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반복되는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방식

by 꽉형 헤어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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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왜 우리 삶에는 늘 이런 일만 생길까?”

그 말속에는 억울함과 피로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어떤 실패는 너무 비슷하게 찾아오고, 어떤 상처는 너무 익숙한 모양으로 되풀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을 헤아리기 시작합니다.

‘올해는 왜 이렇게 일이 꼬였나’, ‘왜 이런 사람만 만나나’, ‘왜 비슷한 문제가 또 생기나’.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은 사건의 반복이 아니라 방식의 반복일 때가 많습니다. 삶은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오지만, 우리가 그 삶을 맞이하는 태도는 의외로 같은 옷을 입고 서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 사건은 대체로 변합니다. 시간도 흐르고, 환경도 바뀌고, 사람도 달라집니다. 그러니 우리가 겪는 일의 표면은 늘 새롭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론이 비슷하게 닫힐 때가 있습니다. 같은 종류의 갈등, 같은 모양의 지침, 같은 자리의 무너짐처럼요. 그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 이건 사건이 아니라 내가 사건을 다루는 방식이 반복되고 있구나.’ 저주의 감각이 생기는 자리도 여기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들입니다. 우리는 늘 다른 프로젝트를 맡고, 다른 기한과 다른 조건 속에서 일을 합니다. 사건은 매번 다릅니다. 그런데 일이 조금만 흔들리면 늘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몰아붙입니다. “이건 내가 더 버텨야 해. 더 잘해야 해. 끝까지 책임져야 해.”

하지만 결과는 늘 비슷합니다. 결국 혼자 떠안고 지쳐버리거나, 완벽을 향해 달리다 스스로를 소모하거나, 끝내 몸과 마음이 멈춰버리는 결론으로 닫히게 됩니다. 사건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이 비슷해서 결론이 반복되는 겁니다.


혹은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상황에 놓입니다. 그러니 사건은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갈등이 생기면 늘 같은 방향으로 몸이 움직입니다. 흔들릴 때마다 침묵 속으로 숨거나, 반대로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과하게 밀어붙이거나, 혹은 먼저 포기해 버리는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상대가 누구든, 상황이 어떻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건너는 다리는 늘 같은 모양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가 자꾸 비슷한 결말로 흐르는 겁니다. 사건이 아니라 방식이 우리를 그 결말로 데려갑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저주를 분석할 때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또 생기지?”에서
“나는(우리는) 이럴 때 늘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지?”로 바꿔야 합니다.
사건을 탓하는 질문은 어제의 사건과 오늘의 사건을 비교하게 만들지만, 방식에 대한 질문은 우리 자신을 비교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저주를 깨는 실마리는 언제나 그곳에 있습니다.


방식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방식은 대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통했던 방식’을 배우며 살아왔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조용히 있는 것이 안전했고, 어떤 환경에서는 완벽해야 칭찬을 받았고, 어떤 관계에서는 먼저 책임지는 것이 사랑을 지키는 길이었습니다. 그때의 방식은 우리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정답’으로 기억합니다. 문제는 삶이 변했는데도 그 정답을 그대로 들고 다니는 데 있습니다. 삶이 달라졌는데 방식이 달라지지 않으면, 방식이 저주가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방식은 우리 눈에 잘 안 보인다는 점입니다.
사건은 눈에 보입니다. 회사에서 일이 터졌고, 누가 말을 했고, 일정이 꼬였고, 관계가 끝났고, 계획이 무너졌습니다. 사건은 분명히 보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 사건을 붙잡고 분석합니다. 하지만 방식은 사건보다 한 층 더 아래에서 조용히 작동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을 맞이하는 우리 내부의 자동 반응. 그 자동 반응이 너무 익숙해서, 우리는 그것을 나라고 착각합니다. “원래 나는 이렇게 해.”라고 말하며요. 그래서 방식은 오래도록 가려집니다. 저주는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반복되는 것입니다.


방식의 반복이 저주처럼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방식이 우리의 강점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책임짓는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기준이 높은 사람은 더 잘하려는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미리 보는 사람은 준비하는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역할을 지탱해 온 사람은 버티는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자기를 단련해 온 사람은 엄격해지는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이 모든 방식은 대개 선한 의도와 좋은 능력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더 강하고, 더 자동적이며, 더 오래 반복됩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장점”인데, 우리에게는 그 장점이 항상 같은 방향으로만 흐를 때 생기는 고단함이 저주로 느껴지는 겁니다. 강점은 본래 상황에 따라 방향을 바꿔야 생명이 있는데, 우리는 종종 강점을 고정된 방식으로 굳혀버립니다. 그 순간 강점은 수단에서 운명으로 변하고, 그 운명은 우리를 되돌려 보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전환점을 만납니다. 사건은 통제하기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변덕스럽고, 타인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환경은 늘 새로운 변수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방식은, 적어도 조금씩은, 우리 손에 있습니다.

저주가 사건이라면 우리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지만, 저주가 방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방식은 배운 것이기 때문에, 다시 배울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실제로 많은 변화는 사건을 바꿔서가 아니라 방식을 바꾸면서 시작됩니다. 같은 문제 앞에서 우리가 조금 다른 반응을 선택할 때, 같은 갈등 앞에서 우리가 조금 다른 말을 꺼낼 때, 같은 불안 앞에서 우리가 조금 다른 기다림을 허락할 때, 결론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사건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건을 대하는 길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저주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반복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맞이하는 방식의 반복’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알아차리는 순간, 저주는 이미 절반쯤 풀리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사건을 탓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우리 방식의 구조를 바라보는 자리에 서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반복되는 방식은 무엇일까?”

이 질문이 다음 계단을 엽니다.


이제 우리는 “내 탓”과 “내 패턴”을 구분하는 눈을 갖추려 합니다. 방식을 본다는 건, 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해서 다시 움직이게 하는 일이니까요.

사건은 여러 얼굴로 오지만, 방식은 한 얼굴로 돌아옵니다. 저주의 본질이 바로 그 한 얼굴이라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도 그 한 얼굴의 방향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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