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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ul 08. 2020

익사한 뒤 물에 뜬 '나'는 누구?

프란츠 카프카, 『선고』

양옆으로 단정하게 쓸어올린 앞머리와 쫑긋 솟은 두 귀, 위엄을 간직한 듯 우뚝한 코와 엄숙함이 묻어나는 입술, 허무함과 열정을 동시에 내비치는 두 눈과 꽉 동여맨 넥타이까지. 카프카의 저 유명한 사진은 그 자체만으로도 카프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회적 자아로서 강제 받은, 마땅히 인간이라면 순응해야 할 '살아가야 할 삶'과, 본인의 실존적 자아가 소망해 마지 않은 '살아가고픈 삶' 사이에서의 처절한 반항과 좌절을 간직해 보였달까. 물론 이러한 해석은 순전히 카프카에 대한 종전의 배경지식으로부터 비롯됐을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분명한 건, 카프카는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사회적 자아에 대한 압박을 적잖이 받아왔고 그로 인한 둘의 불화가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카프카는 특유의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갈등을 표면으로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정공법을 택하기 보단 속으로 곱씹으며 갈등의 본질에 대해 심원히 사유하며 점차로 깊은 자아로 침잠해 들어갔으리라. 또한, 그리하여 다다른 내면에서 깨달은 철학적 통찰을 소설로 끄적이는 것이 그에겐 유일한 탈출구이자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였을 지도. 그런 의미에서 카프카의 작품은 오늘날의 현대인에게도 충분한 위로가 되리라. 왠가하면, '인간'이기 이전에 '기능'으로 존재하도록 현대인을 내모는 이 사회의 '타자적 규정성' 속에서 우리는 '인간됨'이 무엇인가에 대해 자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으며 존재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이 되길, 자신에게 다가가는 시간이 되길 의망한다.






카프카의 단편작 『선고』는 불과 10페이지 남짓의 짧은 단편으로, 집중해서 읽으면 30분 만에 다 읽을 만큼 그 내용도 평이하다. 다만 읽고 나서 뒤따르는 모종의 찝찝함을 스스로 어떻게 정리해 나갈 지가 관건일 뿐.



줄거리


소설의 주인공은 게오르크 벤데만이다. 그는 젊은 상인이자, 제법 성공한 사업가라 할 수 있으며, 이제 곧 유복한 가정의 처녀와 약혼을 앞에 두기도 한, 누구라도 부러워 할 사회적 요건을 두루 갖춘 성공적'시민'이다. 게오르크는 이따금씩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로 떠난 옛 친구에게 편지를 부치곤 했다. 친구로 말 할 것 같으면, 일찍이 고향 땅을 떠나 러시아에서 사업을 시작한 친구인데, 딱히 성공적인 사업 수완을 보이진 못한 탓에 지지부진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게오르크는 친구에게 자신의 약혼 소식을 알릴지 말지 고민에 빠진다. 편지 너머로 혹여나 게오르크의 성공적인 삶을 전해 들은 친구가 괜스레 위축되진 않을까 하는 동정 때문이었다. 게오르크는 고민 끝에 이 문제를 아버지와 논의해 보기로 한다(바로 이 때부터 카프카 소설 특유의 '기괴함'이 시작된다). 아버지는 매우 뚱딴지같게 게오르크에게 이야기한다. '넌 페테르부르크에 아무 친구도 없어.'게오르크는 황당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버지는 의기양양하며 덧붙였다. '너는 네 친구를 굴복시켰다고 생각했지? 완전히 굴복시켜서 이제 네 엉덩이로 깔고 앉아도 꼼짝 못할 거라고 믿었고, 그렇게 되니까 우리 아드님께서는 결혼을 결심하신 거야!" 좀 전까지 게오르크에겐 친구가 없다던 아버지가 어느새 게오르크의 친구를 대신하여 게오르크를 비난한다. 일순간 감정이 격해진 둘은 서로를 향해 최선의 비난을 내뱉기 시작한다. 그러던 끝에 아버지는 소리친다. '너는 (···) 악마 같은 인간이었어! 나는 네게 익사형을 선고하노라!' 아버지의 벼락 같은 소리침에 놀란 게오르크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도망치기 시작한다. 정신 없이 달려 그가 도착한 곳은 어느 다리 위의 난간이다. 이윽고 그는 다리 아래로 몸을 던지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감상


표면적인 줄거리로『선고』를 감상하면 그저 '기괴함' 이라는 말 이상의 평을 내뱉기가 어려울 것이다. 도대체 게오르크에게 친구가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그리고 아버지는 왜 돌연 게오르크에게 익사형을'선고'했으며 이를 들은 게오르크는 왜 순순히 그에 따랐는지 머리가 혼란스러울 거다. 이제 작중 인물들을 물리적 실체로서 감상하려 들지 말고 상징적 존재로서 추측해 보자. 과연 게오르크와 그의 친구, 그리고 아버지, 이 셋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힌트를 주자면, 카프카가 살았던 19~20세기 '정신사'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가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란 사실이다.


게오르크의 친구는 게오르크의 또 다른 자아, 즉 실존적 자아다. 실존. 여러 문학 작품을 읽노라면 지겹게도 듣는 말이지만 도무지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리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실존 아니던가. 이해를 위해 오늘날 수많은 회사원들의 터전인 회사 생활을 떠올려보자. 회사는 원활한 작동을 위해 명확한 관료 시스템을 지향한다(창의력을 중시하는 오늘날엔 '원활한 작동'이라는 동일한 목표 아래 수평적 시스템을 지향한다지만, 이 또한 효율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관료 시스템 안에서 각 구성원들은 직함으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부장이나 과장, 대리 등등. 그들은 각 직함에 걸맞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다. 아니,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만 해당 직함을 부여 받을 수 있으며, 혹여라도 시간이 흐른 뒤에 그 능력을 상실한다면 언제고 박탈 당할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지위로서 존재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회사에 머무르는 한 그들은 순전히 직함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 즉 직함이 없이는 그들이 회사 내에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이란 점이다(직함이 없다는 것은 곧 해고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직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회사에서 각자가 부여 받은 역할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 사회가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나사못 같은 존재들이며, 그 나사못에 붙은 이름들이 그들의 직함이다. 설혹 휘어져서 못 쓰게 되면 다른 못으로 대체되어도 무방한 나사못 말이다. 이렇듯 인간은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로서 존재하게 되며, 이 때 인간의 실존은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가령 휘어진 나사못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듯 김과장님이 감기에 걸렸다고 걱정할 사람은 없다. 혹여나 휘어진 나사못을 고치려 한다손 치더라도 이는 비용에 대한 걱정에 지나지 않듯, 김과장님을 향한 걱정도 업무의 효율적 달성에 대한 걱정의 발로일 뿐이다.


다시금 게오르크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게오르크는 나름 성공한 사업가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고, 덕분에 경제적으로도 풍족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유복한 가정의 처녀와 약혼을 앞두고 있으며, 누가 봐도 사회적 성공을 달성한 인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반면 게오르크의 친구는 어떠한가. 나름대로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고 고향을 떠나 러시아로 갔지만 이렇다 할 성과 없이 근근이 지낼 뿐이며, 사회적으로 '실패'한 삶으로 조명된다. 게오르크는 그런 친구에게 편지 보내길 주저했고, 그런 게오르크에게 아버지는 익사형을 선고한다.


게오르크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사회적 자아'의 전형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사회적으로 요구 받는 바, 혹은 사회적으로 달성하고 싶은 바를 이룬 '역할'로서의 자아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직함'으로 존재하는 회사원과 같은 위상으로 파악되는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게오르크에겐 카프카 본인이 자신의 실제 친아버지로부터 강요 받은 '자아'가 투영되어 있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듯 카프카는 아버지의 바람--혹은 강압--으로 인해 법대에 입학했고 보험 회사에서 법률 고문으로 일했으며, 이따금씩 자신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소설로 써서 간직하곤 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법률 고문으로 존재하는 카프카가 게오르크라면, 밤마다 소설을 통해 사유하고 성찰하는 카프카는 '게오르크의 친구'인 셈이다. 작중 사회적 자아로서의 게오르크도 한 때는 실존을 열망했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실존을 향한 몸부림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겠는가. 사회적 성공으로 눈을 돌린 게오르크는 이제 인생이니, 실존이니 하는 고리타분하고 진지한 존재론적 물음은 지워야만 했다(오늘날 북튜버 시장만 보더라도 인문학 보다는 경제/경영서를 리뷰하는 사람들이 인기가 많지 않던가.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선 대중과 영합해야만 할지라). 사회적 자아를 가꾸는 데 열중한 게오르크는 사실 오래도록 친구를 망각한 채 살았던 것이다. 이에 대한 아버지의 말이 흥미롭다.


이제는 네 바깥에 뭐가 있었는지 알겠지. 지금까진 오직 너 자신밖에 몰랐었는데 말이야. 너는 원래 순진한 아이였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악마 같은 인간이었어! 그러니까 이제 알아라, 나는 네게 익사형을 선고하노라!"



실존적 존재로서의 게오르크(즉 게오르크의 친구)는 사회적 자아로서의 게오르크 바깥으로 밀려나갔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나'라는 존재로부터 쫓겨나 삶에서 하등 상관없는 쓰레기 질문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아버지는 익사형을 선고한다. 그 죽음의 방법이 익사인 이유가 과연 물이 주는 '정화'의 이미지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사회적 자아의 종결 뒤에야 비로소 실존적 게오르크가 깨어날 수 있다는 거다.



어쩌면 카프카가 작중 아버지를 빌려 게오르크에게 '선고'를 내린 것은, 페테르부르크의 친구처럼 되고 싶다는 '선언'을 다만 아버지의 입을 빌렸을 뿐이 아닐까.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인상 깊다.




이 순간 다리 위로 정말 끝도 없을 것만 같은 차들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김과장님이 아파도 회사는 잘 돌아가며, (사회적 자아로서의)게오르크가 죽어도 차들은 제 갈 길을 간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칼날 끝에 눈부시게 비치는 태양빛 속에서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던가. 태양은, 그냥, 언제나, 빛날 뿐인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대학생이라고? 그럼 대학을 졸업하면 '나'가 아닐까? 아, 그럼 회사원이라고? 그럼 회사에서 짤리면 '나'가 아닐까? 자문해보자. '나'에게서 나이와 성별과 국적과 누군가의 아들과, 어딘가의 구성원이라는 모든 속성을 제거하고도 남는 '나'는 무엇일까. 다리 밑으로 뛰어들어 빠져 '익사'한 뒤 둥둥 뜬 '나'는 그저 시체일 뿐일까?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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