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rzog Nov 25. 2018

영주, 김호정이 아니었다면

배우 김호정의 눈빛과 제스처는 화살이 표적의 정중앙을 향해 꽂히는 것처럼 목표를 명중시킨다. 짤막한 순간도 롱테이크처럼 느끼게 하는 배우의 연기는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화장”에서 병으로 인간의 모든 자존심이 무너져내리는 가운데 남편을 향해 서운함을 가득 담은 아내의 눈빛, 김호정의 절박한 눈빛은 회사의 젊은 여직원에 눈독 들이는 남편 오정식의 아내에 대한 죄책감의 농도를 진하게 했다. “나비”에서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싶은 안나를 맡았을 때, 끓는 속을 냉정하게 식히는 절제는 잘 단련된 면도날처럼 끝이 예리했다. 김호정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배우의 지성은 신에서 요구하는 정서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영주”에서 죄의 무게에 눌려 방황하는 남편(유재명)과 함께하는 김호정의 향숙은 독실한 기독교인처럼 어딘가 선해 자연스럽게 신뢰하게 된다. 번뇌하고 번뇌한 사람이 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확신과 같은 향숙의 강인함과 마음 속 진실은 어떤 종류의 시련도 그를 흔들지 못할 것 같다. 

영화에 접근하는 감독의 진지하고 착한 의도는 결과물과 무관하다. “영주”는 언뜻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독립 영화 같지만 착한 의도 하나만 남은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주”에서 감지되는 연출의 세상 인식은 천진난만하다. 물론 때 묻지 않은 개인의 천진난만함은 고결한 것이지만 영화 속 세상이 우리의 현실에 다가가고자 할 때, 이 천진난만함은 작품에 몰입하는 데 방해된다. 


5년 전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은 주인공 영주(김향기)는 졸음운전으로 부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수를 찾아간다. 하필 뇌사 상태의 아들을 슬하에 둔 원수 상문과 향숙 부부는 시장에서 두부 가게를 운영한다. 영주는 자기 정체를 숨기고 상문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한다. 복수도 하고 절도 범죄를 저지른 동생의 합의금도 마련할 겸 새벽 무렵 가게 금고의 돈을 훔친다. 하필 그때 상문이 가게에서 쓰러지는 우연이 겹쳐 영주의 도둑질 의도가 발각된다. 천사 같은 마음씨를 지닌 향숙은 영주를 용서하고 온갖 호의를 베푼다. 딱 하루 함께 일했던 알바에게 거금을 선뜻 건네고 일을 가르치며 영주를 막내딸처럼 아낀다. 집에 초대해 함께 삼겹살도 구워 먹고 핑크빛 베이스볼 자켓까지 선물해준다. 심지어 남모를 고통까지 함께 나눈다. 영주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향숙은 아마 김호정의 선택을 받지 않았더라면 일개 호구 아줌마에 불과했을 것이다.


흔히 남성 감독의 영화에서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하여 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여성에 대한 묘사는 비판받는다. 따져보면 반대의 경우도 만만치 않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여성 영화감독의 작품, “비밀은 없다”, “미쓰백” 같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남성은 생기가 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여성 감독들이 남자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영주”도 마찬가지다. 365일 24시간 죄의식에 어깨가 짓눌려 좀비처럼 걸어 다니는 상문과 중2병을 앓고 성질만 부리는 사춘기 소년 영인은 외골수에 불과해서 거슬린다. 그렇다면, 만약 남성 캐릭터의 심리가 보다 구체성을 띠어 주인공 영주와 균형을 이루었다면 “영주”는 별 다섯 개를 받을 수 있었을까. 물론 그건 아니다.

요즘 ‘열연’이라는 단어는 시도 때도 없이 쓰여 오염되어 버렸다. 배우가 화면에서 소리 지르고 질질 짠다고 해서 매번 ‘열연’이 되지는 않는다. 배우의 창조적인 열정과 갈고닦은 테크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캐릭터의 감정적 진실을 내보일 때, 비로소 열연이라는 말의 사용을 고민해볼 수 있다. 김향기의 연기는 열연이라기보다 차력쇼에 가깝다. “영주”에서 카메라는 파파라치처럼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영주의 얼굴을 들춘다. 영화는 완급 조절과 은유와 상징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채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를 지우고 영주의 표정을 위주로만 정서에 접근한다. 세상에 대한 원망, 원망에 따른 복수심, 용서, 믿음과 사랑, 결국 상대방에게 상처를 안긴 데 따른 죄책감까지. 모든 정서는 눈에 힘을 잔뜩 준 김향기의 표정 연기를 통해서 전달된다. 그래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궁금해지는 것은 영주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가 아니라 연기하는 동안 김향기의 눈이 얼마나 아팠을지, 혹시 촬영 동안 눈 마사지로 피로를 풀었을지 여부이다. 


영화에서 긴 지속시간의 클로즈업이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배우의 얼굴에 농밀한 시적인 울림이 있어야 한다. 김향기의 영주에는 어린 가장의 꿋꿋함과 다정한 여성성이 제법 있다. 그러나 김향기의 얼굴에는, 여배우가 판테온 신전에 발을 디디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여배우의 원초적인 품격이 부족하다. 


영주의 고백을 통해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상황은 아이러니하다. 이 아이러니는 이미 일어난 비극 앞에서 선과 악의 구분을 흐릿하게 한다.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을 덜어 가해자에 덜어주는 태도는, 모든 인간을 포용하고자 하는 연출의 인간관과 영화의 테마를 뚜렷하게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마주하면서, 진실이 칼날이 될 수 있다는 영주의 깨달음으로, 영화는 유년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20살 소녀의 성장드라마로 읽힐 수도 있다. 다만 영화의 이 사고 실험이 현재 관객에게 적시성을 갖고 다가갈지는 회의가 든다.


한편, 영주와 영인 남매가 마주한 매정한 현실이 있다. 부모 없는 두 소년소녀를 살피지 않고 기만할 뿐인 잔인한 세상에 대한 영화의 비판은 그리 매섭지 않다. 유일한 혈육처럼 보이는 고모 내외에게도 버림받은 채, 사고만 저지르는 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일용직을 하는 영주의 생활은 설익은 사회 참여 소설을 읽는 것처럼 지지부진하다. 이 지지부진함은 영화 속 리얼리티가 연출이 직접 세상에 몸을 담구어 본 개인적 체험을 예술 형식으로 승화시킨 것이 아닌 어디선가 듣고 본 타성에 기반하는 데 있다. “영주”가 선량한 의도에도 한계를 지니는 것은 예술가로서 연출의 자의식이 아직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명당, 조승우의 매너리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