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끝에 서서 사라진 공간들을 기억해 내야만 했다. 사라진 공간은 애써 기억해 내야만 했고, 기억 속 그대로 남은 공간은 아무도 없는 폐허가 되어 기억하려니 쓸쓸했다. 시간은 기억하려는 자를 배려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세상이 변하는 속도대로, 사람을 막막하게 했다. 내 앞을 가로막은 낡고 땟자국 가득한 담벼락과 그 틈새로 보이는 지저분한 바닥을 보며, 나는 쓸쓸하고 막막한 대로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해 내야 했다.
가로등 아래 쪼그리고 앉았던 대문 앞, 그 자리는 골목의 끝이었다. 골목 끝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우리집보다 마당과 모양새가 좋아보이는 집의 대문이었다. 그 집은 인쇄업을 하는 집이었다. 가끔 끈으로 묶은 종이뭉치를 들고 골목을 나가는 아저씨와 마주쳤고, 그 집 대문 주변으로 옮기다가 떨어뜨린 종이조각들이 서넛씩 바닥에서 나뒹굴곤 했었다. 인쇄기가 돌기 시작하면 동네는 무척 시끄러웠다. 주로 대낮에 돌렸는데, 엄마를 비롯해서 동네 아주머니들 할머니들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도 인쇄기가 돌기 시작하면 짜증난다는 듯 모두 말을 멈추고 인쇄기 작동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던지, 아니면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가끔은 인쇄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이상하게 어떤 여자의 신음소리가 같이 들리기도 했었다. 내가 살던 단칸방 부엌과 그 집의 인쇄작업실은 벽 하나로 맞붙어 있었다. 뜨개질을 하던 엄마 옆에서 나는 숙제를 하곤 했었는데,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엄마는 뜨개질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으로 어서 저 소리들이 끝나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신음소리는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금세 사그러들었지만, 인쇄기계는 한 번 돌아가면 이삼십분 정도 끊임없이 시끄러웠다.
우리집 대문과 마주하는 집은 친구네 집이었다. 그 친구가 언제 이사를 왔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이셨다. 친구의 어머니는 엄격한 분이셨고, 동네에서 유일하게 피아노를 가지고 계셨다. 동네에서 나름 교양있는 집으로 대하기 조금 어려웠던 그 집에서, 내 동생은 친구의 어머니에게 회초리로 손가락을 맞아가며 피아노를 배웠었다. 그리고, 그 집의 또래 친구는 이사 후로 나와 또 다른 또래까지 셋이서 동네 단짝으로 어울려 지냈었다. 그 집은 2층 양옥집이었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오르는 집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고, 친구의 어머니는 화단에 나팔꽃을 심어 줄을 2층까지 매달아 나팔꽃 줄기가 기어오르게 만들었었다. 아침에 나팔꽃이 피면, 낮에는 금방 지는 모습이 그렇게 신기했었다. 그리고, 우리집을 포함한 이 세 집은 도로가 나면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한국 전통문화 전당 자리는 전북대학교 병원의 테니스장과 건물의 일부가 있던 자리였다. 기억이 맞다면, 우리집과 담 하나를 두고 마당이 넓었던 집이 있었고, 그 집 너머 롤러스케이트 장이 있었다. 그 모두가 도로가 되고 도정이 만든 공공건물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테니스장에는 코트가 두 개 있었고, 우리집 담 쪽으로 오동나무와 은행나무가 있는 흙길이 있었다. 그 길을 가려면 담을 넘는 방법이 제일 간편한 방법이었는데, 우리집 옥상에서 담을 넘기가 제일 쉬웠다. 동네 친구들은 골목이 심심해지면, 우리집을 통과해서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을 올라 바로 담을 넘어 테니스장 옆 흙길에서 뛰어놀았다. 골목보다 훨씬 넓었고 나무가지같은 것들을 가지고 놀 것도 많았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노는 흙길로 거의 오지 않아서 더욱 눈치볼 일 없이 놀 수 있어 좋았다.
전북대학교 병원의 경계를 따라 우리 옆집은 나지막한 기와집이었다. 비가 새는 곳이 있는지, 그 집의 부엌쪽은 파란색 비닐로 지붕 곳곳을 덮어 벽돌로 눌러두었다. 집 곳곳은 얇은 합판으로 대략 공간을 나누거나 허물어진 곳을 가려 고정해서, 한 눈에 보기에도 임시방편의 근근한 살림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꼬마의 눈에는 그 집 아저씨가 무척 대단해보였다. 혼자서 척척 집을 고치고, 공간을 만들고, 남은 자재들은 그것대로 모아서 다른 곳들을 가리고 메웠으니 말이다.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저녁 늦게 집에 와서 저녁만 드시고 다시 야간일을 하러 나가시거나, 집에 계시면 손 하나 꼼짝않고 주무시기만 했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었다. 혼자서 뚝딱뚝딱 만들어나가는 기술과 약간은 상기된 어른의 몸동작이, 어렸던 내게는 남달라보였던 것이다. 그게 가난의 한 모습이라는 생각은 할 수도 없을 나이 이기도 했다. 이 집도 반 이상이 허물리고 건물이 올라간 우리집터와 전통문화 전당의 일부가 되었다.
내 앞에 마주한 낡고 땟자국 가득한 담벼락의 집은, 또래가 살지 않아서인지 잘 들어가지지 않는 집이었다. 마당이 있고, 두 집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집에서 한번은 전자레인지를 이용한 요리강습이 있었다. 당시 전자레인지라는 신문물을 팔기 위한 업체의 홍보활동이었다. 엄마는 그 요리강습에 참여해서는 처음에는 땅콩을 넣은 마요네즈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오셨고, 다음날에는 돈까스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오셨다. 그러더니, 우리집 부엌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네모난 전자레인지가 자리했다. 석유곤로로 밥을 하고 연탄불에 김을 구워 먹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신기한 물건이었는지, 엄마는 전자레인지의 효용에 심취해서는 나한테까지 돈까스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서는 가끔씩 만들어먹게 했다. 국민학교 2-3학년 즈음의 일이었다.
뒤로 돌면 또래 여자아이가 살던 붉은 벽돌의 2층 집이 있고, 그 집을 지나 고모할머니 댁 앞까지 골목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골목 한 가운데에는 정신장애를 가진 누나가 언제나 자기집 입구에 걸터앉아 골목을 뛰어다니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누나이지, 당시 스무살이 가까워지는 나이였다. 거의 움직이지 않아 부은듯 퉁퉁한 누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앉은 집 입구를 몸이 다 채울만큼 좁다란 공간을 조금 걸어들어가, 안쪽으로 허름한 집이 주변 집들의 그늘에 가린 집이었다. 그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골목에 공용화장실이 있었는데, 골목 삼거리 고모할머니 집의 바로 옆에 나무문이 달린 화장실이었다. 그 누나가 뛰어노는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몸을 움직이는 때는 용변을 보러 공용화장실에 가는 때였다. 우리는 골목을 뛰어다니면서도, 콧물을 손으로 훔쳐 옷에 슥 닦는 누나 앞을 지날 때엔 일부러 모른척 재빨리 움직였다. 그 누나도, 누나가 살던 집도, 공용화장실도, 이제는 도로가 지나며 모두 사라졌다. 초록색 페인트를 칠한 대문 나무틀 사이에 주저앉다시피 있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해내는 일은 역시, 추억이라기엔 너무 쓸쓸하고 유쾌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골목은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부둥키고 얽혀 살아야했던 끈적한 공간이었다. 끈적거리는 탓인지, 이 공간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쉽게 벗어나지 못하거나, 벗어나더라도 엇비슷한 곳에서 다시 고만고만한 살림을 시작할 뿐이었다. 끈적거려 지긋지긋한 이 공간에서 벗어난 집은 단 두 집이었다. 우리집에 세들어 살던 수련중이던 젊은 의사부부와, 맞은편 집 영어교사 아버지를 둔 친구네 집이었다. 그 외의 집들은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기숙사에 들어가고 우리집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기까지, 변함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이 그 동네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신작로가 나면서였다. 신작로는 사람을 모으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떠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스며들어갔는지 알 길은 없었다. 기억을 더듬은 나는 발길을 돌려 골목에서 나와 신작로를 걸었다. 나도 그 안에서 진득하게 살고 있었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의 날개처럼, 기억은 골목 안으로 끈적하게 들러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기억 안으로는 내 감정들과 불안들과, 성인이 되어서도 잘 모르겠던, 혈연이라는 관계의 버거움이 뭉친 덩어리처럼 들어 있었다. 나는 이 골목에서 다시, 그 우울에 대한 기억을 꺼내드는 일을 시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