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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zog Sep 19. 2018

명당, 조승우의 매너리즘

영화관 의자에 앉아서 한국 영화를 2시간 동안 보느니 티켓 값을 좋은 곳에 기부하고 소중한 시간을 절약하는 게 이득이다. 어디선가 들은 얘기다. 매년 밑바닥을 갱신하는 한국 영화의 수준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어떤 영화는 마음을 벅차오르게 한다. 어떤 영화는 비루한 현실에 주눅 든 신경을 한 올씩 일으켜 세우고, 생활에 시달린 정신에 힘찬 기운을 불어넣는다. 그 기운은 잊어버린 삶의 가능성을 다시금 믿게 한다. 물론 대기업의 상업주의 논리가 잠식해 획일화된 한국 영화에는 단 1도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다. 한국 영화가 밥줄인 기자와 평론가들은 애써 외면하지만, 예민한 감수성과 식견으로 영화의 참된 맛을 알고 있는 이는 더 이상 한국 영화를 찾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의 조선 버전인 “명당”은 한국 영화의 참담한 현실을 가늠하게 한다. 절대 땅을 차지하는 자는 절대 권력을 얻는다. 인간의 의지보다 범상치 않은 기운의 명당을 선점하는 것이 자신과 가문과 역사의 운명을 결정한다. 명당에는 당연히 권력욕으로 가득한 인간들이 파리 떼처럼 꼬인다. 조선말 풍수지리의 천재 벼슬아치 박재상(조승우)은 백성과 나라와 주상전하에 충성한다. 박재상은 헌종(이원근)의 암살당한 아버지의 묘자리 선정 과정에서 장동 김씨 가문 김좌근(백윤식)의 거짓 조언에 반박한다. 박재상의 충언에 일을 그르칠 뻔한 김씨 일가는 박재상의 아들과 아내를 살해하고 그의 집을 불태운다. 가까스로 죽을 고비를 넘긴 박재상은 김씨 가문에 복수를 꿈꾼다. 13년 후, 남모를 야욕을 품고 있는 흥선군(지성)은 풍수지리학으로 입지선정 컨설팅을 업으로 하는 박재상을 찾아 도움을 청한다. 흥선군은 김씨가의 세도 정치를 짓누를 수 있는 땅을 찾고 있다. “명당”은 박재상의 복수극인 것처럼 시작했다가, 갑자기 “2대 연속으로 천자를 품을 수 있는” 명당을 선점하기 위한 흥선군과 장동 김씨 가문의 사투로 변한다.


맡은 배역을 탐구하는 배우의 전투적인 자세는 배역을 살아있게 한다. 80년대 전성기적 미키 루크처럼, 조승우는 작은 순간도 타성에 기대지 않으면서 배역에 신뢰감을 불어넣었다. 선하지만 강단 있는 눈매는 그를 늘 작품의 구심점에 자리시켰다. 배역을 파고드는 그의 치열함은 관객이 캐릭터의 가공성을 의심하지 않게 했다. 특히 “타짜”의 고니처럼 파고들 구석이 많은 배역을 맡았을 때, 그의 면밀함은 시너지를 발휘했다. 리드미컬한 대사를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조승우의 고니에는 능구렁이의 유머 감각과 복수심과 같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이 혼재했다. 캐릭터에서는 생기가 피어올라 조승우가 품은 감정은 곧 관객의 것이 되었다. 


흔히 연기에서 ‘힘을 뺀다’는 말은 연극 무대에서만 활동했던 배우가 영화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 사용된다. 연극과 달리 영화에서 관객과 배우의 거리는 고정되지 않고 카메라의 위치에 따라 변한다. 카메라 앞에서 배우는 감정의 셈여림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무대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연기하면 감정은 과잉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명당”에서 조승우 연기는 언뜻 보면 힘을 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자연스러움을 의도하기 위한 힘 뺌은 아니다. 감정이 분출되어야 할 시점에 그는 자신을 일체 억누르고 있다. 오히려 이는 캐릭터에 대한 배우의 불확신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조승우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애당초 박재상이라는 인물과 뜨겁게, 온몸으로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프닝 크레딧이 오르기 전, 영화 내내 흐르게 될 박재상의 행동 동기가 등장한다. 죽은 아내와 아들의 원수를 갚는 것이다. 그리나 흥선군이 등장한 이후 어느 순간부터 박재상의 동기는 나라와 백성에 충성하는 벼슬아치의 막연한 정의감 뒤로 숨는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극적으로 흥미진진할 수 있었던 순간은, 박재상이 자기 정체를 모르는 김좌근과 13년 만에 재회할 때이다. 그러나 적을 코 앞에 둔 조승우의 눈빛 연기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없다. 그의 흐리멍텅한 눈동자에는 배역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배우의 직업정신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진 배우의 나태함이 가득 차 있다. 조승우와 백윤식의 대면 신에서 상황 설정은 흡사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연상시키지만 이 장면에는 드라마가 없다. 영화 내내 조승우는 노련한 테크닉으로 그 순간에 필요한 뉘앙스를 표현하지만, 박재상의 분노를 제쳐놓는다. 어쩌면 시나리오를 보고 그는 제대로 연기하기가 싫었을 수도 있다.


영화감독은 나무를 자세히 살피는 관찰력뿐 아니라 전체적인 숲을 조망할 수 있는 직감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둘 모두를 갖춘 감독은 세계적으로 극소수이다. 물론 한국 영화계에는 둘 모두를 갖추지 못한 영화감독이 대다수이다. “명당”은 너무 많은 이야기로 과포화 상태가 되었다. 연출은 개별 이야기 서술에 치중한 나머지 막상 주인공 박재상의 심리적 묘사에는 소홀해 조승우가 춤출 수 있는 무대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칼춤이 아니라, 흥선군과 모의 후에 박재상이 김좌근 가의 묘도를 훔치는 시퀀스이다. 박재상과 파트너 용식(유재명)은 김좌근 저택의 묘도가 있는 방의 자물쇠를 열고 잠입한다. 숨을 죽인 채 지도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살피던 중 김좌근과 손님 정지관이 옆방으로 온다. 김좌근의 아들은 심부름을 받고 박재상이 숨은 방의 문을 열려고 한다. 정체가 발각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연출은 교차 편집을 통해 알프레드 히치콕 방식의 서스펜스를 시도하지만, 편집 리듬은 쫄깃하지 못해 그저 하품만 유발한다.


“명당”은 배경보다는 인물에 중점을 두고 카메라를 배우의 얼굴에 밀착시키는데, 이는 때로 배우의 존재감보다는 배우의 아쉬운 연기를 부각한다. 임금 역의 이원근의 연기에는 상황에 따른 발성과 표정의 변화가 없다. 골든 라즈베리 영화상의 남우조연상에 떠오르는 샛별로 주목할만하며, 그에게는 남자 김태희라는 칭호가 잘 어울려 보인다. 흥선군 역의 지성은 미스 캐스팅이다. 광대로서의 면모와 왕권에 흑심을 품고 있는 야누스로서 흥선군을 담기에 그의 외모는 지나치게 매끄럽고 자상하다. 영화의 촬영 스타일은 기생집 대방 초선 역의 문채원에게만 유효하다. 문채원의 초선은 근래 드라마와 영화에서 눈여겨본 기생 역 중 기품이 단연 으뜸이다. 상상 속 조선말 당대 최고의 명기(名妓)가 환생한 것 같은 미모이다. 용식이 넋을 놓고 초선에게 “달이 좋소”라고 할 때, 이 말은 초선을 바라보는 관객의 심정을 정확하게 대변한다. 문채원은 흥선군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슬쩍 올리는 입꼬리나 의도적인 한 번의 눈 깜박임에도 시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명당”은 추석 명절을 겨냥한 기획 영화가 늘 그러했던 것처럼 총체적 난국에 가깝다. 주인공의 복수 플롯은 에필로그로 허겁지겁 마무리된다. 영화 속 용식의 유머는 이주일의 개그를 지금 보는 것 같다. 전투 신은 칼로 물을 베는 것 같다. 무딘 영화의 문제는 배우마저도 무디게 한다. 감독과 배우들은 촬영 도중 연기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았던 것 같다. 배우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감독이 보다 노력했더라면, 영화에서 긍정적인 이야깃거리는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점점 삭막해지는 한국 영화계에서 배우들의 불꽃이 시들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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