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우리는 분명한 사실 하나에 도달했습니다.
문제는 역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역할만 남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되어야 할 사람이 되느라, 되고 싶은 사람을 오래 미뤄왔고, 그 결과 삶은 안정되었지만 움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역할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욕망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이 꼭지에서 제안하는 해독제는 급진적이지 않습니다. 직장을 그만두라는 말도 아니고, 모든 책임을 내려놓으라는 요구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금의 삶을 유지한 채, 아주 작은 틈을 내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 틈을 이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역할 속에 욕망을 얹는 자리.
많은 사람들이 욕망을 회복하려 할 때, 너무 큰 단위로 생각합니다. ‘이 삶이 아닌 다른 삶’, ‘지금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 하지만 이런 상상은 대개 또 다른 부담으로 돌아옵니다. 삶을 바꾸려는 욕망이, 다시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망은 또다시 미뤄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은 규모가 아니라 위치입니다.
욕망을 삶의 중심에 둘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삶에서 완전히 밀어내지만 않으면 됩니다. 욕망은 주인이 아니라 동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역할이 운전대를 잡고 있더라도, 욕망이 조수석에 앉아 있는 삶. 그것만으로도 삶의 감각은 달라집니다.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혜란,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말은 체념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조건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나에게 가능한 움직임을 찾는 태도입니다. 역할 속에 욕망을 얹는다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업무는 그대로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일을 정리해보는 것.
가족의 역할은 지키되, 하루 중 아주 짧은 시간만이라도 나를 위한 감각을 허용하는 것.
의무를 수행하되, 그 의무가 끝난 뒤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을 미리 비워두는 것.
이것들은 삶을 뒤엎지 않습니다. 하지만 삶의 질감을 바꿉니다.
니체는 “위대한 변화는 언제나 작은 전환에서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극적인 결단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작은 선택이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끕니다. 욕망을 얹는 자리는 크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작을수록 지속됩니다. 지속되는 욕망은, 일시적인 탈출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집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욕망을 얹는다는 것은, 욕망을 항상 만족시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욕망을 알고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선택하지 않는 것과, 모른 채 밀어내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욕망을 의식 위로 올려놓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자동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하는 사람이 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삶을 구성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네가 그것에 부여하는 자리다.”
욕망을 삶의 어디에 두느냐는,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욕망을 뒤편에 두면 삶은 관리가 되고, 욕망을 옆에 두면 삶은 동행이 됩니다.
이 해독제의 핵심은 단 하나입니다.
욕망을 증명하려 하지 말 것.
욕망은 성과를 내지 않아도 되고, 설명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반복해서 자리를 허락받아야 합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 반복이 쌓일 때, 욕망은 다시 삶의 일부가 됩니다.
이 꼭지를 마무리하며 남기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역할을 잘 해왔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나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역할 속에 욕망을 얹는 자리 하나만 확보해도, 삶은 더 이상 공허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5장은 여기서 끝나지만, 이 질문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이제 다음 장에서는, 스스로에게만 유독 엄격해진 태도가 어떻게 삶을 조용히 시험으로 바꾸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욕망을 허락하지 않았던 삶은, 왜 나 자신에게만 가혹해졌는가.
그 다음 얼굴을 향해,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