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3년차의 어느 날이었다. 아침 회진을 마친 후 전날 밤샘당직의 피곤함으로 의국에 들어가 잠시 몸을 누였다. 눈을 막 붙이려는데, 의국 전화가 울렸다. 병동이겠거니 하고 받았는데, 행정실 전화였다. 한 번도 온 적 없는 행정실 전화는 나를 찾고 있었다. 내가 본인임을 말하자, 외부 전화로 누가 나를 찾고 있다고 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누가 나를 찾고 있을까.. 일단 바꿔달라고 했다. 연결이 된 전화에서는 약간 흥분한 톤의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영웅이니? 나 ㅇㅇㅇ이야!”
어머니였다. 얼마만인가.. 20년 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난 시간 만의 통화였다. 그 통화의 시작은 예전처럼 ‘엄마야..’로 시작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본인의 이름으로 자신을 밝혔다. 목소리는 반가움이 가득했지만, 반가움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뭇거림이 묻어 있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러지 않아도 어디 계신가 궁금하던 참이었어요.”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담담했다. 당직의 피곤함에 목소리도 가라앉아 있었지만, 별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분노도, 반가움도, 아니면 엉뚱한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도,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었으니 이제 만남은 자연스럽다는 듯, 내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렇게 전화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의 목소리 톤은 대조적이었다. 전화는 갑작스러웠고, 나는 근무 중이었다. 오랜 통화는 할 수 없어서 우리는 서로의 전화번호를 주고 받은 다음 통화를 마무리했다.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 통화 후 어머니와 나는 가까운 주말에 만나기로 했고, 서울 어딘가에서, 역시 20년 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난 시간 만에 마주할 수 있었다. 내 손을 잡는 어머니의 손은 가늘고 거칠어 있었다. 살이 붙은 예쁜 여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마르고 거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마지막으로 본 이후로 나와 동생을 잊고 살기로 작정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살다가 몸이 이상해서 진료를 받았는데, 수술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판정을 받았단다. 어머니는 외과 영역에서 가장 큰 수술을 받으셨고, 그렇게 고생을 한 후 병원에서 회복을 하는데, 문득 내가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퇴원 후 몸이 더 안정되고 난 후에, 나름의 용기를 내어 나를 수소문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눈빛은 반가움과 애틋함이 가득했다. 잡은 내 손을 놓지도 않으셨다. 이십 몇 년만에 만난 아들이 얼마나 반가우셨을까.. 하지만, 나는 그만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애틋함, 반가움 같은 감정이 나 역시 들었지만, 마치 유리천정을 뚫지 못하는 나무줄기처럼, 어느 이상 감정이 커지지 않았다. 한정된 공간에서 부풀어 오르는 여러 감정들을, 담담함이 적당히 차지하고 더 이상 커지지 못하게 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다는 기분,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내 친모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는 당연함 같은 기분이 생겼다. 이제 어떤 관계도 내 스스로 결정하고 자유로이 만들 수 있다는, 성인의 당당함 같은 것도 느꼈다. 그것 뿐이었다. 관계의 당연함과 자연스러움, 나는 거기서 더 이상 진전하지 못했다.
전공의 생활을 수료하고 전문의 시험을 치기 전, 나는 잠시 미국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목적지는 뉴욕과 그 부근이었는데, 시간을 내어서 LA를 잠시 들르기로 했다. 친 외할머니와 이모님이 LA의 한인타운에 살고 계셨기에, 어머니의 권유로 만나뵙기로 했었다. 어릴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 내 옆 의자에 가만히 앉아 나를 바라보셨다던 할머니였다. 기대와 긴장의 마음을 가지고 LA 공항 대합실로 나왔을 때, 정면 멀리 마른 체구의 할머니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내 이름을 먼저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뒷짐진 손을 풀고 내 얼굴을 쓰다듬으셨다. 나는 바로 할머니를 안아드렸다. 그리고, 순간 터진 울음.. 할머니는 내 등을 두드리며 안아주셨고, 나는 잠시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
30년을 넘긴 시간 만의 외손자와의 만남이었다. 이모님의 차를 타고 우리는 이모님이 사시는 한인타운의 아파트로 갔다. 외할머니는 나를 위해 갈비를 준비해 놓으셨다. 밥과 양념갈비로 점심 겸 첫 식사를 나누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다. 연로하신 외할머니는 할 말은 많지만 일부러 하지 않으시는 눈치였고, 이모님은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가벼운 가족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평소에도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나였지만, 이 날도 그랬다. 양념갈비는 맛이 짰고, 아파트의 분위기는 매우 낯설었다. LA 분위기가 원래 이런가 싶을 정도로 공기는 탁하고 무거웠다. 외할머니를 안고 잠깐 울어버린 이후로 내 감정은 더 이상 부풀지 않았다. 유리천정이 다시 얹힌 것처럼, 나는 낯설고 담담해졌다. 활발한 성격의 이모님이 잘 대해주셔서 무리없이 며칠간의 LA 생활을 잘 지낼 수 있었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 마주하지 못한 가족은 그리고 친척은 어쩔 수 없이 낯설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각자 살던 사람이 만나니 환경의 차이도 어쩔 수 없어서, 적응이 힘들었다. 가족의 정이나 유대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한인타운에 사는 누군가의 삶을 조용히 들여다보다 나온 것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저 각자의 삶을, 각자의 삶이 채운 시간들을 서로가 잘 살아가길.. 나는 그저 그런 생각으로 살아간다. 누군가 이런 나에게, 가족이란 각자를 넘어서는 특별한 유대가 있다고 설명한다면, 인정하되 공감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유대를 깨닫거나 받아들일 기회가 별로 없는 삶을 살아왔다. 내 아들에게도 그러하다. 내가 녀석의 삶을 대신 살아주고 아픔을 대신 받아 아파줄 수 있다면, 나는 가족의 유대라는 것을 일부러라도 배워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에 나는 녀석의 삶을 각자의 영역에 두고 바라보고 있다. 나는 친어머니가 어째서 세 살이 된 나와 태어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동생을 두고 집을 나가셨는지 아직 모른다. 그 이후로 어떤 삶을 사셨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사시는 지 구체적으로 알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안다 해도 어떻게 할 수도 또는 이해한다 해도 변하지 않을 친어머니 만의 삶이기 때문이다.
전주의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니역시, 이제 갓 난 아이가 둘 씩이나 있는 남자에게 초혼을 왔는지 알 수 없다. 한 때 궁금한 적이 있었지만,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는 일을 이제는 나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다만, 어른이 되고 삶의 모습에 조금의 이해를 덧붙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와 동생에게 쏟아내던 그 화를 조금을 알 것 같았다. 어머니의 신세, 내 기억속에 삶에 발버둥치던 어머니의 모습들, 그것들이 그녀의 삶이었다. 내가 알게 된들 어찌할 수 없이 살아왔던 그녀의 시간들이다. 나의 존재는 그런 어머니들 아래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우연과 필연들이 얽혀 지금의 나로 살고 있다. 그것은 그것 그대로 나의 삶임을 주장한다. 어느 누구도 건들 수 없는 나만의 삶이자, 내가 구축한 시간들이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고 살아간다. 결핍이 있을 것이고, 결함이 있는 나는 각자의 하나로써 시간을 보내왔고, 앞으로도 나아간다. 내가 그렇듯, 두 어머니의 삶도 각자의 삶으로써 존중한다. 더 이상의 유대나 감정이 생기지 않는 일은 나의 결핍에 기인할 수 있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각자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일 뿐이다. 각자의 삶을 존중한다는 것, 사실 요즘을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자세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