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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 Report Jan 18. 2019

왜 나는 75세에 죽고 싶은가?

종양학자, 생명윤리학자이면서 펜실베니아대학 부총장이기도 한 에제키엘 에마뉴엘(Ezekiel J. Emanuel)이 2014년 미국의 잡지 <Atlantic> 10월호에 게재한 글의 제목은 “Why I hope to die at 75″이다. 당연히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제목이고 내용이다. 이 글을 지난 몇 달동안 곱씹으면서 의사에서부터 심리학자, 종교인, 신학교수와도 대화를 해보았다.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중요한 몇가지 주제에 대해 자기 생각을 세우는 일은 중요하다. 죽음은 내게 그런 주제 중 하나이다. 죽을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이른 나이(50)일 수도 있겠지만, 막연하게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이에 대한 생각과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우리가 삶에서 입학과 졸업, 결혼과 이혼, 자녀의 탄생과 성장 등 여러가지 사건을 맞이하듯, 죽음도 그런 종류의 하나일 뿐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내게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과 똑같다.


우선 에마뉴엘 교수의 주장을 요약해보자. ===


_ 죽음이란 상실이지만, 너무 오래 사는 것도 상실이다[우리는 막연하게 장수=좋은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이 장수하게 되었다는 명제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무병’ 장수의 기간은 줄어들고 ‘유병’ 장수의 기간은 늘어나고 있다. 한 연구(Eileen Crimmins, a researcher at the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따르면 성인들이 1/4마일(약 400미터)를 걸을 수 있는지, 10개의 계단을 오를 수 있는지, 2시간 동안 앉아있거나 서있을 수 있는지, 특별한 도움을 받지 않고 일어서고 굽히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지를 살펴본 결과 1998년에서 2006년 사이 노인층에 있어 기능적 이동성(functional mobility)의 상실은 늘어났다. 1998년 미국의 80세 이상의 경우 28퍼센트가 기능적 제약이 있었다면, 2006년에는 42퍼센트로 늘어났다. 여성의 경우는 더 심각해서 절반 이상의 여성이 기능적 제약을 경험했다. 연구자(Crimmins)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기대 수명은 늘어났고, 질병없이 살아가는 수명은 줄어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신체적, 정신적 제약은 늘어간다. 의학의 발전은 죽어가는 과정을 늘려놓았다. 미국의 경우 85세 이상 3명중 한 명은 치매로 고생한다. 그 리고 치매에 대한 치료제 개발 가능성은 높지 않다.


_ 75세면 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삶을 살만큼 살았다고 볼 수 있다. 75세 이후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에게 기여를 하기보다는 ‘짐’이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가족과 자녀에게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자녀나 주변인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활동적이고, 자상하며, 기억력과 정신이 어느정도 뚜렷했던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은가 아니면, 제대로 걷거나 서지도 못하고, 기억을 못하며, 감정 조절이 안되고, 자식에게 오랜 기간 짐이 되는 부모가 되고 싶은가? 내가 세상을 떠난 후, 주변인들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짐을 줄 것인가 역시 삶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특히 나이들어가면서 무례해지는 사람을 볼 때 슬프고,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_ 그렇다면 75세에 어쩌자는 말일까? 이 부분이 실질적으로 중요한 부분일 텐데, 에마뉴엘은 75세가 되면 병원이나 치료에 대한 전략을 완전히 바꿀 계획이라고 한다. 75세 이후에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의학적 치료를 받지 않는 것이다. 이 때부터는 건강 검진과 같은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정기적인 조치를 중단한다. 병원에서는 고통을 줄이는 일시적 처방을 받을 수 있지만, 치료를 위한 수술 등은 받지 않는다.


에마뉴엘의 글은 내가 지금까지 접한 죽음에 대한 자료 중 가장 실질적인 가이드였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도 훌륭한 책이고 좋아하지만, 에마뉴엘의 글은 죽음(=삶)을 접하는 구체적 전략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더 실질적이다. 삶을 사는 것도 개인의 선택이듯,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개인의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 물론 에마뉴엘이 밝히듯 나 역시 자살에 대해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자살 예방협회 자문을 2년 가까이 하기도 했다).


그의 글을 읽고 나서 내가 갖게 된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앞으로 25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이다. 내가 대다수 인간의 평균적인 건강을 갖고 있다고 보았을 때, 내가 비교적 활동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기여를 하고, 의미를 찾으며 지낼 수 있는 기간은 25년 남았기 때문이다. 내가 죽음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하고 자료를 찾아보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두 가지 잇점이 있다. 첫째,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읽어본 책 중에서 가장 ‘가볍고’ 예쁜 책은 <Life and I: A Story About Death> (Elisabeth Helland Larsen 지음, Marine Schneider 그림)라는 그림책이다. 죽음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부담스럽지 않게 보여준다. 둘째, 죽음에 대해 생각할수록 현재의 시간을 보다 더 즐겁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올해도 이제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내가 연말에 종종 생각하는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만약 지금 내가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무엇을 과연 아쉬워할까?” 가능하면 그런 일을 나는 미루고 싶지 않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을 우울하게 만들기 보다는 현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해보게 만들고, 행복을 미루지 않게 만들어준다. 주말 조조 영화로 본 <보헤미안 랩소디>의 주인공 프레디 머큐리는 45세에 생을 떠났지만, 나는 그가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삶의 의미를 따질 때 적어도 내겐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https://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2014/10/why-i-hope-to-die-at-75/379329/?fbclid=IwAR19_r9wu7rTSxZw4h9cWFcijQ8uJ8xk18hW8BWoG8StgI29e9jZNbsxm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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