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기행(10) - 어머니(1)

by 전영웅

나에게는 어머니가 두 분 계신다. 어머니가 바뀐 기억은 없다. 기억으로는, 한 어머니와만 함께 지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세 살때 어머니가 바뀌었다고 했다. 그 당시 동생은 한 살이 채 안되었을 때였다. 같이 지내는 어머니가 새어머니라는 사실을 안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젊고 예쁘장한 여인이 골목에서 나를 보고 ‘엄마야..’ 했던 이후의 어느 즈음부터 사실을 조금씩 인지했던 것 같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시작되는 곳은 남노송동에 살 때이다. 군경묘지로 들어가는 길, 영생교회 후문을 못 가 왼쪽 산동네로 향하는 길이 갈라졌다. 좁다란 아스팔트길을 오르다, 수많은 골목 입구 중 하나를 잘 찾아야 했다. 골목 안으로 안으로 10여 분을 걸어들어가면, 산길이 시작되는 부근의 집들 중 한 집에 세들어 살았었다. 화장실은 주인집과 같이 사용해야 하는 단칸방에서, 기억으로는 세 식구가 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집에서 동생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어머니를 따라 초봄 싸늘한 산바람을 맞으며 산길 초입 언덕에서 쑥을 캐곤 했었다. 새벽에 거나하게 술에 취한 아버지가 잠든 나를 깨워서는 장난감을 들이밀었던 기억도 있다. 새총같이 생긴 막대기 사이에 도날드 덕이 줄에 매달려 있어, 막대 양측을 눌렀다 떼면 줄의 반동으로 도날드 덕이 줄을 타고 뱅글뱅글 돌았다.


어느 겨울날로 기억한다. 열이 나고 목이 아파서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안고 거미줄 같은 골목을 걷고 걸어 큰길로 나왔다. 택시를 잡아 탔던 것 같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고, 세모지게 접은 하얀 약종이 속의 가루약을 처방받아 다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르막 언덕같은 골목을 다시 한동안 걸어야 하는 일은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는 집에 오자마자 약을 먹이기 전 나에게 밥을 먹이겠다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셨다. 아마 늦은 점심이었을 것이다. 뜨거운 물에 밥을 말았고, 국물이 생긴 잘 삭은 김치가 스텐리스 그릇에 반찬으로 담겨 있었다. 수저에 따뜻한 물에 말아진 밥과, 그 위로 작게 신김치 한줄기가 얹혀졌다. 어머니가 떠주는 그 밥을, 나는 넙죽넙죽 잘도 받아 먹었다. 그날 어머니는 전기포트에서 끓어 넘치는 물에 무릎에 작게 화상을 입었다. 어머니의 화상 상처는 둥글게 변색되며 수포가 올라왔다. 무릎이 데여 아팠을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은 듯 찬수건으로 대고는, 내 밥을 챙기는데 집중하셨다. 그 상처는 이후에도 변색된 피부로 어머니의 무릎에 오래도록 남아있었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날 먹었던 물에 만 밥과 신김치의 맛을 아직도 기억한다.


다정했던 어머니의 기억이 경원동으로 건너오면서 어째서 불안과 우울로 변해버렸을까.. 나로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거니와, 간간히 물어보는 말에 세 분은 정확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이모들이나 작은아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어릴적 감정을 잠식했던, 우울과 불안의 배경적 원인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태로 남아있다. 밤낮으로 일해야만 했던 아버지, 그래서인지 집에서는 항상 주무시던 모습으로만 기억되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거의 모든 일에 무심한 듯 보였다. 그런 아버지 옆에서 어머니는 종종 날카로워졌었다. 빚을 갚으려 고군분투했고, 만성적인 허리통증으로 힘들어하면서도 부엌일을 해야만 했다. 집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신경이 곤두섰고, 같이 살던 할머니와도 관계가 좋지 않았다. 막내동생이 태어난 후로, 어머니의 예민함은 더했던 듯 했다. 그리고, 친어머니가 종종 나를 찾으려 할 때, 예민함과 신경증은 극도의 상태로 변하곤 했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조금씩 경원동을 벗어날 수 있었다. 중학교 배정을 시내의 거의 끝에 위치한 학교로 받아, 이른 아침 버스를 타고 가서 오후 늦게 귀가했다. 그러다가 중 3이 되어 야간자습을 하니,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밤 11시를 넘겼다. 집에 들어가면 모두가 잠들어 있었고, 새벽이 되면 어머니가 차려주는 아침과 도시락을 받아들고 다시 버스를 타러 나가야 했다. 그렇게 집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수록 나는 어두운 감정에서 조금씩 벗어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3년 내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집과 좀 더 멀어질 수 있었다. 집도 내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동안 경원동에서 삼천동의 신축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했다. 그리고, 이사한 집에서의 내 공간은 거의 없었다. 내 방이 있긴 했지만, 집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곤 일요일 오전 잠깐인 고등학생이 그 방에서 온전한 내 시간을 보낼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대학에 진학하여 춘천으로 떠난다. 어두운 감정들은 그렇게 집과 멀어지면서 조금씩 옅어졌지만, 집에 대한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끈적이고 뒤엉킨 이상한 모습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분노의 감정이나 우울에의 반작용같은 것은 아니었다. 어설픈 애정과 숨겨진 애증같은, 나쁘지는 않지만 맞닿고 싶지 않게 변질된 그런 것이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 전, 서울에서 수련을 한다는 이유로 지금의 장인장모님 댁에 종종 머물곤 했었다. 아내의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놀라거나 긴장하게 되는 모습들을 많이 마주했다. 부모님에게 저렇게 함부로 말하거나 대해도 되는 것인가, 형제들끼리 저렇게 투닥여도 되는 것인가.. 나는 그 집에서, 내가 내 집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가족들간의 유대같은 감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내게는 선을 넘는 것 같은, 또는 무례해 보이는 가까움이, 실은 가족간에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을 수 있는 끈끈한 유대감의 모습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뒤늦게 깨달은 가족이라는 틀 안의 유대감, 그것은 이미 형성된 내 정체성 안으로 쉽게 들어와 녹아들지 못했다. 아쉽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