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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Dec 26. 2020

섹스하지 않는 척하는 시대

『채털리 부인의 연인』, D.H.로렌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정체성』을 빌려 말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은 비개인적이다." 예컨대 거울 앞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코를 후비는 모습이라든가, 급히 바지를 내리고 용변을 해결하는 순간, 혹은 우스꽝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연인과의 섹스에 잔뜩 몰입한 장면 등을 떠올려 보라. 이처럼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지극히 사적이고도 은밀한 우리의 '개인적인' 시간들은 만인이 수행하는 '비개인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위선은 여기서 시작된다. 결코 개인적일 수 없는 순간을 비개인적인 것인 양 취급하는 허위 말이다. 난 결코 너희와 같지 않다고 짖어대는 허세 말이다. 이는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영화에서 동익(이선균 분)은 자신의 차에서 여성용 팬티 한 장을 발견한다. 이를 근거로 동익은 자신의 운전기사가 동익의 차에서 몰래 섹스를 했다고 추측한다. 심지어 동익은 운전기사와 팬티 주인이 마약을 흡입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팬티 주인이 제정신을 잃어 깜빡 팬티를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생각 끝에 기분이 잔뜩 더러워진 동익은 아내 연교(조여정 분)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연교는 그들의 '더러운' 페티쉬에 입을 틀어막으며 얼른 위생장갑을 끼고 문제의 팬티를 처리한다. 그리고 잠시 후 거실 소파에 나란히 누운 동익과 연교는 방금 전 그들이 더럽다 여긴 페티쉬와 마약을 운운하며 그들 섹스의 흥분제로 삼는다. 즉 그들은 타인의 '개인적인' 순간에 대하여 표면적으론 한발 뒤로 물러서 조롱하고 혐오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들의 내밀한 시간 속에서 타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순간은 결국 비개인적으로 공유된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기생충>의 동익/연교처럼 모든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한발 물러선 이들, 이른바 '섹스하지 않는 척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발로 독해될 수 있다. 나아가 이 책은 육체를 부끄러워 하는 이들, 심지어 그것을 경시하는 이들의 위선적 고상함이 인간의 생명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가에 대한 폭로가 될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귀족 가문의 클리퍼드 채털리 경은 전쟁 중 부상을 입고 채털리 가문의 저택 랙비(Ragby)로 돌아온다. 그의 부상은 자못 심각했다. 하반신 전체가 마비되어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그의 아내 콘스탄스 채털리(이른바 채털리 부인)는 남편 클리퍼드를 지극히 간호하여 챙겼다. 제 몸도 못 가누는 클리퍼드에게 아내 콘스탄스의 도움은 가히 절대적이었으리라. 특히 그녀는 클리퍼드의 소설 창작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클리퍼드의 이야기를 대단히 집중해서 들어주었고, 아주 섬세하고 예리하게 반응해 주었다. 육체의 반죽음을 선고 받은 클리퍼드는 콘스탄스 덕에 정신적 삶이라도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클리퍼드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육체라는 것이 본래 하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보다 숭고한 삶의 세계는 정신 세계에 펼쳐져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체가 거추장스러운 것임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뭐 하기는, 여자는 정신생활에서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클리퍼드에게 육체란 그저 욕망의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의 몸 속엔 빅토리아 시대의 엄숙주의, 이른바 디코럼(decorum)이라 불리는 예절 강박의 피가 뜨겁게 흐르고 있었던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콘스탄스는 남편 클리퍼드의 정신우월주의에 지쳐간다. 육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감각적인 것, 쾌락적인 것, 현실적인 것에 대한 부정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클리퍼드는 섹스를 할 능력이 상실된 인물이긴 하다. 애초에 그는 '마비된' 존재이지 않던가. 하지만 이는 로렌스의 재치가 가미된 '이중 조롱'으로 기능할 수 있다. 만약 클리퍼드가 하반신 불구가 아니었더라도 그는 섹스를 중시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렌스는 클리퍼드로 대변되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들, 즉 보편적--쿤데라식으로 말하자면 비개인적--욕망을 부정하는 인물들이 실상 마비된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발랄하게 폭로하는 것이다.






콘스탄스는 점차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깨닫게 된다. 본래 육체를 부정하는 이와의 사랑은 접촉의 부재로 이어지는 법이지 않던가. 이윽고 콘스탄스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저만의 방편으로 숲으로 산책을 나선다. 이는 작가 로렌스의 생명주의적 가치관이 담긴 대목이 아닐 수 없으리라. 잘 알려져 있듯 로렌스는 생명을 찬양하는 작가다. 그의 사상을 한 단어로 줄여 '생명주의'라 부를 정도이다. 그가 말하는 생명이란 자신의 개성을 있는 힘껏 뽐내는 에너지 그 자체이다. 약동하는 활력이자 활발발한 열정, 타오르는 생명력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숲은 생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콘스탄스의 눈에 비친 숲은 꿩이 새끼를 낳고, 만발한 히아신스 꽃이 뜨거운 태양과 기싸움을 벌이는, 그야말로 약동하는 생명의 밭이지 않던가. 따라서 그녀가 숲에서 만난 산지기 멜러스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숲을 지키는 산지기 멜러스는 그 자체로 생명이자 생명력이었던 것이다. 멜러스는 이제껏 콘스탄스의 육체의 욕망을 억압했던 남편 클로필드가 도무지 채워줄 수 없었던 그 생명력을 채워준다. 콘스탄스는 멜러스를 통해 다시금 태어나게 된 것이다. 육체로서 말이다. 내밀한 욕망을 인정하는 솔직한 여인으로서 말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섹스를 소중히 여기는 순결한 여인으로서 말이다. 과연 그녀의 속마음이 어떤지, 조금 길지만 읽어보자.


예전의 그녀라면, 여자는 수치심을 느끼면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로 수치심이 죽어버린 것이었다. 수치심, 즉 그것은 공포이다. 깊은 내부의 기관에 대한 수치심, 우리 인간의 근저에 숨어 있는 까마득한 옛날부터의 신체상의 공포. 그것은 육욕의 불길에 의해서만 몰아낼 수 있는 것으로, 지금 마침내 그것은 남자의 남근에 의한 추구에 의해 숨어 있던 장소에서 발견되어 추방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자신이라는 밀림의 깊은 내부 속으로 헤집고 들어가 있었다. 그때 자신의 본성이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는 걸 느끼고, 자신은 본질적으로 정숙하지 못하고 수치심을 모르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알몸으로, 부끄러움도 없이 관능의 화신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승리감 속에서 기쁨을 느꼈다. 그것은 거의 자만에 가까웠다. 그렇다! 그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었다! 그것이 자아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속이거나 부끄러워할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가리고 숨겨야 할 국부를 한 남자와 공유한 것이다, 다른 여자가 되어.



살아있는 존재는 욕망한다. 욕망은 생명의 증거이며, 생명은 욕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는 욕망을 부끄러이 여겼다. 섹스에 대한 욕망, 분노하고 싶은 욕망, 솔직하고 싶은 욕망을 부끄러이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마치 욕망이 없는 것처럼, 마치 감정이 없는 것처럼. 그들은 사회적으로 용인된 도덕적 코드 속에서 단지 '해야 하는' 행동만 했다. 입어야 하는 옷, 지어야 하는 표정, 사용할 수 있는 어휘 등은 칼같이 정해져 있었다. 예의범절에 대한 강박 속에서 그들은 더없는 신사숙녀가 되길 바랐고, 그들의 소망이 성공할수록 그들의 욕망은 억압되었다.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 속에서 그들은 정신을 택했던 것이다. 콘스탄스의 속마음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터져나온 울분이었다. 그녀가 마침내 느끼게 된 생명의 본질은 단지 생명에 내재한 생명력에 솔직해지는 것 뿐이었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녀는 전과는 '다른 여자'가 된 것이다.




머지않아 그녀는 멜러스의 아이를 임신한다. 하반신 불구였던 남편 클로필드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다. 생명이란 정신이 아닌 육체에 속한다는 로렌스의 강력한 암시이다. 콘스탄스는 이제 용기가 생겼다. 사랑하는 멜러스와의 확신, 뱃속에 가득한 생명력의 증거. 이제 그녀는 무기력한 허위의 세계 랙비를 떠날 일만 남았다. 그런 그녀에게 클로필드는 말한다.


“이 랙비에서 이 생활의 질서가 뒤죽박죽이 되고 일상생활의 품위가 파괴되는 건, 나에게는 죽음처럼 괴로운 일이오. 그것도 단지 당신의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말이오.”



여전히 정신 세계를 헤엄치는 클로필드는 단지 자신의 디코럼이 파괴되었다는 사실만이 괴로웠던 것이다. 덕분에 콘스탄스는 그를 떠나는 게 그리 힘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육체와 정신의 세계, 즉 진실과 허위의 세계 말이다.




로렌스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작가로 유명하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는 영적인 것만 중시하고 육적인 것을 부정하는 허위의 종교였다. 예컨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예수는 성모 마리아가 처녀 잉태하여 낳은 인물이다. 다시 말해 예수는 인간과 인간의 성관계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한 처녀가 성령의 도움 속에서 홀로 낳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를 육이 아닌 영으로 태어난 존재로 묘사하는 배경 속엔 육적인 관계에 대한 열등함이 전제되어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부정하는 처사인 것이다. 로렌스는 이것이 무척 불만이었다. 초목에 피어난 꽃에서 열매만 떼어내고 뿌리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정신의 허위를 고발하기로 한다. 오랫동안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한 육체에게 정당한 몫을 찾아주려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렌스의 소설이 결국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건 매우 타당한 결과이다. 그가 보기에 문명은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육체를 억압하고 옥죄는 고문 기계였으니 말이다. 이 지점에서 로렌스의 사상은 니체의 철학과 조우한다. 인간은 개인의 도덕이 아닌 사회의 도덕을 익힘으로써 이른바 도덕 권력의 시녀가 될 수 밖에 없는 법이다. 하지만 동시에 로렌스의 사상은 니체의 철학과 헤어진다.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 자기 자신의 도덕적 주인이 될 것을 권고했으나 로렌스는 육체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정신을 포기했던 것이다. 난 천성적으로 이중택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중택일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선과 악의 구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진보와 보수, 육체와 정신, 이성과 감성 등등이 그렇다.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는 말은 다른 하나를 포기한다는 말의 동어반복이이기 마련이다. 육체를 선택한다는 말은 정신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라는 것이 어디 생동하는 육체에만 깃드는 것이던가.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꿈을 꿀 수 있는 존재여야 하지 않겠는가.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로 외설이라는 시비에 평생 시달려야 했다. 로렌스는 억울했다. 아니, 황당했다. 그는 성과 포르노그라피가 아예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렌스가 보기에 성은 포르노의 희생양이었다. 성은 떨리는 생명의 약동을 두 사람이 온몸으로 체험하는 육체적 감동이지만, 포르노는 쾌락의 쾌락을 위한 '무분별한 섹스'의 갈래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과 육체에서 쾌락만 떼어낸 것이다. 혹은 쾌락이라는 관념으로 성과 육체라는 재료를 포르노로 빚어낸 것이다. 이로써 인간의 육체가 더럽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즉 더러운 육체란 존재하지 않고 육체를 더럽게 여기는 인간의 정신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강신주 작가는 그의 저서 『감정수업』에서 '당황'이라는 감정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선택했다. 그는 스피노자의 정의를 인용한다.


당황이라는 감정은 인간을 무감각하게 만들거나 동요하게 만들어 악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두려움이라고 정의된다. 무감각하게 된다는 것은 악을 피하려는 그의 욕망이 경이로움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요하게 된다는 것을 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악을 고려하는 소심함에 의해 제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강신주에 따르면 당황의 주체는 멜러즈다. 산지기 멜러즈는 클로필드 경에게 고용된 낮은 신분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신을 고용한 주인의 마나님의 관심을 받다니, 그는 당혹스러웠다. 예컨대 멜러즈는 콘스탄스의 사랑을 피할까 잠시 생각하기도 했지만 자꾸만 그녀에게로 향하는 마음 탓에 이내 무감각해졌고, 또 그녀를 피해 마을을 떠날까 잠시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 결과 닥쳐올 현실적인 피해에 마음이 약해져 이내 단념한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결국 자기 자신의 솔직한 마음, 그녀와의 사랑을 키워보기로 한 것이다. 즉 강신주가 말하는 '당황'의 정체는 의식적 욕망과 무의식적 욕망 사이의 갈등이 야기하는 긴장된 마음이라 할 수 있겠다. 이어서 그는 말한다. 만약 당신이 당황스러운 순간에 직면했다면 그때 당신이 따라야 할 것은 단연코 무의식적 욕망, 다시 말해 좀 더 솔직한 속마음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욕망을 의식적으로 검열하고 억압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억압된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 세계에 저장된다. 즉 인간의 의식은 육체의 욕망을 부끄러이 여기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로렌스가 말한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은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과 의식의 차원으로 연결된다. 정신을 좇아 의식적 욕망에 만족하는 척 위선하지 말고, 육체로부터 쫓겨난 무의식적 욕망에 솔직해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니 애써 외면할 필요 없다. 섹스를 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생명이 없는 생명은 없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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