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마음은 수시로 불안했고 긴장은 웅덩이처럼 고여있었어. 알 수 없는 어느 순간에 마음이 흔들려지면, 긴장은 거친 물결이 되어 밖으로 튀어나왔지. 불안과 긴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날이면,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몸은 굳었고, 입은 굳게 다물렸지. 친구들과 감정이 상해 치고받고 싸울라치면, 기를 쓰고 달려들지 못하고 피했어. 이겨야 한다는 자존심보다, 옷이 더러워져 어머니한테 혼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더 큰 날들이었어. 집은, 마음이 가장 불안정한 상태가 되는 공간이었어. 그 안에서, 불안과 긴장은 수시로 너의 마음 바깥으로 튀어 몸을 얼렸지.
너무 힘들었고, 벗어나고 싶었어. 그 절정에 달한 시기가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아.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 싫었고, 마음의 불안을 견디기 힘들었어. 너는, 벗어날 수 없었던 몸의 나약함과 마음의 어림에 무척 답답해했지.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겠고 어디에 하소연을 해야 할 지 전혀 알지 못할 때, 너는 선생님과 예배당을 찾아갔어.
덕진공원 맞은편의 네가 다니던 중학교, 예배당이 있었지. 어떤 이유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너는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마음을 안고 교무실의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어. 한참을 울면서 선생님에게 하소연하듯 이야기를 풀어냈어. 그러고는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지. 두 손을 꼭 쥐고 허리를 숙여 울면서 기도했어.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무거워야 하는 것인지, 어째서 집이 두렵고 싫은지.. 너는 답을 원했어. 불안과 긴장이 뒤섞인 이 마음에서 당장에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원했어. 수업도 들어가지 않은 채, 두 시간을 그렇게 무릎꿇고 허리를 숙여 울면서 기도했어. 예배당은 고요했고 어두었으며, 절규했지만 속삭이듯 작은 너의 목소리는 휘장에 스며들어 무심해졌지. 너와 마주하며 내려다보고 있던 십자가의 그는, 언제나 그랬듯 고요와 어둠 속에서 침묵했어..
담임선생님이 오셔서 같이 기도해주셨어. 담임선생님의 기도가 끝났을 때 너는 속이 잠시 시원할 뿐, 해결되지 않은 답답함과 얻어내지 못한 답에의 갈망을 안고 교실로 돌아갔어. 그 주 토요일에는 교목선생님이 너를 불러 집으로 데려가 주셨지. 키가 크고 잘 생겼던 남자 교목 선생님은 전주역 부근의 작은 주택에 살고 계셨어. 점심을 같이 먹자며 선생님의 집에서 라면을 끓여주셨지. 나는 그 때, 참치캔을 뜨거운 물에 데워서 먹는 방법을 처음으로 알았어. 너는 따뜻해진 캔 참치를 라면 위에 올려먹는 맛을 알게 된거야. 교목 선생님은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 점심을 함께하고, 학교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하시더니, 나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셨어. 그날은 좀 더웠던 초여름으로 기억하는데, 마치 화창한 봄날같은 따뜻하고 산뜻한 기운이 마음에 채워지던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하지만, 나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어.
너는 중 3이 되어 밤 10시 반까지 야간자습을 하면서 집과 그나마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 아침 6시 반이면 버스타러 나가고 집에 오면 밤 11시 반이었으니, 주말을 제외하면 집에서는 잠자는 가족들만 보며 다닌 셈이었지.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3년을 통째로 기숙사생활을 했어. 외출 시간이라고는 일요일 새벽부터 오후 2시까지였으니, 집에 가면 교회에 나가는 가족들을 잠깐 보고, 너는 너대로 교회에 다녀오면 바로 기숙사에 들어갔어. 그 때엔 다시 감정의 기복같은 것이 생겨서 영생교회 출석을 그만두고 이사한 집 앞의 작은 교회로 혼자 다녔었어. 교회는, 여전히 너에게 답을 주지 않았어. 그저 다녀야 하는 의무의 공간이자 종교적 예식일 뿐이었지. 종교적 신념도 흐릿했고, 변하지 않는 너의 불안과 긴장에 대한 답을 찾는 일에도 많이 지쳐있었지. 일요일 아침일찍 집엘 가면 가끔 어머니와의 갈등이 생겼고, 기분은 매우 무거워진 채 너는 아파트 상가의 교회에 가서 시간 때우듯 앉아있다가 기숙사로 들어갔어. 삼익수영장이 있던 삼거리 회전교차로를 건너면 있던 그 아파트에서의 추억은 그래서 많지도 않고 애틋하지도 않아. 너는 그 곳에 사는 동안 재수를 할 뻔 하다가 춘천에 있는 의과대학에 합격하여 집을 떠날 수 있었고, 합격통지 직전에 갑자기 쓰러지신 할머니를 영원히 떠나보내드려야 했었어. 너의 전주에서의 애증어린 추억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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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가 춘천의 자취방을 구하는 데 동행하셨다. 어머니는 어머니 대로의 아쉬움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종종 주체할 수 없었던 삶 속에서 그래도 나는 나름의 자랑이었고,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아들이었을 것이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춘천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의 풍경을 보며 내가 ‘아름답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답답하고 걱정스럽다’ 하셨었다. 자취방을 구하고 어머니는 다시 서울을 거쳐 전주로 가셨다. 어머니는 아들을 두고 홀로 집으로 가는 길을 아쉬워하셨다. 하지만, 나의 감정과 어머니의 감정에는 순수하다 말할 수 없는 애증이 뒤섞여 있었다. 그 애증은, 타지에서 자취하며 비싼 등록금과 수업료를 내야 하는 가난한 집 출신 의대생의 현실과 맞물려 이후에도 수시로 마찰을 일으켰다. 방학때 잠시 들른 전주 집에서도, 가끔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통해 나누는 대화에서도 갈등은 여전했다. 나는 더 외롭고 복잡하고 힘들었다. 그 마음을 해결하고 싶은 욕구는 여전해서, 나는 다시 종교를 찾았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지며, 나는 내가 몸과 마음을 온전히 내맡길 수 있는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위안은 온전한 익명으로 조용히 드나들 수 있었던 대형교회에서나 겨우, 그리고 조금은 가능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학내 종교동아리에서 찾다가 성공회 계열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그 안에서 나의 호기심은 일종의 버거움과 두려움으로 변해버렸다.
무늬만 남은 기독교인이 되어버린 것이 대학생 때였다. 나는 교회라는 공간 안에서 앉을 자리를 찾지 못했고, 신앙 안에서 마음을 내려놓을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것이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탓인지, 현실과 타협하며 혼란한 말들만 쏟아내는 교회의 탓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집과의 갈등을 어떠한 형태로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결국 독자적인 삶을 살아갔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스스로 생활비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학비나 생활비 문제로 집에 전화를 거는 일은 나에겐 굴욕이었다. 그래서, 이후로 전화를 거는 일 자체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 내 속의 수많은 나를 풀어보려는 노력도 포기했다. 세상을 알면 알 수록 교회는 현실에 얼룩진 공간이었고, 순수하려는 교회는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으며 주변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신은 인간의 일에 별 관심이 없는듯 언제나 침묵했고, 나 역시 그 침묵에 매몰된 하찮은 일개 인간이었다. 종교 안에서 답을 구하는 일은 불가능하거니와 의미가 없는 일이었고, 나는 현실을 살아가는 일 자체만으로도 버거운 학생이자 삶의 외로운 주인이었다.
교회는, 교리도 위안도 없는, 마음만이 방황하던 추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