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서 저주의 진짜 얼굴을 보기 위한 눈을 새롭게 닦았습니다. 저주는 초자연의 낙인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온 반복의 패턴이라는 것. 그리고 그 패턴은 대개 약점이 아니라 강점의 그림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강점의 그림자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우리 삶에 들어와 있었는지, 하나씩 가까이 들여다보려 합니다.
그 첫 번째 얼굴이 바로 “너무 책임감이 강한 마음”입니다.
책임감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기둥 위에 많은 것들을 올려놓고 살아왔습니다. 가족의 안전, 일의 성취, 관계의 평온, 약속의 이행, 그리고 “내가 나로서 서 있는 느낌”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렇기에 책임감은 대개 칭찬의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성실하다, 믿음직하다, 든든하다, 끝까지 해낸다.
우리는 이런 말들 속에서 책임감을 우리의 미덕으로 키워왔습니다. 니체는 자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란 우리 자신에게 책임을 지려는 의지다.” 책임감이 우리에게 단지 짐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중심을 세우는 자유의 형식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임감이라는 책무를 의심하는 대신 그 기원을 먼저 이해하려고 합니다. 책임감이 어째서 그렇게 강한 힘이 되었는지, 그 기원이 얼마나 선하고 필수적이었는지를 먼저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힘이 정작 우리를 되돌리는 순간에도, 우리가 그 책임감을 버리지 않고 방향을 틀어 다시 삶의 편으로 돌려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책임감을 배우는 과정은 대체로 아주 이릅니다. 책임감은 성인이 된 뒤 갑자기 생겨나는 성품이 아니라, 삶의 바닥에서 천천히 굳어진 생존 기술입니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안전하게 존재하는 법을 배웁니다. 어떤 집에서 우리는 조용히 있는 것이 안전했고, 어떤 관계에서 우리는 착한 아이가 되는 것이 안전했으며, 어떤 환경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잘 해내는 것이 사랑을 얻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책임감은 단순한 도덕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살게 해주는 규칙이었고, 삶을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주는 손이었습니다. 이 세계에서 흔들리면 안 되는 것들을 우리가 어깨로 지탱해야 했던 순간들, 그 순간들이 책임감의 씨앗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시간이 지나며 자라, 어느 날부터 우리 삶의 뼈대가 됩니다. 우리는 한 번 책임지는 사람이 되면, 그 방식이 삶을 굴리는 곳곳에서 통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신뢰를 얻습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일을 맡게 됩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관계 속에서 중심이 됩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결국 많은 것을 지켜냅니다. 그러니 책임감은 우리의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준 힘이었습니다.
저 역시 학창 시절부터 대학을 지나 사회에 첫발을 디딜 때까지, 책임감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그 책임감은 꾸준함이라는 또 다른 덕목과 만나 큰 시너지를 내기도 했죠.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책임감은 저를 지탱해 오는 힘으로 다가오는 동시에 저를 옥죄는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버티고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게 저의 정체성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책임감이 “선택”이 아니라 “정체성”이 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안전했고,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사랑받았고,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책임감은 단순한 성향을 넘어, 우리 삶의 기둥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의 중요한 기둥이 된 책임감에는 두 가지 층이 있습니다.
첫째는 외부의 기둥입니다. 우리가 맡은 일, 우리가 지키는 사람들, 우리가 감당하는 역할들. 이 기둥이 없으면 삶이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임감을 통해 세계와 관계를 유지합니다.
둘째는 내부의 기둥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존재감의 중심. 책임감은 우리 안에서 자존감의 뼈대가 되기도 합니다. “나는 책임지는 사람이야”라는 자기 정의는 그 자체로 우리를 세워주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책임감은 때로 사랑이나 돈보다 더 깊숙한 자리에서 우리를 지탱합니다.
책임감이 삶의 중요한 기둥이 된다는 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책임감이 외부의 질서를 붙잡고, 내부의 존재감을 붙잡아주는 두 겹의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책임감이 기둥이 되는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자연스러우니 우리는 그 기둥이 얼마나 무거워졌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는 책임감을 자랑처럼 여기며 더 키우고, 더 두껍게 만들고, 더 많은 것을 그 위에 얹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화분 하나 올렸던 기둥이, 어느 날엔 지붕 전체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책임감이 삶의 기둥이 되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해야 해.”
“내가 아니면 안 돼.”
“내가 버티면 된다.”
처음에 이 말은 삶을 지켜준 말이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 기둥이 지나치게 두꺼워지면, 이 말은 우리를 서서히 고립시키는 말로 변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변화를 우리는 천천히, 거의 눈치채지 못한 채 따라갑니다. 기둥이 단단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올리게 되고, 더 많은 것을 올릴수록 기둥은 더 무거워지니까요. 그리고 이 마음은 어느새 우리 스스로를 잠식하곤 합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런 삶의 과잉에 대해 조용히 경고합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을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책임감이 기둥이 될수록, 우리가 “모든 것”을 떠받치려 드는 습관에 얼마나 쉽게 빠지는지를 되돌아보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책임감이 인생의 기둥이 된 것은, 우리가 잘 살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흔들릴 때 지키고자 했고, 누군가를 위해 버텨왔고, 공동의 삶을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온 사람들이기에 책임감은 기둥으로 자랐습니다. 그러니 이 장의 출발점은 비난이 아니라 존중이어야 합니다. 책임감은 우리를 망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라난 힘입니다. 저주는 그 힘이 오래 한 방향으로만 흐를 때 생겨난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힘의 기원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책임감이 우리 삶의 기둥이 되었던 이유를 인정할수록, 우리는 그 기둥이 어떤 순간에 우리를 다시 되돌리는지 더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다음 질문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 기둥이 어떻게 내가 버티면 된다는 신념으로 굳어졌는가.”
책임감이 삶의 기둥이 되는 과정이 있었다면, 그 기둥이 우리 마음 안에서 하나의 철칙으로 굳어지는 과정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신념의 탄생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책임감이 우리를 살린 길이었음을 인정한 채, 그 길이 언제부터 혼자만의 길이 되었는지. 그 조용한 변곡점을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