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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Aug 15. 2020

"못하면 좀 어때?"

한병철, 『피로사회』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k262pEbaM-c




바야흐로 현대인은 지쳤습니다. 끝도 없는 학업에 지쳤고, 산더미 같이 밀린 업무에 지쳤습니다. 또한 상처만 주는 인간관계에 지쳤고, 자꾸만 동료들에게 뒤처지는 스스로에게 지쳤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현대인은 다시금 힘을 냅니다. 서점에 가서 온갖 위로 문구로 가득한 힐링 에세이를 읽거나, 혹은 산 정상에서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주문을 외쳐보는 식으로 말이죠. 그렇다면 한 번 질문해봅시다. 현대인은 왜 꼭 힘을 내야 할까요? 당장 쓰러질 만큼 지쳤다면 그냥 내려놓고 쉬면 되지 않을까요? 왜 현대인은 깨지도 않은 몸을 커피로 애써 각성해가며 다시금 일터로 나가야만 할까요?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사회, 열심히 사는 삶 만을 미덕으로 치켜세우는 현대 사회에 대한 우아하고도 날카로운 분석을 담은 오늘의 책, 한병철의 『피로사회』입니다.







저자 한병철은 다음의 강렬한 구절로 책의 첫 운을 뗍니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즉 저자는 과거와 현대에 고유한 질병이 각기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의 설명에 따르면 과거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야 말로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를테면 14세기에 발병한 페스트는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목숨을 앗아갔고요, 그 밖에 천연두, 콜레라, 심지어 독감에 이르기까지 과거 인간을 공포에 떨게 만든 고유한 질병은 감염성 질환이었습니다. 하지만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현대인의 골칫거리는 더 이상 박테리아나 바이러스가 아닙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적인 질병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우울증이나 번아웃 증후군, 혹은 주의력결핍장애 등 신경성 질환들이죠. 따라서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과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면, 현대 사회는 신경증적 시대라고 말이죠. 먼저 면역학적 시대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면역학적 시대


면역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면역이란 생체의 내부환경이 외부인자에 대하여 방어하는 현상이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나’의 신체라는 내부환경이 존재하고, 감기 바이러스라는 외부인자가 공중에 떠다닌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이 때 만약 감기 바이러스가 ‘나’의 신체에 들어올 경우 ‘나’의 몸은 바이러스를 무력화하기 위해 자동으로 반응하겠죠. 이것이 바로 면역입니다. 즉 면역의 매커니즘에서 ‘나’의 신체는 지켜야 할 주체이며, 외부의 바이러스는 처치해야 할 대상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저자는 이러한 면역학적 과정 속에서 안과 밖의 이분법을 읽어냅니다. 쉽게 말해 면역은 나와 다른 이질적인 것을 마치 바이러스처럼 틀린 것으로 간주하고 처치하는 과정이라는 거죠. 가령 독일 나치가 유대인을 박멸의 대상으로 여기고 집단 대학살을 감행한 사건이나, 혹은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흑인들에게 집단 린치를 서슴지 않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면역학적 시대란 나와 다른 이질성, 혹은 남이라는 타자성을 마치 바이러스처럼 처치 대상으로 여기는 시대를 가리킵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면역학적 시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부정성입니다. 인간은 외부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바이러스를 부정함으로써 우리의 신체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면역학적 시대는 동시에 규율사회이기도 합니다. 사회가 바이러스라고 규정하며 정상의 바깥으로 쫓아낸 부정적인 것들을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동성애라던가 혹은 난민, 정신 이상자들이 그 예에 해당합니다. 즉 면역학적 시대에서 그들은 부정의 대상이며, 우리는 그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율에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2. 신경증적 시대


하지만 오늘날 현대 사회는 이러한 규율사회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세계화라는 전지구적 현상과 더불어 나와 다른 타자도 포용하고 끌어안는 정신이 발전했기 때문이죠. 실제로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점점 더 동성애를 찬성하는 추세에 있으며, 정신이상자들 역시 그저 치료의 대상일 뿐 공포의 대상으로 취급되진 않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보다 새로운 분석틀을 제시하는데요. 그것이 바로 긍정의 과잉입니다. 앞서 소개한 면역학적 시대가 ‘~해서는 안 된다’라는 부정성을 규율로 삼았다면, 현대 사회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을 구호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누구나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다거나, 성실히 노력하면 누구든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죠. 게다가 미디어를 통해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 스토리는 우리로 하여금 ‘나도 할 수 있다’는 꿈을 갖게 만드는 데 일조합니다. 즉 현대인은 세상이 광고하는 무한한 긍정을 믿은 채 자기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묵묵히 일터로 나아간다는 거죠. 하지만 과연 그들이 모두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러한 사람은 무척이나 소수에 속할 겁니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세상의 유혹은 단지 가능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죠. 일례로 한 유명한 영어 교육 기업의 광고 카피는 누구나 영어로 말할 수 있다고 유혹하지만 우리 주변에 영어 잘하는 사람이 그리 많던가요? 그렇지 않죠. 이처럼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을 긍정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저자는 바로 여기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할 수 있다’라는 주문을 마약처럼 먹고 자란 현대인은 ‘할 수 없다’라는 선택지 자체를 박탈당했다는 사실 말이죠.

즉 현대인은 ‘할 수 있다’라는 시대의 구호가 사실은 틀렸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존재이며, 혹여나 실패한다면 그저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음을 자책할 뿐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된다면 눈을 감고 상상해볼까요.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데 자꾸만 힘내라고, 나는 해낼 수 있을 거라며 나의 가능성을 무한히 긍정하는 주변 지인들을 말입니다. 과연 그것은 응원일까요, 폭력일까요.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긍정도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말이죠. 그는 이것을 긍정성의 폭력, 혹은 내재성의 테러리즘이라 말합니다. ‘할 수 있다’는 긍정의 선택지만 존재하는 사회에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단지 낙오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죠. 따라서 현대인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착취합니다. 할 수 없다는 선택지라도 있다면 포기하고 휴식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현대인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긍정만 난무하기 때문이죠. 현대인이 우울증과 번아웃 증후군 등 각종 신경성 질환을 달고 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즉 현대 사회는 긍정으로 도배된 신경증적 시대인 동시에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사람들의 허무한 노력만 난무하는 성과 사회라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성과 사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사색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도무지 할 수 있다는 강박적인 긍정성에만 사로잡힌 나머지 생산적이지 않은 활동에는 지독할 정도로 야박한 사회가 되어 버린 거죠.








이상으로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간단히 정리해봤습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성과사회가 무너진 다음 도래할 새로운 사회 모습으로 피로사회를 소개합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피로란 무위의 피로,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부정의 피로를 가리키는데요. 이는 오늘날 현대인이 일터에서 호소하는 일상적인 피로하고는 상당히 다른 개념입니다. 가령 업무에 지친 직장인이 휴가를 얻어 여행을 다녀왔다고 생각해볼까요? 여행지에 도착한 그는 그간 업무로 쌓인 피로를 회복할 수 있다며 만족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다시금 회사로 돌아가 예전처럼 열심히 노동할 뿐이죠. 이 경우 여행은 회사에서 일할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뿐이 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는 성과 사회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 불완전한 휴식이며, 좀 더 엄밀히 말한다면 단지 노동할 에너지를 비축하는 노동의 일부일 지도 모르죠. 저자가 말하는 피로는 이 같은 현대인의 피로가 아닙니다. 그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피로는 ‘할 수 없음’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의 피로를 말합니다. 즉 ‘할 수 있다’는 명제만이 진리로 통용되는 사회에서 할 수 없는 존재도 긍정할 수 있는 피로를 말하죠. 쉽게 말해 저자는 우리에게 성과 사회라는 사회 전체에 대하여 근원적인 피로를 느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성취하는 존재만을 긍정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수많은 낙오자와 우울증 환자가 끊임없이 속출할 거라고 진단하는 거죠. 저자의 말 대로 우리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성취감을 통해 커다란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성취 그 자체가 인간의 존재 이유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대학에 떨어졌다고 해서, 혹은 몇 년 째 취업에 실패했다고 해서, 혹은 가슴 아픈 이별을 겪었다고 해서 삶을 포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동시에 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니 말이죠. 아무쪼록 성취하는 존재만 긍정하는 성과 사회의 논리에 굴복 당하지 않으시길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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