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저주’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 대개 그 말끝에 어렴풋한 검은 기운을 붙입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운, 이유를 알 수 없는 막힘,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되풀이되는 실패와 같은 검은 기운을요. 그래서 저주는 마치 바깥에서 날아와 우리의 삶에 달라붙는 어떤 사악한 힘처럼 느껴지지요.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에 걸린 저주는 우리의 삶 안에서 오래 굳어진 반복임을 알게 됩니다. 저주는 어디선가 내려온 주술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되풀이해 온 삶의 패턴입니다.
우리 삶의 패턴이라는 말은 조금 건조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늘 건조한 말속에 숨어 있지요. 패턴은 ‘하나의 길’입니다. 한번 만들어지면 몸이 그 길을 자동으로 따라가게 되는 습관의 통로입니다. 어떤 상황이 오면 생각하기 전에 반응하고, 반응이 쌓여 선택이 되고, 선택이 쌓여 인생이 되는 길입니다. 그러니 저주란, 외부에서 내게 씌워진 불가항력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만든 길이 어느 순간 우리를 되돌리는 힘으로 변해버린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그걸 ‘저주’라고 부르게 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반복이 우리를 전진시키지 않고 제자리로 돌려보낼 때 사람은 그것을 저주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기어이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어제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하고, 우리 스스로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싶어 하는데, 이상하게도 늘 같은 곳에서 무너지고 같은 말로 상처받고 같은 형태의 관계에서 고단해지고 같은 결론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그때 사람은 스스로를 탓하거나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먼저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도대체 왜 또 이러지? 왜 나는 늘 여기로 돌아오지?”
이 ‘되돌아옴의 감각’이 저주라는 말의 진짜 뿌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주가 사건의 반복이 아니라 반응의 반복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 인생에는 왜 이런 일만 생기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삶은 생각보다 다채롭고, 사건 자체는 늘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옵니다. 다만, 그 사건 앞에 선 우리의 반응은 놀랄 만큼 같을 때가 많습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움츠러들고, 비슷한 말에 비슷하게 흔들리고, 비슷한 선택으로 비슷한 결과에 도달하는 것. 그러니까 저주는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보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의 문제로 더 가까이 이해해야 합니다. 사건은 변주되지만, 반응은 익숙하게 반복됩니다. 저주는 그 익숙함이 만들어낸 그물망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패턴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반복을 배웁니다. 한 번 통했던 방식, 위험을 피해줬던 방식, 칭찬받게 해줬던 방식, 사랑을 지키게 해줬던 방식. 우리는 그런 방식들을 마음속에 저장하고, 다음에도 그 길을 걷습니다. 문제는 그 길이 언제나 지금의 우리에게도 통하는 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살린 방식이 오늘의 나를 고립시킬 수 있습니다. 어린 날의 나를 지켜준 방어가 어른의 나를 옥죄는 족쇄가 될 수 있습니다.
패턴은 원래 생존의 기술이었지만, 삶이 바뀐 뒤에도 우리가 그 기술을 바꾸지 못하면, 그 생존의 기술은 자꾸 우리를 과거의 자리로 끌고 갑니다. 그때부터 패턴은 저주가 됩니다.
저주의 패턴은 대개 선한 의도에서 시작됩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내가 버티면 모두가 안전하다”는 믿음으로 버팁니다. 완벽주의가 있는 사람은 “더 잘하면 더 나은 삶이 올 것이다”라는 희망으로 자신을 밀어붙입니다. 미리 걱정하는 사람은 “준비하면 덜 아프다”는 지혜로 미래를 앞당겨 삽니다. 역할에 익숙한 사람은 “내가 흔들리면 가족과 일이 흔들린다”는 사랑과 성실로 자신을 지탱합니다. 자기에게 엄격한 사람은 “나를 다듬어야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윤리로 스스로를 단련합니다.
처음에는 이 모든 방식이 형편없는 저주가 아니라 삶을 지탱해 준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주의 패턴은 늘 강점의 토양에서 자랍니다. 문제는 그 강점이 한 방향으로만 오래 흐를 때 생깁니다. 강점은 본래 방향을 바꾸며 살아야 빛이 나는데, 어떤 강점은 스스로를 고집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책임감은 ‘혼자 감당’으로 굳어지고, 완벽주의는 ‘멈추지 못함’으로 굳어지고, 예견은 ‘지금의 삶을 잃어버림’으로 굳어지고, 역할은 ‘내 삶의 욕망을 밀어냄’으로 굳어지고, 엄격함은 ‘내 편의 목소리를 지움’으로 굳어집니다.
선한 의도는 시간이 지나며 형태를 바꾸고, 어느 순간부터 그 의도는 나를 살리는 대신 나를 되돌립니다. 그 도착점이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저주의 패턴을 직시한다는 건 무엇일까요. 그건 “내 인생에 왜 이런 일이 생기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상황에서 ‘항상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지?”를 묻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의 사건을 다시 세어보는 게 아니라, 우리 반응의 궤적을 따라가 보는 일이지요.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어떤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나는 늘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일이 조금만 삐끗하면, 나는 늘 기준을 더 올려 스스로를 몰아붙이지는 않는가.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을 생각하다가, 나는 늘 지금의 나를 놓치지는 않는가.
남이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하다가, 나는 늘 내가 원하는 것을 뒤로 미루지는 않는가.
실수할 때마다, 나는 늘 나에게만 차갑게 말하지는 않는가.
이 질문들은 우리 스스로를 비난하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해방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저주의 패턴을 알아차릴수록 우리는 운명적 불운에서 멀어집니다. “나쁜 일이 반복되는 인생”에서 “반복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는 인생”으로 이동하게 되니까요. 그 이동은 작지만 결정적입니다. 저주를 초자연에서 패턴으로 옮겨오는 순간, 삶은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옵니다.
저주는 신비한 무언가가 아닙니다. 저주는 반복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반복은, 방향을 조금만 틀어도 달라지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