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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 Report Jan 18. 2019

SF MOMA에서 만난 디저트 화가, 웨인 티보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SF MOMA). 몇 년전 방문했을 때에는 리노베이션 작업으로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도착한 첫날 숙소에서 한 시간 정도 걸어 도착했다. 1층부터 7층까지 걸어올라가며 만난 작품중에 눈에 띈 것은 웨인 티보의 그림으로 아이스크림과 파이 등이 놓여있는 디저트 접시, 베이커리의 진열장 등을 그린 것이었다. 그의 ‘푸드 시리즈’ 작품 가격은 90억원에도 판매가 된다고. 웨인 티보(Wayne Thiebaud, b. 1920)는 올해 98세이지만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중이다. 그가 처음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을 방문한 것은 1942년, 22살 때였다. 그 뒤로 이 미술관과 특별한 인연을 이어가는데, 올해는 그가 직접 고른 작품들을 전시중이다. 출장에서 돌아와 티보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고, 그가 강연한 유투브 동영상들을 보게 되었다. 그의 삶의 흔적을 보면서 느낀 몇 가지.


1.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생각나는 영화중에 <세렌디피티(Serendipity)>가 있다. 주인공 조나단 트래거(배우 John Cusack)와 사라 토마스(배우 Kate Beckinsale)의 말도 안되는 ‘뜻 밖의 발견(세렌디피티)’이 연속되면서 결국은 사랑에 빠지는 영화. ‘커리어’라는 측면에서 티보의 삶을 보며 이 영화가 생각났다. 1942년 공군 파일럿이 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온 티보는 파일럿 트레이닝을 기다리던 중에 비행기 정비공이 된다. 그의 아버지는 자동차 정비사였다. 공군에서 생활하면서 우연히 만화와 포스터를 그리는 직종이 있다는 것을 알고 흥미를 느껴 그 부서에 찾아가게 되었고, 이 부서에서는 미키 마우스 그리는 작업을 맡겼다가 마음에 들자 바로 채용을 하게 된다. 공군 정비사에서 군대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만화가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그 뒤 상업 미술 분야에 몸 담게 되었는데 대학에서는 그의 경력을 인정하여, 정식 미술 교육 없이 학사 학위를 주었다.


커리어 개발, 즉 직업을 선택하는 데에서 우연한 발견인 세렌디피티의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잠시 자신이 어떻게 현재의 직업분야 혹은 직장에 들어왔는지 생각해보면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아내가 처음 입사한 곳은 대기업 광고회사였다. 하지만 ‘한 성격’ 하는 아내는 입사 후 연수 과정에서 회사와 한 판 하고 그만두었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 가득하던 멋진 잡지를 직접 만들고 싶어 다시 시험을 보고 들어간 잡지사에서 25년째 일하고 있다. 내가 PR분야에서 일하게 된 것은 소개팅이 시작점이었다. 미국에서 기자로 일하던 한국 여성과 소개팅을 했는데, 그 때 대화에서 ‘Public Relations’라는 말(나는 그 때에야 PR이 무엇의 약자인지 처음 알았다)을 들었고, 관심이 생겨 책을 읽다가 결국 공부도 하고,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 PR회사에서 만난 멘토와 싱가폴 출장에서 비행기 기다리며 맥주를 마시다가 코칭이라는 분야를 접하게 되었고, 결국 커리어를 살짝 틀게 된다. 사랑이나 커리어나 ‘세렌디피티’는 얼마나 묘하게 우리 삶을 들었다 놨다 하는지.

2. 티보의 영웅은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인데, 젊었던 시절 쿠닝은 티보에게 “다른 사람의 것을 베끼지 말고 너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그 때 티보는 고등학교 때까지 일했던 레스토랑의 디저트를 떠올린다(이 또한 세렌디피티 아닌가!). 미국의 CBS Sunday Morning이 티보를 인터뷰했을 때, 취재 기자는 이렇게 멋지게 이야기한다. “식사는 디저트로 절대 시작하는 게 아니지만, 예술 커리어는 디저트로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고. 이 부분에서는 티비 프로그램인 <K팝스타>가 생각났다. 정승환이 ‘사랑에 빠지고 싶다’를 애절하게 불렀을 때, 심사위원이었던 박진영은 ‘이 뻔한 전형적인 발라드를 부르는데, 누구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노래부르는 것에 최고의 칭찬을 했다. 아티스트만 자신만의 스타일이 중요할까? 일하는 방식, 관심있는 주제, 좋아하는 여행과 음식, 사람을 이끄는 리더십 등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야 한다. 나는 여러 가지 리더십 모델 중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바람직한 리더십의 모습을 자기가 모델링하는 진정성 리더십(authentic leadership)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3. 자신만의 스타일을 시험하던 그는 1961년 그림을 들고 뉴욕에 오게 된다. 매디슨 애비뉴를 따라 걸으며 아트 갤러리들을 방문하지만 모두 그의 디저트 그림을 거절한다. 한 화랑에서는 “내가 한 마디 해주지. 당신은 피카소가 아니야!”라고 말했단다. 지쳐서 갤러리 앞에서 기대어 쉬고 있을 때, 그곳의 아트 딜러인 앨런 스톤이 말을 걸었다. 티보는 아무 일도 아니고, 잠시 기대어 쉬었다 갈거라고 말했고 스톤은 그의 팔 밑에 있는 것이 뭐냐고 한 번 보자고 했다. 별것 아니라면서 꺼낸 티보의 그림을 보던 스톤은 처음에는 ‘이런 그림을 그리다니,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인가 매력을 찾아내게 된다. 1962년 앨런 스톤 갤러리에서 티보의 전시가 열렸는데, 놀랍게도 모든 작품이 팔렸고 뉴욕 현대미술관(MOMA)도 티보의 작품을 구매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여기에도 세렌디피티가 작동했다! 티보는 팝아트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그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묘하게 팝아트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Campbell’s Soup Cans)가 화제가 되고 로이 리히텐스타인(Roy Lichtenstein)이 만화를 예술의 소재로 쓴 것이 그 무렵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성공은 수많은 거절 끝에 발생한다는 것,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점, 성공에 운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시할 수 없다는 점등을 생각하게 된다.


4. 티보의 아내는 세상을 먼저 떠났고, 혼자 사는 그는 지금도 해 뜨기 전 2층 스튜디오로 올라가 매일 그림을 그린다. 점심에는 테니스를 치고 2시에는 시내에 있는 또 다른 스튜디오에 나간다. 좀처럼 이 루틴을 깨지 않고 유지한다. 지난달(11월) 회사에서 연말 세미나를 하면서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를 초대하여 창의성과 뇌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천재적인 예술가, 과학자, 소설가 등 창의적인 사람들의 일과표 수십 가지를 보여준 뒤 두 가지 결론을 이야기했다. 첫째, 창의적인 사람들의 일과에는 그 어떤 공통점도 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아침형이고, 어떤 사람은 저녁형이었지 어떤 것이 좋다는 것은 없었다. 둘째, 창의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 가장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 알고 있었으며, 그 시간 만큼은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는 루틴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아침형 인간인지 저녁형 인간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루 중 어느 때 가장 일이 잘 되는지 알고 있고, 그 시간에 일을 하도록 자신만의 루틴이 있었다는 점이다.


2018년 9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파는 아트 갤러리의 ‘직원’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작품이 아닌 제품을 만들게 되면 예술가에게는 덫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그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길게, 그리고 확장해서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 자기만의 연구활동이었다. 실제 물병 하나라도 그리다보면 이 말이 실감이 간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평소에 지나치던 세밀한 부분과 질감을 새삼 깊이 살피게 되기 때문이다.


언제 은퇴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왜(why)?”라고 반문한다. 그에 따르면 은퇴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함인데 그림 그리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은퇴란 없는 것이다. 98세에도 그림을 그리는 그를 부러워하면서 그럼 내 스타일은 뭐지 하는 질문을 연말을 맞아 다시 던져보게 되었다.

참고:
. “Wayne Thiebaud, approaching 98, takes stock of the big picture” (by Sam Whiting, San Francisco Chronicle, 2018. 9. 26)
. “Wayne Thiebaud, Famed for the Art of Sweets, Has Portrayed Far More” (by By Brenda Cronin, 2018. 4. 26)
. Wayne Thiebaud (interview with CSB Sunday Morning)https://www.youtube.com/watch?v=vI_QJ5D9Q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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