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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 Report Mar 05. 2019

경치와 날씨를 위한 건축물 ‘에노우라측후소’

사진작가 스기모토 히로시의 10년 준비가 녹아든 예술 공간

햇빛이 머리 꼭대기부터 내려 쬐는 탓에 정신을 차릴 수 없던 7월 중순의 일본. 도쿄에서 차를 타고 2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한 곳은 하코네 산을 뒤로 하고 사가미 만을 바라보는 가나가와현 오다와라 시의 에노우라 지역이다.

사진가이자 조각가, 설치미술은 물론이고 건축과 조경, 글쓰기와 요리까지 모두 잘한다는(21세기 르네상스맨인가..) 스기모토 히로시(杉本博司)가 설계하고 10년 정도 공사를 진행한 끝에 지난 2017년 10월 ‘에노우라측후소(江之浦測候所)를 오픈했다. 갤러리와 정원, 야외무대와 다실 등이 조화를 이룬 일종의 ‘콤플렉스’다. 굳이 미술관이라는 말 대신 ‘측후소’를 사용한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실제 가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설을 설명하는 팸플릿에는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 때 해가 떠오르는 위치가 적혀 있다. 하늘과 바다와 태양이 만들어내는 경관과 기후 자체가 가장 중요한 전시물인 것이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은 길다란 모양을 하고 있는 갤러리. 해발 100미터 지점에 자리한 갤러리는 길이 역시 100미터로 설계했단다. 한쪽 면은 돌로 되어 있고 개관 기념으로 히로시의 작품인 ‘바다풍경’ 연작이 걸려 있다. 그 건너편은 창틀 없이 37개의 유리판으로 만들어 바깥 풍경을 완벽하게 감상할 수 있다. 여름철 아침이면 바다로부터 떠오른 해가 이 갤러리 전체를 몇 분간 비추는데. 이 때가 또 장관이라고.
밖으로 나가면 일본 전통극인 노(能)의 무대에서 착안한 스톤 스테이지가 자리한다. 경사진 산기슭을 활용하는 일본의 건축양식인 ‘가케즈쿠리’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오고 카메라 렌즈에 사용하는 광학유리를 설치한 무대와 원형극장은 SF영화의 배경을 보는 기분이었다. 곳곳에 다양한 모양의 돌이 놓여있어서 ‘멋지게 꾸몄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나중 설명서를 보니 각각이 다 스토리가 있었다. 알고 나면 다시 보게 된다. 선사시대의 돌로 시작해 나라 오래된 절의 주춧돌, 무로마치 시대 교토 돌다리에 쓰였던 돌, 가마쿠라 시대의 탑 등 스기모토 씨가 오랫동안 수집해온 일본 각지의 돌과 석물, 탑을 배치해 놓았던 것.

그 뒤로 그림처럼 펼쳐진 넓은 바다를 감상하는데 스기모토 씨가 홀연히 모습을 나타냈다. 40년 넘는 예술 활동, 그는 오다와라 문화재단을 만들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는데 자신의 생각을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 ‘신소재연구소’라는 설계와 디자인 회사를 만들기도 했다. “점점 사라져가는 일본의 전통적인 건축 스타일과 기술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기 위해 이곳을 만들었습니다. 자연과 예술, 사람이 고요한 가운데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이 무얼까 고민했지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고 몇 군데 더 진행중이니 내년이 지나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야외 정원의 스톤 스테이지와 유리 무대에서 다양한 공연을 펼칠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은 원래 귤밭이었다는데, 아직도 산등성이를 따라 귤나무가 몇 그루 남아있다. 산책길을 따라가면 작은 다실인 ‘우초텐(雨聴天)’이 나온다. 비소리를 듣는 곳이라는 멋진 이름인데 차의 성인으로 불리는 센노리큐의 다실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리셉션 공간에는 1천 년 넘은 삼나무로 만든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다. 사소한 곳에도 신경을 많이 써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거의 없다. 라커룸에서는 통유리창으로 잘 가꾼 정원을 볼 수 있고 ‘출입 금지’ 팻말 대신 동글동글한 돌에 삼끈을 둘러 놓은 토메이시(止め石)를 놓았다. 신경은 당연히 엄청나게 많이 썼고 그와 함께 돈도 엄청나게 많이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후대를 위해 이렇게 멋진 경험의 대상을 만드는 세련된 야심과 근성을 확인하니 마음 한 구석이 조금 아프기도 하고.


해가 뜰 무렵, 해가 진 저녁, 비가 올 때 등 계절과 시간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픙광을 지켜보고 싶은데 맘대로 되지 않는다. 오전 10시와 오후 1시 하루 두 번만 개방하고 사전 예약은 필수. 가는 길이 쉽지 않아 대중교통보다는 렌터카를 이용해야 한다. 그 노력과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느냐 물으신다면 나는 기꺼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코네나 아타미 여행과 연계해 일정과 코스를 짠다면 좋을 듯!
http://www.odawara-af.com/ja/eno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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