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기행(17)-전주천(1)

by 전영웅

한옥마을을 잠시 걸었다. 마을은 집이 있던 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수시로 걸어다니던 동네였다. 동부시장을 지나 경기전 입구, 오목대, 한벽루까지.. 자전거가 생겼을 때에는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던 동네였다. 이른 아침, 왱이 콩나물국밥집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쨍한 겨울볕에 반짝이는 바닥의 얼음을 조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동네의 모습은 완벽하게 변했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도 없어 차를 조심해서 걸어야 했던 거리는, 보행자를 충분히 배려하는 보도블럭이 갈린 길이 되었다. 대나무와 엉성한 철망으로 경계지었던 경기전 담은, 모던한 벽돌담이 되어 동네 분위기와 잘 어울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관광객들이 돌아다니는 그 풍경은 어릴적의 그 곳이 아니었다. 다만, 골목은 그대로였다. 길을 걷다 문득 고개를 돌리면 수시로 보이는 작은 골목 안은, 내 어릴적 그 곳이 맞다고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때묻은 하얀 페인트 담벼락에 전선이 지저분하게 늘어진 좁은 골목길, 분위기에 취해 길을 다니면 들여다 볼 일이 그닥 생기지 않는 좁은 통로.. 그렇지만, 나는 그 골목 때문에 동네가 조금이나마 반가워졌다.


골목.. 내가 살던 동네는 언제나 골목이었다. 친구를 따라 친구네 집에 놀러간 집도 좁다란 골목 안의 어느 집이었다. 이사를 해도 골목에서 골목이었다. 골목을 벗어나는 일은, 학교나 교회를 갈 때 뿐이었다. 아니면 살림이 넉넉해져서 집 앞에 차를 주차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의 주택가나 아파트로 이사하는 경우였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우리 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나는 집이 이사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느날 이사한 집이라며 주소를 알려줘서 가 보니 아파트였다. 그러니까 내 기억 속 동네의 모습은 좁다란 골목이 거의 전부였다. 그리고, 좁다란 골목 안에서 다닥하게 붙은 집들이 아웅다웅하며 살았고, 내가 알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골목 안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골목은, 대부분이 변해서 생소한 풍경의 구석 곳곳에서 파편처럼 살아남아, 내가 기억하는 그 곳이 맞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오목대에 올랐다. 그 작은 언덕에 데크계단을 포함해서 수많은 진입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기억속 오목대는 세멘트와 흙길이 반복되는 작은 소로길 진입로 하나 뿐이었다. 어느 가을 토요일 오후에, 친구들을 모아 그 길을 올라 오목대 앞에서 단체 미팅을 했었다. 처음으로 만나보는 이성 친구들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시선은 상대방에 닿아 있어 오목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오목대라는 명칭과 어울리지 않게 초라한 기와 누각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오목대는 잘 정돈된 흙바닥과 생각보다 웅장한 목조건물이어서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데크계단을 오르며 한옥마을 전경을 보았고, 오목대 너른 흙마당 가장자리에 서서 또다른 한옥마을 전경을 보았다. 겨울바람에 잎이 다 떨어진 나무가지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스산했지만, 나직한 기와지붕들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이전엔 낡은 기와지붕들이 많았고, 그 중에서도 한지 만드는 몇몇 집 기와지붕이 그나마 온전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한옥마을이라는 상품은 낡은 지붕들을 말끔하게 바꾸어놓았다. 오목대에 데크계단이 생기고 넓고 깔끔한 흙마당이 생기고, 여기저기 안내판에는 친절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정책과 자본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기억 속 정겨움을 망각함에 비례하며 떠올랐다.


오목대에서 이어지는 고가를 건너 벽화마을을 지났다. 고가 아래는 넓은 기린로가 지나고 있었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는 철로가 남아 있었고, 이후로는 도로공사를 한다며 산을 깎아 넓고 편평한 흙길을 만들었었다. 그 위를 걸어서 한벽루까지 걸었었다. 말이 좋아 벽화마을이지, 도로 만든다며 깎아낸 언덕에 간신히 살아남은 수십채의 허름한 집들이었다. 정책의 폭력의 가장자리에서 살아남은 살림은 언제나 저렴했다. 그 저렴함을 파고드는 것이 가난한 예술이었다. 벽화마을도 그러했다. 이른 아침 아직 문도 열지 않은 작고 아담한 문간들을 올려다보며 걸어내려와 한벽루 뒤편의 기차굴로 들어섰다. 한 때 철로가 있던 터널, 벽에 돌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면 목소리가 울려서 재밌던 터널이었다. 밤이면 달리는 기차에 치어 죽은 귀신들이 가끔 입구 언저리에서 서성이더라는 괴담도 적지 않았다. 터널에 상처입은 바위에는 전주천을 내려다보는 한벽당이 세워져 있다. 우리는 한벽당이라 부르지 않고 한벽루라 불렀다. 이전엔 관리가 되지 않아 신발을 신고 들어가 잠깐 주변구경을 하고 나오던 정자.. 지금은 관리가 되고 있어 빛바랜 단청과 나무기둥은 채색이 다시 되어 있었고, 신발은 벗고 들어가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지금은 기린로로 이어지는 넓은 다리에 전주천이 가리지만, 이전에는 다리가 없어 전주천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이 아래에서 여름이면,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물놀이를 하곤 했다. 피라미를 잡기도 했고, 작살로 빠가사리를 잡는 친구네 형이 멋있어보이기도 했다.


겨울의 전주천은 스산했다. 물은 깊고 맑았지만, 예전의 청명하고 시원한 모습은 아니었다. 넓은 다리에 그늘진 물은 여름에는 시원하겠다 싶었는데, 겨울은 그저 춥게만 보였다. 천변에는 산책로도 만들어지고 도로도 정비되어 깔끔해졌다. 중간중간 심어놓은 버드나무는 겨울임에도 운치있어 보였다. 그런데, 예전처럼 정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시원하게 흐르는 물살 위로 아무렇게나 자라 늘어진 덤불이 있던 옛날이 더 정감있게 기억되었다. 그 차이가 기억 속의 감정들을 느끼는데 방해가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전주천 주변을 계속 서성였다. 좁은목 약수터까지 걸어서 약수도 조금 마시고, 다시 걸어 냇가를 건너고 천변의 산책로를 걷고, 머리 위가 기린로 다리라 달리는 차 소리 웅웅거리는 한벽루 아래서 잠시 서 있기도 했다. 춥지만, 물 옆에 서 있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나는 물과의 기억에서 나쁜 기억이 없었다. 물은 언제나 친근했고 즐거웠다. 집에서는 긴장과 불안의 관계였던 가족들은, 물에 와서 놀 때엔 그런 감정의 충돌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었다. 나는 같이 간 친구들과 물 위를 달리고 물 속을 잠수하며 놀 때, 어머니는 바위에 앉아 발을 물에 담그고 가져온 책을 읽으셨다. 아버지는 산을 좋아하셨지만, 나는 아버지와 개천에서 어항을 담그고 물고기를 잡던 기억이 더 행복했던 모습으로 남아있다. 집과 멀어지면서 나는 점점 물과 가까워졌다. 억지 해석일 수도 있다. 내가 다니는 중학교의 경계 한 쪽은 동네 저수지의 둑이었다. 고등학교에 오자 학교 바로 옆으로 전주천이 흘렀다. 대학에 가니 호반으로 불리는 춘천이었고, 학교가 있던 구봉산 자락은 의암호가 굽이도는 자리였다. 생각지도 않았던 군의관 복무지는 경남 남해 바닷가.. 역시 억지 해석일 수 있다. 내가 불안과 긴장을 극도로 느끼던 때는 시내 한복판에 있던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리고 나는 서울 영등포의 병원으로 인턴수련을 와서 인턴성적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전공의 선발에서 낙오했다.


전쟁같던 외과 전공의 생활과 전임의 생활을 동대문운동장 옆과 약수동에서 하고 도망치듯 지방으로 내려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주였다. 이건 완벽한 물가 그 자체.. 섬이지 않은가..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물가를 골라서 근무할 병원을 알아 본 것도 아니니 말이다. 수련을 마치면 고향 부근으로 내려오겠거니 기대했던 친어머니는 실망스런 목소리를 감추지 않고 서운해 하셨다. 그러던 친어머니가 몇 주 후 전화를 걸어 흥분섞인 목소리로 나에게 말씀하셨다.


“영웅아, 내가 자주 묻는 용한 분에게 네 사주를 물어보니까 제주가 아주 좋다고 하더라. 물가 그 자체라고.. 거기서 12년 이상 지내면 운이 잘 트일 거라고 하시더라.”


물론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제주에서 근무를 하고 정착을 하는데, 무조건 좋았던 것만도 아니다. 의사가 정해진 대로 수련을 받고 나면 급여는 좀 더 많아지고 근무는 좀 더 여유로워지는데, 제주에 온 시점이 딱 그럴 시점이었을 뿐이기도 하고 말이다. 단지, 시간을 거슬러 생각해보면 나는 은연 중 물에 위안을 얻으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30-40년 전을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전주천에서 팬티만 입고 자맥질하며 행복하게 놀고 있던 아이였던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오른 것처럼, 나는 마치 바다에서부터 물살을 거슬러 전주 시내 한복판까지 올라와 이 자리에 선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는 중년을 넘긴 아저씨가 되어 있었고, 체면 때문에 물을 좋아하는 마음보다 물에 뛰어드는 일에 민망함을 더 크게 느끼는 현실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물을 좋아하고 물 옆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모습을 느끼려니, 천성은 나이가 변해도 쉽게 달라지지 않음을 알겠다.


일찍 나선 길이어서 오전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좀 더 그 자리에서 느릿하게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머물렀다. 바람은 차고 다리 위 차 소리는 계속 웅웅거렸다. 맞은편 물이 도는 안쪽 자갈밭에 어느 꼬마가 서 있었다. 하늘을 가리는 다리도 없이 뒤쪽 돌무더기 위로 헝클어져 뭉친듯한 마른 덤불에 눈이 조금 쌓인 어느 겨울날이었다. 넓게 얼음이 끼었고 그 아래로 물이 거칠게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꼬마의 시선은 얼음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얼음 아래 그 물에 손이 닿을 수 없어 아쉬웠고, 얼음을 깨고 물에 닿자니 추울까봐 망설이고 있었다. 개천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그런 마음이 담겨 있었다. 어서 여름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