었다.


도시의 모습만 변한 것은 아니었다. 기린봉 정상에서 아중저수지가 보인다고는 했지만, 한겨울 가지만 남은 활엽수와 소나무 가지 사이사이로 겨우 보이고 있었다. 기억이 맞다면, 어릴적 정상에서의 아중저수지는 중간에 걸리는 것 없이 온전한 시야로 보이는 저수지였다. 시간 때문인지 온난화 현상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무들도 그만큼 자랐던 것이었다. 그리고, 기린봉 정상의 바위 모서리 틈새로 발을 디디고 서 있기가 어려웠다. 어릴 적에는 모서리 사이로 발을 넣고 디뎌 서 있었다. 바위가 변했을 리 없을테고, 이제는 커진 내 발이 맨들맨들해진 정상의 바위모서리 사이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발을 디딜만한 자리를 겨우 찾아 간신히 서서 풍경을 보아야 했다. 35년이라는 시간은 기억 속 몇 가지 포인트만 남겨두고 거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도 감정도 달라져 있었다. 기린봉 정상에 서서 가쁜 숨이 안정되기를 기다리며 나는 천천히 풍경을 둘러보았다. 디디기 힘든 발 밑이 신경쓰였지만, 호흡이 안정되자 발도 대충 적응되었고, 공간의 모든 것이 어릴 적 기억과 겹쳐보였다. 기억은 퍼즐판 속 몇 개의 퍼즐조각처럼, 지금의 넓어진 공간 속 일부일 뿐이었다. 기억은 그렇게 녹아드는데, 그 때의 감정이나 불안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난 그저 그 자리에서, 내 어릴적의 감정이 생각날 뿐이었다. 당연한 것인지 또는 다행인 것인지, 나는 막연하고 모호한 기분으로 오래도록 서 있었다.


내가 서서히 걸어들어가 사라졌던 그 초록. 저수지를 지나 철로를 건너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 했던 그 순수의 초록은 이제 그런 풍경이 아니었다. 능선과 능선 사이로, 높은 기둥이 세워지고 그 위로 고속도로가 길게 달리고 있었다. 초록의 능선 두어 곳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이 듬성하게 놓여 있었다. 이제 그 초록으로 걸어들어 가려면, 번잡한 주택가와 유흥가를 지나, 잘 정돈된 제방 아래 도로를 따라 걷다가 큰 길을 건너 철로를 건너야 했다. 그렇게 겨우 숲을 만나면, 나는 새소리 대신 머리 위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의 소음을 들으며 숲을 헤매야 할 것이다. 현재는 언제나 기억을 배반한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그러했다. 나는 달라진 풍경 안에서 조용히 내 기억을 음미하기가 어려웠다.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이 그대로이길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나의 기억을 돌아보고자 할 뿐이었다. 그런데, 달라진 풍경은 그런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나직하게 많아진 소음과 어수선하게 달라진 시야가, 나를 담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욕심뿐인건가 싶었지만, 일말의 서운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정상에 서 있었다. 기억하려던 꼬마아이는 이제 키가 커진만큼 마음이 정형화되고 굳어진 어른이 되어 있었다. 바위 틈에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이 공간에 약간은 부조화스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코끝이 아린 공기를 마시고, 충분히 차가워진 목과 가슴을 느끼며 저 도시와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오후 햇살에 눈은 가늘어졌고, 이따금 한숨을 내쉬며 할 일 없는 중년 아저씨처럼 바위 틈새를 서성였다. 문득 정상 바위의 남쪽 면을 내려다 보았다. 그 곳은 자잘하게 돌이 박힌 것 같이 거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옆으로 난 나무데크로 사람들이 오가고 있지만, 어릴적 남쪽 산길로 올라올 때엔 마지막은 항상 그 거친 면을 거미가 기어오르듯 바짝 붙어 두손 두 발을 모두 사용해야만 했다. 문득 아래에서 깡마르고 가무잡잡한 꼬마 아이 하나가 나를 올려다보며 두 손과 두 발로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그 아이는 이 정도 산길은 별 문제 아니라는듯 기어오르더니 내 옆에 서서는 손을 탁탁 털고 숨 한 번 크게 쉬고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 저수지와 그 너머 산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그대로 가만히 서서, 표정은 조금 가라앉은 채 멀리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옷을 여기저기 탈탈 털어 흙먼지를 날리고는 반대편 내가 올라왔던 산길로 내려갔다. 아, 나도 이제 산을 내려가야겠구나.. 전주시내는 뿌연 공기 안에서도 기울어진 겨울햇살에 약간 붉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냉기는 더 깊어지고 바람도 불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아이가 올라오던 남쪽 산길로 내려갔다. 물론 옆으로 설치된 나무데크를 걸어 내려갔다.


사람이 많이 다녀서 그런지, 산길은 한둘이 아니었다. 시내는 기린봉 바로 아래까지 점령하듯 올라왔고, 능선과 맞붙은 동네마다 산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35년 전의 기억을 더듬고, 지도상의 산길 안내를 보며 내가 내려가고자 하는 길을 가늠했다. 낙엽이 쌓이고 가지만 남은 겨울 숲길은 풍경도 공기도 싸늘했다. 내가 닿고자 하는 산골동네 어느 구석, 그 자리는 맞는 듯 한데, 낡은 집과 작은 텃밭 몇 개가 보이자마자 왕복 2차선 도로가 반듯하게 바로 앞을 지나고 있었다. 내 기억을 가만 놔 두는 풍경은 단 하나도 없었다. 무참하다 싶을 정도로 능선과 낡은 산동네를 가로지른 도로가 주는 편리 하나는, 내가 차를 세워둔 반대쪽 동네까지 10분이면 걸어갈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 차를 몰아 동생네로 향했다. 너무 오랜만에 오는 전주이기도 했고, 넓어지고 많이 변한 시내는 네비게이션 없이는 다니기 어려운 도시가 되어 있었다. 나는 미리 설치한 네비게이션 앱의 도움을 받아 시내 한복판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겨우 시간을 내어 만든 며칠간의 전주기행, 그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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