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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zog Feb 03. 2019

증인, 정우성이 막장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

방바닥에서 뒹굴며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는 TV 드라마와 표값으로 만원을 내고 감상하는 영화가 별반 차이 없을 때, 관객은 힘들게 번 돈과 귀한 시간을 구태여 영화관에서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세상에는 영화 말고도 즐길 게 많고 많은데. 영화관을 찾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공중파 드라마에서 경험할 수 없는 그 이상을 원한다. 영화관 의자에 앉을 때 우리는 드라마보다 생동감 넘치는 배우의 연기, 공이 들어간 정교한 세트, 화면에 역동성을 불어넣는 촬영, 이야기 맥락과 매치되는 음악을 은연중에 기대한다. 엉성한 TV 드라마를 보면서 경험할 수 없는 밀도 높은 감정에 휩싸이길 바란다. 영화를 볼 때 품는 이 기대는 엄청난 게 아니다. 이건 관객의 입장에서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다. 정우성/김향기 주연의 법정-휴먼 드라마 “증인”을 보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영화가 TV 드라마와 다른 점이 뭔데?


“증인”의 각본을 각색하고 연출을 맡은 이한 감독은 이 시대의 법조인, 나아가 한 인간의 양심을 이야기한다. “증인”에서 함께 사는 아버지의 보증 빚을 갚기 위해 대형 로펌 ‘미 앤 유’에서 일을 시작한 변호사 양순호(정우성)는 47세 노총각이다. 과거 민변 활동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리는 양순호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체감하며 내적으로 흔들린다.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할 예정인 양순호는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변호하는 일을 맡는다. 변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는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를 앓는 중학생 임지우(김향기)를 만난다. 양순호는 소녀가 굳게 믿는 인간의 정직함을 마주하며 현실에 때 묻어가는 자신을 반성한다.



정의보다 금전을 숭배하는 대형 로펌이 실재하고 대법원 사법 농단 사태로 법조인의 위상이 흔들리는 대한민국에서 대형 로펌 변호사 양순호의 사연은 어쩌면 이 세상에 시사하는 바가 많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증인”의 이야기와 전개 방식은 어디서 수차례 본 것처럼 익숙하다. 집주인이 질식사하게 된 사건의 전말은 일요일 오전 MBC에서 방송하는 신기한 TV ‘서프라이즈’의 한 꼭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양순호와 임지우가 친해지는 과정에서, 닫힌 소녀의 마음을 열기 위한 정우성의 쇼는 그저 눈물겹다. ‘장가’를 매일 노래 부르는 아버지와의 꽁트는 저녁 8시 일일 연속극의 그것과 같으며, 민변으로 활동하는 대학동창(송윤아)과의 로맨스는 연기하는 두 배우도 설정을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흔히 문학과 미술, 연극과 음악 등과 밀접하게 관계 맺는 종합 예술로 정의된다. 그러나 대기업이 몸소 투자/배급하는 Made-In Korea 영화는 종합적으로 어설플 뿐이다. ‘롯데’ 마크를 달고 있는 상품 “증인”도 예외는 아니다. 보고 나면, 기억에 각인되는 신은 커녕 음미할만한 이미지가 하나라도 있었나 싶다. 따스한 색감에 아기자기하게 꾸민 임지우의 방을 제외하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미술. 연출 의도에 따라 주요 장면에서 점점 커지지만 배우의 감정을 극대화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멜로디. 영화 시작 10분만에 쉽게 예측 가능한 반전. “증인”을 설명하는 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증인”에서 TV 드라마의 방식을 답습하는 이야기 전개를 보고 있으면, 음식을 급히 먹다 체한 것처럼 깝깝해진다. 혹시 저 사람이 범인일까? 혹시 양순호가 그런 결단을 내릴까? 혹시 사회적으로 자살과 다름없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할까?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예측은 모두 현실이 된다. 더 깝깝해지는 건, 영화가 등장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영화 속 인물은 둘 중 하나에 속한다. 착하거나 나쁘거나. 차별받는 소수자인 소녀 지우는 귀엽게 생겼고 순수하고 착하기까지 해서 동정심을 유발한다. 반면 어른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하고 돈과 성공밖에 모르는 불순한 존재로 손가락질을 유도한다.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한국 영화를 가까이하는 대신 외국 영화를 중심으로 얘기하는 이유 하나는, 인간을 바라보는 한국 영화의 관점이 무척이나 단순한 데 있다. 한국 영화에서 나와 같은 세상살이의 고민을 공유하는 피와 살을 가진 인격체를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증인”의 인물들은 복합적인 심리를 가진 인간의 형상을 구체화하지 못하며, 단지 창작자의 이야기 전개를 위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간편하게 사람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구분하는 태도는 지극히 유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유아적인 태도는 연출의 시선이 인간과 세상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 기성의 문법에 기대는 타성에 길들여진 데 있다.


“증인”은 마치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치킨처럼, 양순호의 내적 갈등을 한편에 놓고 자폐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다른 한편에 놓는다. 클라이막스에서 주인공은 목에 힘을 주고 ‘자폐는 열등이 아니라 인식의 차이’라는 주제로 법정의 청중 앞에서 연설한다. 이 연설은 흡사 초등학교 시절 도덕 과목 시간에 교사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읽었던 교과서 내용처럼 따분하다. “증인”은 마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현실 속에 만연한 것처럼 가정하고 우리 안에 내재된 편견을 비판하는데, 이 비판의 핀트는 어딘가 어긋나 있다. 아직도 ‘자폐’를 ‘정신병’으로 치부해 경멸하는 사람이 현대인 중에 몇이나 있겠는가. “증인”은 장애에 대한 편견을 과장하고 과장된 뻥을 스스로 부정하는 방식으로 극을 구성한다. 무엇보다 “증인”을 가장 깝깝하게 만드는 건 마치 1930년대 일제강점기 소설처럼 관객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는 바로 이 선민의식에 있다. 


이야기가 한심해 보일 때, 이 한심함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처방은 배우의 연기이다. “증인”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 아쉽게도 정우성과 김향기를 비롯해 어느 배우에게서도 생기를 찾을 수 없다. “아수라”에서 똥개처럼 이리저리 걷어 차이며 비굴함을 얼굴에 새겼던 정우성의 연기는 열정으로 가득했지만, “증인”에서 정우성의 열정은 갈길을 잃은 채 방황한다. 정우성은 일상의 다양한 표정 연기로 진부한 상황을 극복하려 하나 그의 캐릭터는 전형성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전형적인 캐릭터에서 배우가 노력한들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까. 조연들의 사정은 더 애잔한데, 누구라고 특정은 못하지만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관찰하면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책을 그저 낭독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증인” 속 권선징악은 막장 드라마의 그것과 닮아있다. 이는 안전한 수익을 보장하는 시나리오에만 배팅하는 영화 시스템의 참사이다. 현실 감각을 도무지 찾을 수 없고 망상력만 발휘된 것 같은 전개에서 가치를 찾는 건 부질없는 일이 되었다. 영화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차치하고라도, 영화관에서의 시간 낭비와 기회비용에 대한 생각에 집착하게 된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나처럼 자괴감을 느끼는 관객이 가능한 최소한이었으면 좋겠다. 영화관에서 궁시렁대기보다는, 추석 명절날 가족과 오순도순 송편을 빚으면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농익은 와인처럼 멋스러워지는 정우성을 TV로 보는 것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한국 영화는 더도, 덜도 말고 요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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