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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zog Jul 08. 2018

변산, 노오력이 부족한..

이창동의 <버닝>에 불평했던 많은 사람들은, 주인공 종수가 대변하는 청춘이 우리 모습과 너무도 다르다고, 그래서 영화에 공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왜 이런 비판이 제기되는 걸까? 그것은 중년 감독들의 청춘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헬조선에서 고생하는 청춘에 주목하지만, 영화 속에서 묘사된 청춘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지구와 안드로메다 사이의 거리만큼 아득하다.

 

‘죽을병’을 활용해 죽어가는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는 패턴은 우릴 만큼 우린 사골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암’ 또는 알츠하이머 류의 불치병을 앓는 사람이 있다. 맞은편에는 그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친구, 혹은 가족, 또는 연인이 있다. 우연한 계기로 그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대방은 동정과 연민을 품으며 과거의 원한을 누그러뜨린다. 머지않아 저세상으로 떠날 사람과 용서하는 사람은 마침내 화해의 포옹을 한다. 둘을 지켜보는 관객은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이준익의 <변산>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유구한 전통을 계승한다. 과거 한 주먹 했던 건달 아버지와 아들 학수의 관계는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있다. 가정을 뒷전에 버려둔 채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바람난 아버지는 노름으로 집 논밭을 모두 허공에 날린 망나니다. 학수는 죄를 짓고 경찰에 쫓기던 탓에 아내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연을 끊고 서울에 홀로 자취한다. 편의점, 발레 파킹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그는 ‘심뻑’이라는 예명으로 ‘쇼미더머니’에 매 시즌 출석하며 래퍼의 꿈을 향해 직진한다. 어느 날 학수는 평생의 원수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화로 전해 듣는다. 학수는 측은지심에 마지못해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를 병문안한다. 그 뒤의 이야기는 예상대로다.


<변산>은 이준익의 청춘 예찬이다. 현실 속 청년 문제에 깨어있는 중년 감독들의 청춘 묘사는 어딘가 궤도를 벗어나 있다. 외부의 생활환경은 급속도로 변화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젊지 않다. 중년들은 지금-여기 청춘 세대의 느낌과 사고와 행동을 막연하게 관념적으로 이해한다. 청춘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기억 속 청춘을 캐릭터에 투영한다. 과거 청춘시절 자신의 느낌을 모든 세대가 공감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변산> 속 청춘에서는 구린내가 난다. <버닝>에서 세 남녀가 60년대 김승옥 소설의 방황하는 주인공과 같았다면, <변산>에서 촌내 나는 젊은이들은 현재 멸종위기에 처한 70-80 문학 소년/소녀와 같다. 김고은이 연기한 선미가 그렇다. 젊은 시절 학수에게 영감 받아 ‘노을 마니아’라는 책을 펴낸 소설가 선미는 노을에 키스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입술을 내민다. 15년 가까이 학수만 바라보는 일편단심에, 듣기만 해도 닭살 돋는 대사를 남발하는 선미는 우리 중 누구도 대변하지 못한다. “우리 노을 보러 갈래?” 선미는 학수에게 제안한다. 만약 이 대사가 다음과 같았다면 어땠을까? “오늘 밤 라면 한사바리 할래?”

영화를 볼 때 가장 큰 즐거움은 배우의 연기를 보는 데 있다. <변산>은 재능 있는 젊은 배우들을 섭외했다. 하지만 감독 이준익의 나태한 연구로부터 캐릭터는 틀에 갇힌다. 틀에 갇힌 캐릭터를 연기하는 김고은과 박정민은 빛을 보지 못한다. 아버지 역의 장항선과 학수 역의 박정민의 호흡은 통속극에서 볼 수 있는 세대갈등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않는다. 박정민의 가벼운 표현은, 코믹 연기의 리액션에서 부분적으로 효과를 발휘한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풉-하고 비웃을 때, 그의 비웃는 제스처는 꽤 귀엽다.  


마을 동사무소 9급 공무원 선미 역을 위해 몸무게를 8kg 증량했다는, 김고은의 옛스러움과 촌스러움은 낯설지 않다.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에 즉각 투입되어도 쉽게 융화될 것 같은 김고은은 캐릭터의 핵심을 캐치하고 어떻게 외적으로 내보여야 하는지 계산할 줄 아는 영리한 배우지만, 김고은의 재능은 더 도전적이고 더 모험적인 작품을 위해 사용되어야 했다.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3류 건달 역을 주로 소화하는 용대 역의 고준은 매너리즘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변산>은 장점을 찾기 힘든 영화지만 가끔 60대에 접어든 감독의 감각인가 싶을 정도로, 몇몇 장면의 연출은 당돌하다. 영화는 저질 개그를 밑도 끝도 없이 던진다. 주로 끝말잇기 류의 저속한 말장난은 현기증이 날 정도지만, 그중에서 하나 둘 정도는 얻어걸린다. 학수의 급식 시절 꼬봉이었지만, 이제는 그럴듯한 건달이 된 용대는 고향에 돌아온 학수가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붙잡아 놓고, 학교 동창 미경과 셋이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 한다. 미경 앞에서 용대는 가오 잡지만, 미경은 용대를 애취급한다. 둘이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학수는 갈굼 당하는 용대를 비웃는다. 빅웃음을 선사하는 세 배우의 티키타카와 굿 타이밍 편집은 침몰하는 영화를 잠시 구제한다.


이준익은 세대 갈등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문제의식 자체는 현대적이지만, 영화는 문제의 본질로 파고들지 못한 채 문제의 외벽만 어루만지며 제자리걸음 한다. 관객은 왜 아버지를 극혐하는 학수가 변산에 계속 머물러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시나리오도, 이준익도 답을 찾지 못했다. 심리적 당위가 아닌 무리수에 다름없는 설정만이 학수를 고향에 붙잡아놓는다. 또한 학수가 아버지를 용서하는 이유 역시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시나리오는 작동하지 않는 이야기의 만병통치약인 ‘죽을병’을 끌어온다. 만약 아버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학수는 이 망나니를 용서했을까? ‘죽을병’을 사용하는 것이 대수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죽을병’은 인간의 상호 이해로부터 근본적인 화해로 이르게 되는 드라마의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변산>의 가장 큰 문제는 세대 간 갈등에 대한 진단을 죽어가는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퉁쳐 매듭짓는 데 있다.  


이준익은 이번 영화에서 청춘에 다가가기 위해 고심했다. 이는 영화의 형식에서 엿보인다. <변산>에서 이준익은 청춘의 왕성한 혈기를 담기 위한 형식으로 시트콤을 끌어오면서, 젊어 보이기 위해 학수의 랩을 백그라운드 뮤직으로 스크린에 바른다. 색다른 시도와 달리, 박정민의 랩은 미적 쾌감과 의미론적 활력을 파생하지 못하는 소음과 같다. 이준익의 청춘이란 무엇인가. 갯벌에서 고향 친구와 한바탕 뒹굴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창들과 중국집 배달음식에 소주 한잔 곁들이며 함께 합창하는 것, 이것이 이준익이 생각하는 청춘이다. 이 합창은 이광수 소설 <무정>의 마지막과 오버랩된다. 오늘날 청춘이 <무정>을 읽을 때처럼, 그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도 낡았다고 생각한다. 요즘 표현으로 말하자면, '구데기' 같다고 생각한다. 노력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지만 여전히 이준익을 비롯한 꼰대 세대 감독의 영화 속 청춘의 리얼리티는 미진하다. 이 리얼리티는 현실 속 청춘을 한숨짓게 한다. 청춘을 묘사하는 대한민국 감독들은 청춘을 이해하기 위해 열정을 갖고 보다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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