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처 청소기 두 번째 이야기

왜 시험 전날에는 꼭 딴짓을 하고 싶을까?

by HER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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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때 첫 중간고사를 앞두고 친구가 자기 집에서 같이 공부를 하자고 했다….. 그 집에 들어선 순간 내 시선을 붙잡은 건 거실에 있는 커다란 책장이었다. 졸음을 쫓는다며 귀한 커피를 타 준 친구가 곤히 잠들어 버린 후 살금살금 책장으로 다가가 책 몇 권을 빼들었다. 그렇게 잡은 황순원의 소설을 해가 뜰 때까지 읽었다. 학교 시험이 코앞이었지만, 어떤 두려움도 이 맛있는 시간을 방해할 수 없었다.” (강의모 방송작가, “[문화마당] 읽기는 맛있는 기억이다”, 서울신문 2017. 7. 6)


이번 주 이틀에 걸쳐 쉽지 않은 상황에서 워크샵을 진행해야 했다. 워크샵 시작 하루 전 감기 때문에 병원을 가다가 얼마전 포스팅을 올린 카처 본사이자 전시장이 작업실에서 15분 거리에 있다는 생각이 났다. ‘딱 맥주 한 잔만 하자’ 할 때처럼, 방향을 바꾸어 카처 매장으로 향했다. 15분은 30분이 되었고, 나올 때 내 손에는 ‘업소용’ 청소기 WD3 모델이 쥐어져 있었다.


작업실을 만든 지 1년이 되면서 나무 다듬을 때 나오는 미세 먼지와 굵은 톱밥 청소가 고민이었다. 게으른 것도 있지만, 작업 후 가정용 진공청소기와 빗자루 들고 구석구석 먼지를 완벽하게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매장에 들어선 순간 업소용 청소기가 눈에 들어왔다. 목공 작업장의 톱밥 등을 시원하게 빨아들이는 웹사이트를 보았기 때문에 더 이끌렸다. 지갑을 꺼내게 된 결정적 순간은 내가 생각지 못했던 기능을 보았을 때 다가왔다. 업소용 최저가 모델인 WD2(13만원대)와 달리 WD3(14만원대)에는 ‘블로우’ 기능이란 것이 있었다. 이 청소기에는 일반청소기와 달리 앞뒤로 호스를 끼는 구멍이 두 개가 나 있다. 앞에 끼우면 일반적인 것처럼 먼지를 빨아들이고, 뒤에 끼우면 센 바람을 바깥으로 내어 먼지를 날려버린다. 목공소에서는 이런 기능의 장비를 구비하기도 하는데, 내 작업실처럼 작은 목공소에는 딱 좋은 기능이었다. 진공청소기가 닿기 힘든 곳에 바람을 세게 불어내어 먼지를 빼내거나, 창틀이나, 책장, 도구걸이, 가구 사이사이 먼지를 제거할 수 있다.


워크샵 준비하기에도 바쁜 와중에, 그것도 바로 전날 왜 이렇게 나는 딴짓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동료와도 이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때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이번 뿐만이 아니라, 나는 종종 바쁠 때, 잠시 딴 짓을 하곤한다.보고서나 논문, 칼럼을 쓰던 와중에 마감을 코앞에 두고 HERreport에 글을 올리기도 한다. HERreport에 마감은 없지만 말이다…


앞서 인용한 강의모 작가는 어렸을 때 책은 넉넉하게 살 수 없는 ‘결핍’이었고, 그런 상황 때문에 오히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책을 더 재미있게,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나 역시 마감을 앞두고 시간이 결핍이 되었을 때,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딴 짓’을 하고 싶은 것 아닐까 싶다. 시간이 넉넉할 때 카처 매장에 가서 청소기를 구경하는 것보다, 시간이 촉박할 때 잠시라도 짬을 내어 가보는 것이 훨씬 더 짜릿한 느낌이다. 청소기를 사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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