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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zog Aug 08. 2022

박해일 = 홍석천?

    사랑은 참 기묘한 것이다. 박해일의 연기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은 총명한 사람을 저렇게 흐트러놓기도 하는구나. 이포 수산시장에서 탕웨이가 스웨이드 힐을 신고 걸어올 때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참으로 오묘한 여인이로다. 음과 양의 기운을 이토록 조화롭게 다스리다니. 때로는 오렌지 같고 때로는 블랙홀 같기도 하구나. 박찬욱은 김태용보다 배우의 매력을 더 잘 간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팔 배게에 누운 이정현을 보고서는 화들짝 놀래버렸다. 이건 아내가 아니라 저승사자다!


    나는 이정현이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숨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자라니 석류니 정력 타령하며 바가지 긁어대는 대사도 그렇지만, 저 정내미 떨어지는 섹스가 미래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탓이었다.



    사실 이 주말 부부의 관계는 섹스로 인정할 수 없다. 남편의 시선이 방구석 곰팡이로 향할 때 그것은 삽질이 되었다. 박찬욱 영화에서 삽질이라.. 몹시 당혹스러웠다. 그것은 그가 베드신의 정수를 연출해왔던 감독인 터이다. 단적으로 “아가씨”에서 김민희와 김태리의 합일은 단순한 눈 요깃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교향악처럼 원시주의적 향기가 물씬 풍기는 행위 예술과도 같았다. 쾌락에 사로잡힌 육체들이 빚어내는 박력 있는 리듬과 약동하는 에너지는 정신이 번쩍 들게 했던 것이다. 폭풍처럼 질주하는 섹스는 두 인물 사이에 오가는 정을 자연스레 설명하고 믿게 했다. 파멸적인 오르가즘 뒤에는 그만큼 긴 여운이 따른다는 것을 경험으로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준과 아내의 침실은? 고문의 현장이다.


    나는 늘 궁금했다. 왜 아직까지 박찬욱 영화 속 섹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걸까. 나는 또 궁금했다. 서래와 해준은 왜 안 했을까. 한번 곰곰이 따져봤다. 배우자에게 만족을 못 느끼는 혈기왕성한 불혹의 청춘들이 사적인 공간에 단 둘이 있을 때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을 확률.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본능적으로 그 가능성은 당최 가늠이 가질 않았다.


    만약 서래가 다른 여자였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서래는 누구인가. 바로 탕웨이다. 동아시아 대표 미녀가 사찰에서, 차 안에서, 심문 중에, 흡연 중에 눈치를 줬다. 먼저 나서서 포옹과 키스까지 해줬다. 이건 그린라이트다. 호미산에 두 사람을 축복하듯 눈이 내리고 적막이 주변을 맴돌고 있다. 구름은 별과 달빛을 가리지 않았다. … 대체 뭐지. 곧장 양조위로 빙의해도 아쉬울 판에 제주도 돌하루방 노릇을 하다니. 물론 그의 성격은 세심하고 자상하다. 요리 솜씨와 패션 센스가 있고 물티슈와 립밤을 늘 지닌다. 그런데 그 많은 코트 주머니 속에 콘돔은 챙기지 않았다. 왜? 그는 작가 정서경이 꿈속에서 안아보고 싶어 했던 남성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품위를 갖춘 남자는 벨트를 풀어야 할 때를 안다. 풍류를 즐길 줄 아는 게 남자의 자부심이고 진짜 사나이가 할 일이다. 난 그저 애석할 따름이었다. “연애의 목적” 5초 박해일 선생이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는가. 혹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말러의 선율은 해준이 커밍아웃하지 않은 홍석천임을 암시하는 것인가.


    비키 바움의 소설 “그랜드 호텔”에 이렇게 쓰여있다. ‘섹스 없는 남자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말 그대로다. 해준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기에 절호의 찬스 앞에서도 멀뚱대며 쳐다보기만 한다. 만에 하나 서래가 해변이 되지 않고 장난꾸러기처럼 바위 뒤에 몰래 숨어 기다렸더라면, 저 새가슴은 환승할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왠지 머뭇거릴 것 같다. 구국적 결단을 내리기에 박찬욱과 정서경은 근심과 걱정이 많아 보인다. 사색가는 행동하기 전에 의심을 한다. 그러나 장애물이 앞에 놓인 사랑은 홍상수처럼 사내대장부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홍상수는 제대로 보여주었다. 고현정이나 엄지원 같은 경국지색 앞에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사랑 앞에서, 모름지기 남자란 무얼 해야 하는지를. 허나 어떻게 세상 모든 남자가 홍상수 같은 호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해준은 마음이 흔들린 보통의 유부남답다. 귀신처럼 눈치가 빠른 아내는 맞바람으로 응수했고, 졸지에 홀애비 신세가 된 그는 살면서 다시 보기 힘들 미인을 가슴에 묻어야 한다.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중년의 처량한 처지에 대한 자조 섞인 냉소는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박찬욱의 세계에서, 인식의 한계에 갇힌 인간은 최선의 판단 미스를 반복하다 정해진 운명 앞에 굴복한다. 저 고개 숙인 남자도 결국 눈 뜬 장님이다. 노을을 등진 그의 뒤늦은 깨달음은 기억 속의 이미지를 되짚어보게 한다. 엇갈린 사랑이 남긴 흔적들은 진실된 사랑의 가능성이 된다. 역설, 배려, 눈물, 숨소리, 표정, 제스처, 문자를 입력할 때 버퍼링… 영화 속 문법과 오감, 말과 행동을 추리해보는 과정은 내가 붙잡지 못했던 여자들을 떠올리며 자책할 때마다 끊임없이 반복했던 것이기도 하다. 어느새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그래도 남자 망신을 있는 대로 다 시키는 형사는 참 몰입이 안 되었다. “서래 씨는 어느 시대에서 왔어요? 당나라?” 서래는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새끼 뭐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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