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rzog May 22. 2019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in 타이페이

The Cleveland Orchestra in Taipei

3/28~3/29


1967년 잘츠부르크와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포디움에 섰던 지휘계의 전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1984년부터 2002년까지 이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이었던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지휘해 본 오케스트라 중에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세 차례 리허설 후 딱히 지적할 게 없었던 유일한 앙상블이었다고.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 시카고와 함께 미국의 5대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알파고를 연상시키는 테크닉으로 오점 없는 음악을 들려주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날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위상은 1946년에 부임한 지휘자 조지 셀이 24년간 혹독하게 단련시킨 결과로 말할 수 있는데, 부임 초기부터 조지 셀이 그가 원하는 수준의 음악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단원을 교체했고 리허설에서 얼마나 연주자를 들볶았는지, 그 사연은 오늘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다. 그가 오케스트라에 심어놓은 완벽을 향한 강박관념과 장인정신은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고 있다.





3월 28~29일. 절천지원수 같은 동미참 예비군 훈련이 겹치는 시기였다. 때마침 평소 보고 싶었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대륙 투어 소식을 듣고 간만에 오케스트라 공연도 볼 겸, 휴가 겸, 국방의 의무도 패스할 겸 타이페이로 날아갔다.


숨이 턱 막히는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인 타이페이에 도착한 후 시내에 예약해 둔 호텔에 체크인해 짐만 내려놓고 맛집부터 투어했다. 한 곡에 30분이 넘는 교향곡이나 협주곡을 주의 집중해 듣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므로, 공연 전 컨디션 조절을 위해 고른 영양 섭취로 감수성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필수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파워 블로거들의 포스팅에 의해 검증된 식당에 들러 곱게 익어 보들보들한 쇠고기와 담백한 국물이 어우러진 우육면으로 든든하게 속을 채우고 유서 깊은 융캉제거리의 느낌 있는 어느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카페인을 충전했다. 무릇 최상의 공연에는 최상의 관객이 자리해야 마땅하니까.


차량보다 그 수가 더 많아 보이는 오토바이의 매연 냄새를 맡으며 이국적 풍경을 거닐다가 19시 30분, 공연 시작 시간에 맞추어 중정기념관 앞 국가음악청으로 향했다.


첫날 프로그램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과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으로 구성됐다. 협연은 세계적인 스타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 프로그램이 다소 진부하긴 했지만 지휘자 프란츠 벨저 뫼스트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18년 궁합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진출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홈페이지


1781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프리드리히 슈나이더의 협연으로 초연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E 플랫 장조는 베토벤의 이전 피아노 협주곡 네 곡과 달리 강렬한 오케스트라의 화음과 피아노의 카덴차로 당차게 시동을 건다. 지휘자의 비팅 아래서 오케스트라에 의해 제시된 첫 화음은 몹시 낯설었다. 첫 음이 포르테의 장엄함보다는 따스한 현 파트의 음색과 함께 우아한 발걸음으로 등장했기 때문인데, 이는 마치 근육이 우락부락한 보디빌더의 등장을 한껏 기대했는데 예상치 않게 드레스를 입은 전성기 줄리아 로버츠가 나타난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석의 전체적인 기조는 내적 감정을 적극 표출하는 낭만주의적 성격보다는 순수한 관조적 쾌감을 유도하는 고전주의 풍에 가까웠다. 오케스트라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대신 뒤에 물러서 피아노를 보조했다. 피아노 독주 앞뒤로 반복되는 오케스트라의 리토르넬로는 마치 애무하는 것처럼 지시에 따라 때로는 세게 때로는 약하게 노래하면서 피아노 선율과 친밀한 파트너가 되었다. 각별히 주목할만한 순간도 있었는데,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2주제부 즈음에서 첼로 수석 Mark Kosower는 지속음을 솔로로 제시하면서 피아노와 실내악적인 순간을 연출했다.


 피아노 앞에 앉은 다닐 트리포노프는 흔히 신들렸다고들 한다. 완전히 음악에 몰입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모습은 음악을 향한 그의 사랑을 청중의 마음에 옮겨 놓는다. 공연장에서 그의 신들림을 보는 것은 하나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빼어난 기술은 물론 행위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것 같은 그 시각적 효과에 흥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건 다른 피아니스트의 공연에선 마주하기 힘든 그만의 것이기도 하다. 카네기 홀과 도이치 그라모폰이 그를 사랑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B장조의 아다지오 악장에서 다닐 트리포노프는 목관과 함께하는 명상적인 주제 선율에 감미로움을 더했다. 몸에 미동도 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시작해 상승하는 긴 트릴을 명징하게 속삭였다. 이어지는 유쾌한 론도 악장에서 그는 온몸을 들썩거리며 피아노가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강한 타건과 함께 적극적인 루바토로 흥을 살렸다.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협연자와 오케스트라의 호흡이 척척 맞는 협주곡은 훌륭한 교향곡 연주보다 듣기 쉽지 않다. 정기공연만큼 리허설 시간이 충분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닐 트리포노프의 열정과 오케스트라의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똘똘 뭉친 오케스트라의 반주를 들을 수 있어 보람찬 시간이었다. 특히 느린 악장에서 현악기 연주자들이 일제히 뜯는 단 한 번의 피치카토는 풍부한 뉘앙스로 마음에 파장을 일게 했다. 마지막 음이 울린 후 콘서트홀의 관객은 호응을 보내주었다. 다닐 트리포노프는 앵콜곡으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8번(Op.31 no.3) 마지막 악장을 선택했다. 농익은 테크닉으로 유명한 타란텔라 리듬을 미꾸라지처럼 소화하며 청중에 화답했다.



작가의 이전글 증인, 정우성이 막장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