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이 힘들 때마다 모든 것을 저주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고단한 날은 고단하다고 말하고, 실패한 날은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에는, 그 말들이 우리의 체감을 담아내지 못하는 때가 찾아옵니다.
그때 우리는 더 무거운 말을 꺼냅니다. “저주 같다.”
그 말이 나오는 자리는 대체로 비슷합니다. 사건이 반복될 때가 아니라, 결론이 반복될 때입니다. 겉모습은 달라졌는데 끝은 늘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경험, 그때 우리는 저주를 부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건들은 늘 다른 얼굴을 하고 옵니다. 다른 사람, 다른 상황, 다른 계절, 다른 문제.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들의 삶은, 사건이 달라져도 결과가 늘 비슷한 모양으로 닫히곤 합니다.
다시 혼자 떠안고 지쳐버리는 결론,
다시 완벽을 향해 달리다 스스로를 소모하는 결론,
다시 미래를 앞당겨 살다 현재를 잃어버리는 결론,
다시 ‘되어야 하는 나’로 살아가며 내가 원하는 나를 잊는 결론,
다시 나에게만 차가워져 삶을 시험처럼 버티는 결론.
이렇게 끝의 모양이 되풀이될 때, 우리는 단순히 “힘들다”가 아니라 “저주 같다”고 말합니다. 저주라는 말은 사실, “왜 우리는 자꾸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가”라는 질문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 오래 지속될수록 저주라는 말은 더 짙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바꾸면 달라질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결심을 새로 해봅니다. 그런데도 삶이 결국 익숙한 결론으로 돌아오면,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느낍니다.
“문제는 바깥의 장면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래 굳은 방식에 있다.”
저주가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 반복은 단순한 습관이 아닙니다. 대개 우리를 지켜온 강점에서 비롯된 반복입니다. 책임감, 완벽을 향한 기준, 먼 미래를 읽는 예견, 역할을 지탱하는 성실함, 스스로를 단련하는 엄격함. 이 힘들은 한때 우리를 살렸고, 그래서 몸과 마음 깊은 곳에 ‘자동 반응’으로 저장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생각하기 전에 그 길로 들어섭니다. 그 길은 낯설지 않고, 익숙하고, 빠르고, 안전해 보입니다. 하지만 삶이 변한 뒤에도 그 길을 그대로 걸으면, 강점은 어느 순간 우리를 앞으로 보내는 힘이 아니라 되돌리는 힘이 됩니다. 그때 우리는 그 반복을 저주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저주라는 말에는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건 내가 못나서 생긴 일이 아니다.”
“이건 내가 게을러서 생긴 일이 아니다.”
“이건 내가 살아남기 위해 붙잡았던 방식이, 지금의 삶에서는 나를 가로막고 있다는 신호다.”
저주는 약점의 낙인이 아니라, 강점이 한 방향으로 굳어버린 흔적입니다. 그래서 저주란 말을 우리가 쓰는 순간은, 사실 변화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그 말속에는 이미 “이 반복을 바꿀 수 없을까”라는 의지가 숨겨져 있으니까요.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입니다. 저주라는 단어에 얼어붙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가리키는 반복의 모양을 정확히 보는 것입니다.
다음 꼭지에서 우리는 그 반복이 사건이 아니라 반응의 반복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들여다볼 겁니다.
저주의 실체를 손에 쥐어야, 비로소 방향을 틀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