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이 삶의 기둥이 되는 과정을 따라오며 우리는 이미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책임감은 처음부터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살게 했던 기술이었고, 우리를 서 있게 했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둥이 있다고 해서 그 기둥이 반드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둥은 시간이 흐르며 점점 더 많은 것을 떠받치고, 그 무게가 커질수록 기둥을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게 책임감의 기둥이 마음속에서 하나의 철칙으로 굳어질 때, 우리는 서서히 한 문장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내가 버티면 된다.”
이 신념의 출발은 대개 선함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흔들리는 것들 속에서 ‘버팀’을 배웠습니다. 어릴 때든, 성장한 뒤든, 삶이란 종종 우리에게 비어 있는 자리를 내어주고 그 자리를 누군가가 채우길 요구합니다. 집안의 분위기를 지켜야 하는 자리, 동생을 돌봐야 하는 자리, 부모의 마음을 달래야 하는 자리, 팀에서 구멍 난 일을 메워야 하는 자리, 관계 속에서 갈등을 수습해야 하는 자리.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버텼고, 그 버팀이 실제로 많은 것을 무너지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버텨낸 사람에게 삶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래,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 속삭임은 칭찬이기도 하고, 동시에 다음 버팀을 요청하는 약속이기도 하지요.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 여러분에게 한 그 칭찬이 여러분을 옥죄고 있다는 생각을 받아본 적 없으신가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내 마음속의 그 생각의 시작은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서 시작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반복될수록 버팀은 기술을 넘어 신념이 됩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버티는 일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버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이마누엘 칸트는 의무를 말하며 이런 구조를 짚습니다. “만약 의무가 나 자신에게 향한 것이라면, 나는 나를 구속하는 자로 생각한다.” 책임감이 스스로에게 향할 때, 우리는 ‘누가 시켜서’ 버티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묶어서’ 버티게 됩니다. 이때 버팀은 외부의 요구가 아니라 내부의 법칙이 되고, 그 법칙은 우리를 움직이는 가장 깊은 동력이 됩니다.
신념이 굳는 두 번째 이유는, 버팀이 우리에게 성취와 안전을 동시에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버티는 동안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신뢰, 자리, 결과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저 사람은 믿을 만하다”는 선배들의 평가, 상사들의 평가. “저 사람은 믿고 따를만하다”는 후배들의 추켜세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존재감. 여기서 버팀은 공동을 지키는 행위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이 됩니다. 니체가 자유를 말하며 남긴 문장, “자유란 우리 자신에게 책임을 지려는 의지다.” 는 그 지점을 비춥니다. 처음의 버팀은 우리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내가 내 삶을 책임질 수 있다는 감각, 내가 무언가를 붙잡고 있다는 감각이 우리를 어른으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자유의 형식이 너무 오래 한 방향으로만 자라, 결국 자유가 아니라 ‘버티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공포의 형식으로 변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신념의 세 번째 뿌리는 공포입니다. 버팀이 없다면 삶이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내가 손을 놓는 순간 가족이, 조직이, 관계가 흔들릴 것이라는 두려움. 한번 그런 두려움을 맛본 사람은, 다시 그 순간을 맞지 않기 위해 더 단단히 버팁니다. 버팀이 나를 살렸던 기억이, 어느 순간부터는 버팀이 아니면 나는 살 수 없다는 믿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죽을힘을 다해 버틴다는 것. 그 이면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놀랍도록 조용한 방식으로 우리 마음에 자리를 잡습니다. 격렬한 선언이 아니라, 일상 속 작은 반복으로. “이번만 내가 할게.” “내가 하는 게 빠르니까.” “내가 참으면 된다.” 이런 문장들이 조금씩 우리의 몸 안에 들어와,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수렴합니다.
“내가 버티면 된다.”
철학하는 황제로 불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삶의 장애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을 막는 것이 길이 된다.” 버티는 사람들은 이 말을 오래 곱씹고 체화한 사람들입니다. 문제를 만나면 멈추기보다 길로 바꾸는 능력을, 고통을 마주하면 도망치기보다 견디는 능력을 그 끝에 만들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성장했고 많은 것을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이 우리의 내면에서 과잉으로 작동하면, “막는 것은 길이 된다”가 아니라 “막는 것은 내가 길이 되어야 한다”로 변주되기도 합니다.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우리가 스스로를 길로 내어주며, 결국 우리부터 닳아버리는 쪽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니 “내가 버티면 된다”는 신념은, 한 사람의 성격 결함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 만들어낸 논리적 귀결입니다. 버팀이 통했던 기억, 버팀이 가져다준 안전, 버팀이 지켜낸 세계, 그리고 버팀이 없을 때 느꼈던 공포가 겹쳐져 그 신념을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신념은 강점의 결정입니다. 우리가 약해서 버틴 게 아니라, 강했기 때문에 버티는 길이 몸에 배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이 신념의 탄생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신념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면, 우리는 그 신념이 언제부터 우리를 살리는 대신 우리를 혼자 남게 하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신념의 기원을 존중하는 사람만이 그 신념의 방향을 틀 수 있으니까요.
다음 꼭지에서 우리는 그 방향이 바뀌기 시작한 지점, 다시 말해, 책임감의 미덕이 책임감의 함정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더 가까이 들여다보려 합니다.
“버텨온 힘은 어떻게 우리를 지탱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를 가두게 되었는가.”
그 얇고도 결정적인 경계선 위로, 이제 함께 걸어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