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인연과
생을 약속하는 것,
30대에 들어서면서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면 마치 인사말처럼 똑같은 질문을 듣곤 한다.
"결혼 안 해요?"
그리고 언제나 똑같은 나의 대답,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인연과 하겠죠."
아무래도 여자는 출산 적령기가 정해져 있다 보니,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비혼 주의자도 전혀 아니고, 내 꿈은 토끼 같은 자식 낳아 든든한 남편과 알콩달콩 사는 것이니까) 게다가 절친들도 하나 둘 가정을 꾸리기 시작했고, 시간은 갈수록 빠르게 흐르고 있다. (벌써 2019년이라니!)
나는 연애를 할 때마다 뜨겁게 사랑을 했고, 늘 결혼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마냥 좋을 것만 같던 사랑도 어김없이 끝은 있었고, 시간과 변화를 이겨낼 수 없었던 거듭된 관계 속에서 '과연 누굴 만나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랑이 가능이나 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결혼이라는 제도도 사실 인간이 후천적으로 만든 것인데, 왜 우리는 의무감을 만들고 사회는 그것을 당연한 듯 요구하는 것일까. 어찌 보면 특정된 누군가에게 평생을 종속된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도 위배되는 것인데 말이다.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쭉 연애만 하는 것이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집안이나 경제상황 등에 묶이지 않아도 되고, 굳이 365일 붙어있을 필요도 없다. 우스갯소리로 '결혼이란 연인과 싸운 후에도 그가 집에 가질 않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그만큼 '나'와 '우리'를 적절히 분배하여 거리와 발란스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관계를 더 오래 지키는 것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굳이 법적인 구속력을 얻고 모두에게 공표를 하며 결혼이란 관계로 서로를 정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들었던 가장 설득되던 문장은 "배우자를 찾는 것은 제2의 부모를 찾는 것이다." 라는 말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부모에서 독립하게 되고, 세월을 따라 정신적/경제적으로도 어쩔 수 없이 성숙하게 되지만,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어린 아이 같은 면이 남아있다. 내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변함없이 곁에 있어줄 누군가,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 곁에서 나를 지지해주고 보호해줄 누군가, 정돈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라도 껴안아줄 수 있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생은 생각보다 길다. 평균 서른 즈음에 결혼을 해서 약 팔순 정도까지 삶이 유지가 된다고 하면, 우리는 약 50년이라는 세월을 한 사람과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연애로 치면 5년도 길고 긴 시간인데, 그 시간의 10배라니. 게다가 점점 나이도 들어갈 것이고 한 때는 병이 들 수도, 한 때는 경제적으로 너무 힘이 들 수도, 한 때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나를 덮치는 시간들도 있을 텐데, 그 모든 시간을 함께 걸어가 줄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고 생을 약속하는 것이,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제 때(?)' 결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삶을 송두리 째 함께할 누군가를 '제대로'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인연과 생을 약속하는 것."
사회의 통념에 물들어 조급해지거나, 친구들이 하나 둘 시집가면서 삶이 외롭다 느껴질 때엔 나를 위해 이 글을 계속 읽어야겠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운명의 누군가를 만났을 때 한눈에 알아보는 지혜를 키워야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