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재에서 멀리 보이는 바다의 절반을 가리고 지어진 아파트 단지가 통째로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다. 400세대가 넘는 단지가 완공된 것이 6개월 정도 되었고, 밤이면 일부러 불을 켜 둔 세대 몇 말고는 산란하는 바다빛에 암흑의 기둥처럼 적막하기만 했다. 듣기로는 단 1세대만 분양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착공 시기부터 말은 많았다. 분양가가 터무니없이 높아 살 사람이 없을거라 했고, 공사장 주변은 시골길이나 다름없는 소로라 공사중인 때부터 완공된 지금까지 길은 더욱 복잡해졌다. 문제는 아파트를 짓는다는 이야기가 돌 당시, 제주엔 악성 미분양이 이미 천 세대를 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기어이 아파트를 올리더니 결국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화가 나는 일이다. 멀리 평온하게 펼쳐진 바다풍경을 반이나 가리고 세워졌으면서, 저따위로 삭막한 흉물로 방치되고 있으니 말이다. 악성 미분양이 넘치고 분양가가 터무니없이 높다는 사실을 아파트를 세운 업체도 시나 도 공무원들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더욱 화가 나는 일이다.
내가 돌보던 환자가 집으로 돌아왔다. 4월에 상황을 발견하고 119를 불렀었으니, 5개월간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양 다리가 없는 채로 실려갔던 환자는 이제 한쪽 손마저 사라진 채로, 그렇게 돌아왔다. 경사진 동네, 조금은 깊숙히 들어가 쪽문을 열면 원룸구조의 작은 방이 나타났다. 창문은 있지만 반지하 구조라, 바로 옆건물 바닥과 벽이 한두뼘 간격으로 있어 빛은 전혀 들어오지 않는 방이었다. 그런 방에 그는 다시 돌아왔다. 다행이라 할 수 있는 사실은 활동지원사가 함께 와서 그를 돌보고 담배냄새 자욱했던 방을 정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실려가기 전의 방을 되돌아보면 정말 심각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모를 총체적 난잡에, 나는 그를 의학적으로 돌보는 것보다 환경부터 바꾸어줘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래서, 담당 사회복지사에 연락하여 주거상향지원 같은 주거환경개선 프로그램을 재촉했다. 담당 복지사는 열심히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내가 환경개선 문의를 한 시기가 대략 초봄 정도였으니, 6개월 이상의 시간이 경과한 것이다. 물론, 대상자인 환자가 원하는 주거환경도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양 다리가 없는 그에게 지하감금이나 다름없는, 경사진 동네의 볕이 들지 않는 작은 쪽방을 서둘러 개선해주어야 한다는 요구가, 6개월이 넘도록 여전히 알아보고 있다는 대답으로만 돌아오고 있는 사실은 분명 문제가 있어보였다. 이제는 한 손만 남은 채로 과거의 공간으로 들어온 그는 다시 과거의 모습처럼, 반쯤은 강요된 감금과 칩거생활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누군가의 욕망이다. 그 욕망으로, 입주할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막대한 자금을 들이붓고, 누구나 누려야 할 자연의 풍경을 가려가며 열심히 지어 올린다. 아무도 입주하지 않아 통으로 매물이 나왔지만, 자본과 제도는 이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반면,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심각하게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겨우겨우 살아오던 내 환자는, 6개월이 넘도록 주거환경 개선이 필요하다고 읍소하지만, 제도나 구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대단한 환경개선과 한정없는 시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껏 열심히 살아왔던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신체에 의도하지 않은 심각한 장애를 안아버린 개인의 최소한의 생활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조금만 관심을 가져달라는 요구일 뿐이다. 어느 부동산 관련 책에서 우리나라는 2006년에 이미 4인 가구 기준 1가구 1주택을 충족할 만큼 충분한 주택공급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내가 사는 제주는 한동안 거품이 일면서 앞에서 말한 미분양이 1천 채를 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내 두 세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점점 넘쳐나는데, 장애를 가진 내 환자는 여전히 사람이 살 만한 조건이 아닌 쪽방에서 침침한 형광등 불빛과 텔레비전 화면광에 의존하여 하루를 보내고 있다. 단순하지만 이 엄연한 사실에 아이러니를 느끼는 나는 너무 순진한 걸까?
자본주의가 작동되는 원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작동에 필요한 연료 중 하나가 인간의 욕망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미분양이 넘쳐도 지어진 400세대의 빈 집은 어떻게든 자본의 순환 안으로 녹아들 것이고, 그 과정에서 욕망을 가진 일부 인간들은 이득을 거머쥘 것이다. 동시에, 자본의 작동방식이 극단적이지 않도록 제도가 자본에 제동을 건다. 그 제동의 하나가 최소 수혜자 또는 낙오자에 제공되는 안전망일테고, 내 환자는 그 안전망이 시급한 상황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과한 작동에 이 섬의 제도는 제대로 제동을 걸지 못하는 느낌이다. 그 느낌은, 그런 과정에서 누군가의 욕망과 이득이 관여하고 있겠구나 하는 합리적 의심을 자아낸다. 내 바람이 극단적이거나 조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환자가 심각한 지경에 놓였다는 사실은 나 뿐만 아니라, 지역장애인보건센터의 직원들도, 그를 함께 본 방문진료팀의 간호사도 공감하고 있다. 이 섬의 또는 우리가 사는 모든 세상은, 누군가의 욕망에는 무언의 제한없는 동조를 보내면서도, 누군가의 낙오에 대해서는 특별한 연관이 있지 않는 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때론 그 무관심에 그악스런 언행을 더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늦은 밤, 멀리 수평선의 어화 행렬을 한순간 가려버리는 검은 기둥들이 보인다. 몇몇 세대의 불을 일부러 켜두고 마치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려고 애쓰고 있다. 다시 한 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풍경을 가리고, 넘치는 빈 집을 만들어 두고 저렇게 뻔뻔하게 불을 켜두고 사람들을 속이려 든다. 내 환자는 풍경은 커녕 밤낮이 바뀐 채로, 어둠 속에 어둠이 겹친 반지하 쪽방에서, 남은 한 손에 담배를 끼워 물고 작은 공간을 희미하게 번쩍이는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화가 겹쳐 오른다. 내 앞에 저 무례한 아파트를 지은 업체 대표와 건설을 허가한 공무원이 나타난다면, 일단 면상에 죽빵부터 날릴 것이다. 그건 단지 아파트 때문 만은 아니다. 무모하고 예의없는 자본주의의 작동에 제대로 제동을 걸지 않는 세상의 무심함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