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5일 롯데 콘서트홀
드디어 리사 바티아쉬빌리를 영접하고 나서 평소 자주 듣는 성시경의 노래 가사를 되뇌었다. 정말이지.. 빈틈없이 행복했고 남김없이 고마웠다. 리사 누님의 보잉에 따라 내 시간은 흐르기도 하고 멈추기도 했는데, 난 내 삶의 모든 순간이 저 온기로 가득한 바이올린 소리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차오르는 일이었다. 물론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바램이었지만 현장에서 함께했던 관객이라면 이 절절한 심정을 이해하지 않을까 싶다.
무대 입장부터 어마어마했다. 리사 바티아쉬빌리는 어지간한 절세미인도 소화하기 어렵다는 진한 핑크색상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객석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 예리한 감각으로 통찰했을 때 누님의 의상 선택에는 몹시도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말하자면 이 강렬한 패션은 일종의 자신감이었다. 여기에는 자기애, 그러니까 아름다운 본인 외모에 대한 나르시시즘이 얼마간 반영되어 있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예술가로서 연주에 대한 내적 확신을 의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좌중을 압도하는 자신감은 과연 허풍이 아니었다. 솔로 첫음이 울렸을 때 이는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 알레그로 모데라토 악장. 1-2 바이올린 파트의 트레몰로 위에서 피어오르는 솔로의 에스프레시보(dolce ed espressivo)는 몹시 여리고 섬세하게 표현되어 소녀의 수줍은 제스처를 상기시켰다. 이 에스프레시보는 연주의 방향성을 암시하는 맥점이었다. 연주하는 내내 시종일관 그윽하면서도 고혹적이고,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는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리사 누님의 테크닉은 그야말로 영혼까지 파고들었다. 음과 음을 잇는 레가토는 유려하기 그지없었으며 그에 의해 선율들은 실크 원단처럼 고급스럽게 윤기가 났다. 선율을 맺음 하는 피아체레(a piacere) 지시에서 화음들은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 정점으로 뻗어나갔고 라르가멘테(largamente)의 저음 터치는 듣는 내내 황홀경에 빠지게 만들 정도였다.
한 애호가는 리사 바티아쉬빌리의 강점이 진한 감성을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고 했다. 나는 이 말에 백번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다지오 악장이 특히 그러했는데 목관 앙상블 이후 펼쳐진 에스프레시보(sonoro ed espressivo)는 귀족적인 바이올린 사운드의 정수였다. 바이올린 브릿지 부근에서 흘러나오는 울림은 마치 초콜렛 상자를 막 열었을 때의 달콤한 향기를 날렸다.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클라이맥스에서 오케스트라와 독주자가 살벌하게 대립한다. 나는 곡의 주요 포인트를 이렇게 알고 있었다. 그건 소실적부터 크리스티안 페라스, 막심 벤게로프 같은 남성 비루투오소 음반을 즐겨 들었던 터였다. 허나, 이 공연으로 인해 나는 곡에 대한 내 이해가 몹시 편협했음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했다. 리사 누님의 카리스마가 오케스트라를 완전 지배해 버렸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는 조연으로 조심스럽게 보조를 맞추며 독주자의 역량을 부각했고, 2악장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솔로와 합심해 균형 잡힌 하모니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춤곡 리듬을 기반으로 하는 마지막 악장. 솔로는 목관 악기와 탱고를 추는 듯했는데, 그 가운데 싱커페이션과 트릴은 한마디로 경천동지. 하늘을 감격시키고 대지마저 뒤흔들 지경이었다.
리사 바티아쉬빌리는 힐러리 한, 야닌 얀센과 더불어 세계 3대 미시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이 자자하다. 세분 모두 노력하는 천재이다. 미모 역시 출중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리사 누님의 앨범을 자주 재생하게 된다. 그건 내가 따스한 음색을 좋아하고, 리사 누님의 바이올린 소리가 어디 비할 데 없이 로맨틱한 데 있다. 인간적인 온기를 전하는 예술 작품은 시대를 불변하고 늘 호소해 왔다. 장 르느와르의 영화 “위대한 환상”이나 베르메르의 회화처럼. 나는 핑크빛 리사 누님의 연주를 들으면서, 진정한 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와 똑같이 반응했다. - 이 순간이 부디 영원했으면 좋겠다. -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서 바이올리니스트에 대한 내 기준은 리사 바티아쉬빌리를 직접 보기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