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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an 03. 2021

결혼이라는, 노동의 결실

『필리스와 로자먼드』, 버지니아 울프


사랑하는 남편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 한 장을 남긴 그녀는 그 길로 강가로 저벅 걸어갔다. 잔뜩 얼어 붙은 강물이 그녀의 시선 아래 고요히 그녀를 기다리는 듯 했고 잠시 후 그녀는 돌멩이를 호주머니에 가득 넣은 채 뛰어들었다. 풍덩. 찬란했던 한 사람의 생애를 장식하는 마지막 의성어로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아아,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였다. 어쩌면 그녀는 작품의 명성보다도 그녀 자신의 비극적 생애로 더 잘 알려져 있을지 모르겠다.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의 그녀는 일찍부터 정신질환의 그늘 아래 시달리며, 따사롭고 건강한 삶의 바깥을 부유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그녀의 남편 레너드 울프가 기꺼이 그녀에게 태양이 되어 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의붓오빠로부터 성폭행을 심하게 당한 그녀는 남자를 불신했고, 성을 혐오했으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몸을 죄의식의 방아쇠로 여겼다. 따라서 남편 레너드 울프는 그녀의 상처를 공감해주었고 둘은 성관계 없는 결혼 생활에 동의하여 우정과 사랑 그 사이의 어딘가에 차분히 안착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양이 아무리 뜨거운들 뒤돌아 선 사람 앞에 늘어서는 건 길다란 그림자 뿐이지 않던가. 그녀는 끝내 레너드 울프라는 커다란 태양으로도 위로 받지 못할 그늘을 품은 채 차가운 강물로 뛰어든 것이다. 스스로 태양이 되기 위해.






오늘날 많은 이들은 버지니아 울프를 여성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하곤 한다. 남성 중심의 내러티브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비로소 여성을 문학의 중심으로 끌어왔던 것이다. 그녀는 여성의 억압 당한 자율성에 의문을 표하지 않는 지성계에 반발했다. 왜 여성은 원치 않는 남자와의 정략적 결혼에 순종해야 하며, 관습과 전통을 학습하는 데 열성을 다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첫 단편작 『필리스와 로자몬드』는 앞으로 펼쳐질 그녀의 작품 세계에 대한 짧은 예고편이자 커다란 신호탄이다. 작품에서 그녀는 자율성이 박탈 당한 여성들의 일상, 하지만 그것을 이내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아니, 숙명이고 말고를 논할 필요도 없이 그것을 당연한 삶의 방식이라 여기는, 이른바 '체념 당한' 여성들의 삶을 담담하고도 건조한 필치로 묘사한다.





부유하고 체면이 있고, 공직에 있는 부모를 둔 젊은 여성들은 사실 아주 흔하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같은 문제에 부딪힐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찾아내는 해답 또한 그리 다양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녀가 서두에서 제기하는 많은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부딪히는 '같은 문제'란 다름 아닌 결혼을 가리킨다. 20세기 여성들에게 결혼이란 사랑이나 운명 따위의 낭만적 정서보단 부모의 말에 응당 따라야 할 자녀로서의 의무감, 혹은 도태되지 않기 위한 생존 전략 따위에 지나지 않았다. 좀 더 가혹하게 말해 그들은 결혼하기 위해 태어났고, '잘' 결혼하기 위해 길러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찾아내는 해답'이 다양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침내 '잘 결혼하는 것'을 자기 자신의 소망으로 삼기에 그칠 테니.








작중 필리스와 로자먼드는 윌리엄 히버트의 다섯 딸 중 유독 부모의 말에 잘 따르는 '가정적인 딸'로 외모는 '둘 다 예쁘고 볼에 화색이 돌며' '일생 동안 터키 융단보다 거친 바닥을 밟아본 일이 없고 안락의자나 소파보다 딱딱한 곳에 몸을 기대본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쉽게 말해 그들은 부모로 상징되는 '관습'에 순종적으로 따르는 순한 양 같다고나 할까. 아니, 사실 그들은 양이라고 하기엔 사납고, 늑대라고 하기엔 순하다. 그들은 최상의 신랑감을 효과적으로 포획하기 위해 기꺼이 사나운 늑대여야 하며, 또한 훌륭한 신랑감을 찾는 것만이 그들의 목표라는 데 회의를 가져선 안 된다는 점에서 순한 양이어야 한다. 즉 그들은 결혼 시장의 탁월한 포식자가 되도록 길러진 늑대이자 양인 것이다. 이를 표현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표현이 무척이나 구슬프다.

그들의 모든 동작과 말이, 응접실이 그들의 타고난 활동 무대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분명히 응접실에서, 어릴 적부터 훈련 받아온 특기를 펼쳤다. 어쩌면 그들은 응접실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들의 밥값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필리스와 로자먼드가 가정에서 배운 생활 양식들, 혹은 예절과 태도 등은 오로지 '잘 결혼하기 위함' 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 그들에게 응접실은 사람과 사람의 인격적인 관계가 꽃피우는 삶의 터전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인생 최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쟁터였다. 그들이 응접실에서 펼쳐보이는 그들의 '매력(?)'은 전장에 나선 장수들의 칼부림과 꼭 같다. 그들은 쟁취해야 했고, 승리해야 한다.


응접실에서의 광경은 그들이 즐기며 노는 장면이 아니고 그들이 일하는 장면이다.


필리스의 암묵적인 짝은 미들턴이라는 사람이다. 그녀는 미들턴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집에서 정해준 사람을 거절하는 것, 그것도 설레지 않는다는 말 따위의 감정적인 이유를 내세울 순 없었다. 그녀는 결혼하도록 길러진 20세기 여성이 아니던가. 필리스와 로자먼드가 나눈 대화를 들여다 보자.


"언니, 그 사람, 마음에 들어?"
"전혀."
"그와 결혼할 수 있어?"
"엄마가 시키면 해야지."






필리스는 결혼 행위의 진지한 동기를 고민할 수 없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그런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다. 아니, 그에 앞서 부모가 그녀에게 그러한 권한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어서 그녀는 스스로의 '권한 없음'을 인정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결혼하도록 길러진 존재이기를 인정해버린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필리스와 로자먼드』를 프로이트적 관점으로 독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억압된 욕망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층위에 켜켜이 쌓이는 법이다. 즉 필리스 그녀 자신이 포기한 사랑에 대한 낭만적 열정이라든가, 혹은 자유에 대한 본능적 갈망은 결코 고갈되지 않은 채 그녀의 무의식에 남았을 거란 말이다. 이는 잠시 후 필리스가 '서민 주거지역'으로 들어서며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필리스는 평범한 사람들의 대화에 도무지 참여할 수가 없었다. 필리스의 지성을 가득 채운 그녀 가문의 가정 교육에는 결여되어 있던 열정과 생기가 서민들에겐 가득했던 것이다. 필리스는 빠르게 정답을 익히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 효율적인 학습에 익숙했지만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토론은 격렬한 이의제기와 솔직한 의견 피력의 현장이었다. 그들은 케케묵은 형식적 담론을 넘어서 실제와 본질을 논의했다. 필리스의 지식은 관습적이고 전통적이며 도전 받을 수 없는 따위의 것이었던 데 반해 그들의 지식은 실용적이고 생성적이며 깨어지기 위해 탄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필리스는 벙찐 표정으로 가만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실비아라는 여자가 필리스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실비아는 필리스의 당황한 표정을 금새 읽고는 대답하기 쉬운 가벼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마치 프로이트의 자유연상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프로이트는 환자가 의식적으로 잘 대답해낼 수 있는 질문을 무수히 던지고 그 질문에 딸린 대답들을 구슬처럼 꿰내어 마침내 환자의 무의식적 욕망을 읽어내지 않았던가. 필리스 역시 실비아의 연쇄적인 질문 속에서 마침내 자신이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여기서 기대할 수 있는 낭만적인 결말이란 자유에 대한 갈망을 깨달은 필리스가 부모님의 구속으로부터 탈출하여 집을 나서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현실 인식은 그보다 서글펐다. 필리스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에게 부과된 딸로서의 의무, 혹은 시대가 그에게 짊어준 의무를 '다행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되뇌인다.


그날 밤 그녀의 마지막 생각은 히버트 경 부인이 그녀에게 그 이튿날 일거리를 잔뜩 지워놓은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강에서 보트 놀이를 하는 파티는 유쾌한 것이니까.



필리스에게서 언뜻 푸코의 메시지가 읽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회 담론을 내면화 한 그녀가 마침내 담론의 생성물을 넘어서 담론의 생산자로 도약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지 않는다. 결혼하도록 길러진 것은 그녀의 사명이고 그녀는 기꺼이 사명을 감수하고자 한다. 20세기 여성에게 자율성이라는 관념은 그저 백일몽에 지지 않는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냉엄하리 만치 현실적인 서사가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스스로 행복하다 여기는 만큼, 딱 그만큼 불행한 존재가 된 것이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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