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영화감독을 살펴보면, 그들은 저마다 단짝이라 할 수 있는 여배우를 만났다. D.W 그리피스와 릴리언 기쉬, 알프레드 히치콕과 조안 폰테인, 조셉 폰 스턴버그와 마를렌 디트리히, 장 르느와르와 시모네 시몽, 오토 프레밍거와 진 세버그,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와 이렌느 야곱, 홍상수와 김민희. 이제, 영화 “기생충”을 통해 커플 하나를 더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봉준호와 이정은. 인터콤 신의 엽기적 등장을 시작으로 ‘문광’ 역의 이정은은 한 시퀀스 동안 마치 오페라의 프리마돈나처럼 무대를 휘어잡는다. 인간의 조급함, 비굴함, 뻔뻔함, 모성애, 부부애 등 오만가지 감정을 표현주의적 코믹 연기로 대포동 미사일처럼 쏟아냈다가 최후에는 애잔하게 숨을 거둔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소감에서 봉준호 감독은 “영화광”이라는 표현으로 자기 정체성을 내비쳤는데, 이는 몹시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기생충”은 영화광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광이란 무엇인가. 우선 영화광은 영화를 엄청 많이 보는 사람을 의미한다. 나아가 영화광은 영화를 단순히 영화를 재미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숭배하는 사람, 영화의 작은 미학적 성취에도 온몸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말한다. 영화광에게, 영화가 주는 희열이란 육체적 관계의 절정에서 느낄 수 있는 벅찬 오르가즘과 동급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영화광이 계속해 새로운 영화를 찾아 헤매게 하는 동력이 된다.
영화광의 영화에 대한 사랑은, 매번 반복되는 진부한 틀을 거부하고 새로운 이미지와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갈구한다. 영화광이 만드는 영화는 관객 입장에서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광의 자의식은 기성 영화와 다른 최소한의 ‘차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기생충”은 영화광이 영화광을 위해 만든 선물처럼 보인다. 슬쩍 얼개만 살펴봐도 그렇다. 한국식 막장 드라마의 형식을 빌려 리드미컬하게 전개되는 초반 케이퍼, 분위기 반전 이후 공간의 어둠을 데이빗 린치처럼 활용하면서 불편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미스테리, 조롱의 말이 오가고 몸이 뒤엉키는 막스 브라더스 류의 한바탕 소동극, 에로티시즘이 첨가된 히치콕식 숨바꼭질, 잠시 숨을 고른 뒤 광적인 복수극과 살해극, 그리고 가족드라마. 밑도 끝도 없는 잡탕찌개지만, 요리하는 사람은 분명 맛을 예상하고 재료를 섞었다. “기생충”에서 가슴으로 진하게 전해지는 것은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예술가의 행복이다.
장르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의 가장 근본적인 고민 중 하나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관객의 호기심을 어떻게 유발할 것인가’, ‘유발한 호기심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
영화광 출신의 영화감독은 저마다 이 물음에 대한 창조적인 답안을 제출했다. 일례로, 프랑소와 트뤼포는 “부부의 거처”의 초반에 ‘레슨비’라는 일상의 소재를 사용한다. 학생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아내가 레슨비를 깜박한 학부모에게 말을 못 해 전전긍긍할 때, 주인공 남편은 레슨비를 지불받기 위한 방법을 궁리한다. 대체 주인공은 ‘어떻게 바이올린 레슨비를 받아낼까?’ 트뤼포는 기발한 잔머리를 사용해 관객을 미소 짓게 한다.
“기생충”에서 ‘취업’이라는 소재는 트뤼포의 것만큼 흥미롭다. 위장 서류를 꾸민 기우가 박사장 네 딸 다혜의 과외 선생으로 취업한 후 엇비슷한 패턴이 연쇄적으로 변주되는데, 기택의 가족이 기생을 완성하는 과정은 관객의 반응을 확신하고 연출한 것처럼 보인다. 박사장 부부가 운전기사의 해고를 이야기하면서 기택의 등장이 예상될 때, 기정이 벤츠에 심어놓은 팬티를 떠올리며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를 다시 되짚으면서 가장 음미했던 것은 클라이막스의 파티신이었다. 운전사 기택이 박사장을 살인하는 동기는 몹시 정교하게 구성되었다. 마치 교향곡에서 1악장의 모티브가 마지막 악장의 장대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처럼,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메인 플롯 한편에 계급적 열등감을 속으로 삭이는 기택의 서브플롯이 파편적으로 삽입되면서 조용히 극의 절정을 예비한다. 상당히 보기 드문 구성인데,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 말로만 흘려들었던 무정부주의자의 등장이나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에서 꿈처럼 스쳐가는 예감이 마지막 파국을 암시했던 것과 유사한 형태라고 할까.
파티 신에서 기택의 충동적인 살인에 대한 연출은 알베르 까뮈가 “이방인”에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뫼르소의 상황을 묘사한 것과 거의 동일한 미적 충격을 산출한다. 짓눌려있다가 폭발하는 도스토예프스키적 지하 인간의 광기 한편으로, 기택의 시점에서 보이는 코를 막는 박사장의 제스처, 전날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 피로, 달아오르는 열기, 반사되는 햇빛, 손에 잡히는 흉기는 종합적으로 기택의 순간적 살인 충동을 짐작하게 한다.
“기생충”은 때로 90년대 한국 리얼리즘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봉준호는 서민의 궁상과 애환을 다루지만 이를 추한 것으로 멀리하는 대신 유머러스하게 끌어안는다. 아마도 홍경표 촬영감독의 공이 크지 않을까 싶은데, 홍수에 역류하는 변기 위에 쪼그려 앉은 채 젖은 담배에 불을 붙이는 기정의 모습은 슬픈데 웃기고 그러면서도 아름답다. 또 PC방에서 포토샵 작업하면서 예리한 각도로 담배를 물고 있는 기정은 먼 옛날 피시방에서 크레이지 아케이드에 몰두했던 기억 속의 센 누나 그대로였다. 50~60년대 박수근의 회화가 서민적 삶의 본질을 포착했던 것처럼 90년대에는 장선우 영화에서, 현재는 봉준호 영화에서 구체적인 서민의 풍경을 찾을 수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객석이 숙연해지는 광경을 목격한 건 비단 개인적인 체험만은 아닐 것이다. “기생충”은 ‘계급’이라는 사회학적인 틀로 세상에 접근하지만, 펼쳐내 보이는 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갈등이 아닌 생존을 위해 기생하는 존재들의 아등바등 거림이다. “기생충”이 조소하는 것은 “부자니까 착한” 사람들의 위선이 아니라 밥그릇을 위해 기생하는 이들이 서로를 밀어낼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이다.
“기생충”은 풍자극처럼 보이지 않는데, 풍자는 세상의 변화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엿보이는 것은 변하지 않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인간의 조건에 대한 체념이다. 객석을 가라앉게 만든 것은 아마도 세상에 대한 봉준호의 냉소일 것이다. 하지만 봉준호는 냉소에 선을 긋는다. 상황을 냉소할지언정 인간에 대한 냉소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약삭빠른 캐릭터들이 상대를 속이고 어리석은 선택으로 자기 무덤을 팔수록 비웃지 않고 대신 연민한다. 다행히 이 연민은 가식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캐릭터를 향한 애정이 장 르느와르처럼 모두를 향하지 않고 오직 약자만을 향한다는 데 있다. 이것을 프롤레타리아적 동지애로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생충”에서는 사람 냄새가 풍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