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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zog Mar 17. 2018

지금 만나러 갑니다, 시대착오적 멜로

  그때 그 시절을 소환하는 대중문화의 복고 열풍은 현실의 빈곤함과 관련이 깊다. 현시점에서 향유할만한 대상이 부재할 때, 풍요로웠던 시대를 그리워하며 뒤를 한번 돌아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과거로의 회귀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예전 유행이 도태되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예컨대 90년대 가요의 정서는 현재 관점에서 몹시 낯설다. 조성모 데뷔 앨범의 노래 가사를 지금 읽고 있으면 손발이 오그라든다. 늘 한결같은 감성을 유지하는 김동률의 새 앨범은 이제 듣기 조금 거북하다. 삶의 양식과 사고는 늘 변화하기에, 현대인의 감수성은 전과 다른 패러다임의 문화를 요청한다. 멜로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운명적인 사랑을 다룬 순정 멜로이다. 동명의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첫 15분 동안 손예진의 등장만을 기다리게 한다. 하지만 손예진이 등장한 뒤로 영화는 보다 재앙에 가깝게 된다. 감독은 관객의 눈물을 뽑아내기 위한 통속 멜로의 모든 문법을 차용한다. 심장 질환을 앓고 있으며 아내를 잃은 뒤 아들과 함께 쓸쓸히 살아가는 우진(소지섭), 장마철에 잠시 남편과 아들을 만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지만 장마가 걷히면 다시 구름나라로 떠나야 하는 수아(손예진), 엄마밖에 모르는 아들 지호(김지환)는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트라이앵글이다. 여기에 빼빼로 CF와 다를 바 없는  플래쉬백, 어떻게 저런 타이밍에 삽입될 수 있을까 싶은 슬로 모션, 눈을 질끈 감게 되는 마지막 작별 신에서의 교차 편집이 더해진다. 모든 상황과 설정은 어디서 보고 또 봤던 상투의 연속이다. 그래서 영화에는 특별히 논할 게 없다.


  모든 문제는 시나리오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감독의 순정 로맨스를 향한 맹목적 갈망은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때 묻지 않은 사랑으로 내러티브의 골격을 세우고자 하는 의도는 정도를 지나쳤다. 로맨티시즘의 과잉은 어엿한 성인에 사춘기 소년 소녀의 특징을 구태여 삽입하려 하는 데서 나타난다. 인간에게 순수함과 멍청함은 사실 한 끗 차이다. 각본은 이 경계를 구분 짓지 못하고 혼동한다. 순수함은 낭만을 산출할 여지가 있지만, 멍청함은 보는 이의 짜증을 수반한다. 두 주인공은 한때 유행했던 멜로 영화 속 순수함을 간직한 이들이라기보다는,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소심증 환자와 유사하다. 20살이 되어서도 대학교 친구는 하나 없고(심지어 수영 체육 특기생이다.)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정확히 말하면 첫 짝사랑이다.)만 머릿속에 그리는 우진의 처지를 보며 우리는 혀를 찰 수밖에 없다. 보다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것은 서울로 대학에 진학한 수아를 볼 때이다. 한창인 대학생 수아는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리기보다 방구석에 앉아 고등학교 때 말 한두 번 섞어본 우진의 전화만을 온종일 기다린다. 아마 많은 관객들은 저게 말이 되나 싶었을 것이다. 편의적 설정에 따른 캐릭터는 관객을 내러티브 속으로 흡수하지 못한다.


  캐릭터 구성과 더불어 앞뒤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이야기 구조는 배우의 연기를 굳게 한다. 소지섭과 손예진의 연기는 근래 그들의 작업 중에서 가장 뻣뻣하다. 두 주연 배우의 연기는 배우가 캐릭터 구축에 실패한 사례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온몸으로 영화 속 전개를 체화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배우는 이야기의 맥락과 인물의 행위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있다. 주의 집중의 산만함은 거의 매 신에서 확연하다. 특히 장마철에 수아가 하늘에서 컴백한 직후, 터널에서 가족의 첫 만남과 첫 실내 신에서 주고받는 대화는 확신 없이 책을 그대로 읽는 듯하다. 연출의 디렉션은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 애당초 몰입을 불가능하게 하는 여건 하에서는 어느 배우도 캐릭터 내면으로 빠져들 수 없었을 것이다. 말론 브란도, 캐서린 햅번이 주연을 맡았더라도 이 총체적 난국 앞에서는 자포자기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2000년대 순정 멜로를 표방하지만 실은 시대착오적인 복고 영화이다. 순정 멜로가 2000년대 초반 유행한 뒤 오늘날 사라진 것은, 알콩달콩한 사랑이야기가 우리에게 낯설어졌기 때문이다. 60-70년대 영화 속 신성일-엄앵란의 연애 방식은 그 유효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아메리칸 스타일에 이미 익숙해진 세대에게 순정은 조금 먼 나라 얘기이다. 시대에 따라 사랑을 바라보는 방식도 변해간다. 클리셰에만 의존하는 신비한 산골 속 순수 로맨스는 아마 50년 전이었다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연출은 초현실적 설정을 시적인 풋풋함으로 미화시키지 못하며, 우진과 수아의 주요 감정선을 굵직하게 묘사하지 못한다. 흐름의 어색함을 소지섭의 동묘앞 패션과 같은 유머로 상쇄시키려 하지만, 영화 속 모든 유머는 웃을 가치가 없는 낡은 것이다. 촬영 감독은 <건축학 개론>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카메라를 인물에 밀착시키지만, 그때만큼의 효과는 없다. 40대에 들어선 소지섭과 30대 후반의 손예진은 더 이상 그 존재만으로 시선을 사로잡지 않는다. 이 기획 영화에 참여한 투자자들의 셈법은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손예진과 소지섭, 흥행을 보장하는 두 배우의 출연에, 진한 감성으로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김치 신파 재료들이 단계적으로 버무려졌고, 요즘 흔히 보기 쉽지 않은 순정 멜로 장르이니, 틈새시장을 노려 300만 관객 각을 잡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 셈법이 이번에 한 번쯤 틀렸으면 한다. 단 한차례도 로맨스를 발견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 영화를 두 번 다시 만나러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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