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에서 철근을 든 아이와 마주했던 어머니는 이후로 나와의 만남을 종종 시도했다. 또는 전화로 내 목소리를 들으려 했다. 그 때마다 집은 지옥이 되었다.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고, 가만히 어머니의 신경증을 받다가 참을 수 없게 되면 바로 집을 나가셨다. 그러면, 화살은 바로 나와 동생으로 향했다. 대문을 걸어 둔 채, 대문 밖의 어머니에게, 대문 안의 어머니는 화가 가득한 말들을 쏟아냈다. 또는 수화기를 들고 상대방에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 나면, 시선은 나와 동생에게로 향했다. 국민학교 저학년인 나와 동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주눅이 든 얼굴로, 가만히 앉아 어머니의 화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화가 어느정도 가라앉은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우리에게 씻고 오라고 말하면, 우리는 마치 얼었던 몸이 녹아 겨우 움직여지는 것 같은 기분으로 부엌으로 나갔다.
한 번은 골목에서 친구들과 재밌게 뛰어놀고 있는데, 츄리닝 바지를 입은 어떤 젊은 남자가 다가와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남자는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 네 외삼촌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가, 그것도 내 외삼촌은 따로 계시는데 자기가 나의 외삼촌이라고 하니 어리둥절해졌다. 어리둥절한 채로 남자의 횡설수설을 듣고 있는데, 동네 누가 어머니한테 이야기를 했는지, 어머니가 달려와서는 내 팔을 잡아끌며 그 남자에게 가버리라 소리를 지르셨다. 그 날 역시, 집은 지옥이 되었다. 나는 외삼촌이라는 모르는 남자와 말 몇마디 섞은 죄를 지었던 것이었다. 동생역시 덩달아 얼어버렸다.
나중에 들어보니 친어머니 주변의 가족들이 내 주변을 많이 살폈다고 했다. 어느날엔 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병원에 들어가길래 친 외할머니가 따라 들어왔단다. 할머니는 내가 앉은 대기실 의자 바로 옆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외할머니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더란다. 이 말을 하시던 친어머니는 자신이 직접 아들을 보러 가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내가 외할머니를 알아보지 못하더란 말에 더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야쿠르트 아줌마들의 시선도 종종 이상했다. 골목을 통해 학교를 오가다보면 종종 야쿠르트 아줌마들을 만났다. 나는 모르는 아줌마들인데, 아줌마들은 마치 나를 안다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 시선에는 뭔가 안타까움 비슷한 것이 배어 있었다. 그런데, 그 아줌마들은 나에게 직접 무언가를 물어보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계신 어머니는 야쿠르트 아줌마들을 달가와하지 않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어머니는 경원동 부근에서 야쿠르트 배달일도 하셨다고 했다.
종종 지옥이 되던 경원동 집에서 도망나오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다. 어머니라며 가끔 내 앞에 나타나던 여인은 예뻤다. 나를 바라보던 표정도 애틋했다. 그 여인을 따라갈까? 그러면 지금처럼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경원동은 나에게 불안가득한 족쇄였다. 경원동 집을 벗어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 공간은 불안과 두려움이었지만, 그 공간을 벗어나는 일 역시 두려움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동생을 놓고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란 존재는 누가 됐던 혼란스럽고 두려운 존재였다. 같이 사는 어머니의 화에 무섭고 힘들었지만, 친어머니라는 존재에 별다른 감정도 일지 않았다. 그 존재는 그저 막연하고 모르겠어서 두려웠다. 그리고, 친어머니가 나에게 다가올 때마다 내가 발디딘 공간은 지옥으로 변했다. 나는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 쌓였던 듯 했다.
친어머니는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나를 찾아오셨다. 가끔이었다. 학교가 집에서 멀었고, 나는 여드름 투성이인 사춘기 소년이 되어 있었다. 친어머니를 보는 마음에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나 애정의 감정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단도직입적으로 용돈을 부탁하곤 했다. 용돈이 적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고 나는 용돈이 가장 큰 관심사인 때였다. 다정한 말도 애틋한 시선도 없이 무턱대고 용돈부터 이야기하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서운하다는 투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용돈 때문에 만나는 거니?”
순간 아차 싶었지만, 나는 죄송하다거나 아니라는 부정의 말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 두세번 정도 어머니와 잠깐 만나던 일은 그 이후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밤 10시 반까지 자율학습을 해야 하는 중3이 되었고, 그 당시는 지금처럼 휴대용 전화나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다. 자연스레 그리고 별다른 감정의 변화도 없이 나와 어머니는 멀어졌다.
이후로 나는 전주시내에서 어머니와 한 번 마주친다. 예수병원 아래 위치한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잠시 외출하여 전주천을 건너 시내에 무언가를 사러 나갔었다. 작은길에서 큰 길로 나가려는데, 낯이 익은 여인이 큰 길을 걸어 내 앞을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여인은 어떤 남자와 함께였다. 깜짝 놀라 걸음을 멈칫했는데, 그 여인도 낌새를 느꼈는지 잠깐 나를 돌아보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걸어갔다. 나는 잠깐 두려움 비슷한 기분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고, 시야에서 두 사람이 사라지자 나도 가던 길을 걸었다. 감정의 흔들림은 잠시였다. 나는 별 생각없이 시내를 걸었고, 제 시간에 들어가야만 하는 기숙사 규정에 쫓길 뿐이었다.
일주일에 일요일 오전 반나절만 외출이 허락되던 시절이었다. 내가 집에 갈 수 있었던 시간은 일요일 오전 뿐이었고, 그것도 나를 포함한 가족들이 각자의 교회에 출석하느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집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을 직접적으로 안고 있지 않았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마음에는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긴 그 마음은, 집에 계시는 어머니와 그리고 나를 찾아오던 어머니와의 심리적 거리이기도 했다. 두려움도 아쉬움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별 생각없이, 전주를 떠나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기숙사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