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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Dec 14. 2020

죄의식의 정체성

『전락』, 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는 그의 역작 『이방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인간이란 어느 정도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과연 그의 말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말이다. 모름지기 생명이란 또다른 생명의 죽음 속에서만 간신히 유지될 수 있는 것 아니던가. 어느 누구도 다른 생명을 '먹지' 않고선 숨통을 이어갈 수가 없다. 하여 메를로 퐁티는 이른바 '최소 폭력'을 제안한다. 존재 자체가 폭력일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고, 다만 폭력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과정이 '참회'의 순간이다. 스스로가 '폭력적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 즉 나의 행동이, 나의 사상이, 나의 존재 자체가 외부 세계에 폭력 그 자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는 참회를 통해서 '조금 덜' 폭력적인 존재로 거듭나보자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카뮈의 작품 『전락』은 아직도 자기 자신이 '폭력적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 모든 이들에 대한 고발이다. 아울러 자기 자신에 대한 참회의 의무는 저버리고 오직 남을 심판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 위선적인 지식인들에 대한 고발이다. 또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예수의 말처럼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 하기 이전에 먼저 참회자가 되었느냐 하는 고발이다. 그 때문인지『전락』을 읽노라면 책 전반에 묻어나는 죄의식의 기류가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잘 읽은 것이다. 애초에 카뮈의 목표는 독자들로 하여금 죄의식을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었을 테니.








작품을 독해하는 것이 다소 까다롭긴 하지만 사실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한때 잘 나가는 변호사로 지내던 클라망스는 자기 자신의 삶에 무척이나 만족했던 인물이다. 다만 그는 세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살아간다. 피고를 변호하긴 했으나 자신의 커리어에 피해가 가지 않는 안전 거리를 항시 유지했으며,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돕는 일에도 선뜻 나섰으나 막상 그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진 않았다. 어쩌면 클라망스는 이른바 봉사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이 힘없는 자들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확인하길 즐기는 데 그쳤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처럼 무탈하던 클라망스의 삶에 어느날 큰 변화가 닥쳐온다. 늦은 밤 센 강을 지나는 중이었던 클라망스는 한 여자가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는 소실을 어렴풋이--그치만 확실하게--들은 것이다. 클라망스는 '달려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달려가진 않았다. 그저 '이미 늦었다. 너무 멀어...'라는 따위의 말을 속으로 되뇌며 조용히 집에 갔을 따름이다. 이후 클라망스는 자꾸만 어디선가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옴을 느낀다. 클라망스는 '전락'한 것이다. 변호사로서의 안정적이고도 교양 넘치는 허구의 삶에서, 죄의식으로 가득한 현실 세계로 말이다.








변호사로서의 클라망스의 삶이 평화로울 수 있었던 건 사실 그가 현실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클라망스는 비참하고 남루한 현실과 거리를 두며, 단지 자신이 임의로 그려낸 허상을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여인의 자살을 방조한 클라망스는 마침내 현실로 추락하고 만다. 허영과 위선으로 애써 외면한 현실로 말이다. 자기 심판의 과정, 이른바 참회의 과정을 통해 그는 비로소 현실을 직면하게 된 것이다. 물론 클라망스의 참회는 그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치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떠올리며 기독교도들이 눈물의 회개 기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클라망스의 참회는 온 사회적 참회의 방아쇠이길 카뮈는 기대했을 테니. 쉽게 말해, 카뮈는 우리에게 참회를 촉구하는 바이다. 예컨대 우리는 평화롭고 나른한 우리의 일상을 떠받치는 수많은 짓밟힘과 죽음의 곡조에 책임이 있을 지도 모르는 것 아니던가.








강신주는 클라망스의 태도 변화 속에서 회한을 읽어냈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그가 말하는 회한의 감정은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정의했던 바와 같다.



회한이란 희망에 어긋나게 일어난 과거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클라망스는 센 강에 뛰어내린 여인을 도와야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변호사로서 살아오던 그의 관성적 삶이 그의 두 발걸음을 놓아주지 않은 것이다. 이는 두고두고 클라망스에게 후회의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머지않아 그는 불쾌한 웃음소리의 환청을 듣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강신주는 클라망스 본인이 여인을 돕고자 희망했지만 이를 실천하지 못한 데 대한 회한의 결과라고 분석한다.




개인적으론『전락』 속에 드러난 클라망스의 주된 감정이 과연 강신주의 분석처럼 회한일까 하는 데 대해 의구심이 있다. 자고로 회한을 느끼는 당사자는 회한의 원인으로 작용한 사건의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그 감정이나 정서, 혹은 신념이 연속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금 어렵게 서술한 듯 하니 한 번 예를 들어보자. 예컨대 A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오늘 하루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매우 분주하게 일하는 중이다. 그런데 잠시후 시골에 계신 할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A가 보고싶다며 주말에 시골에 오면 안 되겠냐 물었다. 바쁜 A는 명절에 간다고 퉁명하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대충 끊고 다시 일에 집중한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그주 주말에 유명을 달리한다. 소식을 들은 A는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바로 이것이 회한이다. 뼈저린 후회를 안겨준 사건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며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려는 감정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A의 신념이 연속적인가 하는 부분을 생각해보자. A는 할머니의 죽음 소식을 듣기 전에도, 또한 할머니의 전화에 퉁명스럽게 답한 날에도 할머니를 사랑했다. 다만 조금 무심했을 뿐이다. 즉 그에게 회한이 허락될 수 있었던 건 사건의 전과 후 모두 A는 변함없이 할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할머니에 대한 A의 정서는 예나 지금이나 연속적이란 말이다. 하지만 클라망스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여인의 자살을 방조하기 전과 후 극명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었다. 사건을 겪기 전의 그는 세상과의 거리둠을 자랑스러운 생철학으로 여기는 인물이었으나, 사건 후의 그는 세상과의 거리둠을 부끄러이 여기는 인물이 되지 않았는가. 클라망스의 변화를 불러온 건 다름아닌 죄의식이다. 자기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이전의 삶과 미래의 삶--가능한 삶--을 비교할 수 있는 분석적 자아, 바로 그 틈에서 발생한 죄의식을 통해 클라망스는 지난 날을 참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센 강의 여인을 그대로 떠나보낸 클라망스가 그 순간을 회한의 순간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죄의식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해당하는 것이다. 죄책감 없는 사람의 진정한 반성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따라서 나에게 『전락』은 우리 모두에게 죄의식을 촉구하기 위한 카뮈의 고발로 독해된다.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반성할 수 없으며, 반성하지 않는 독단적 지식인은 자아도취적 구원자 콤플렉스에 빠져 자기 자신을 제외한 만인을 심판하는 데 여념 없으니 말이다. 작중 클라망스는 말한다.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율법없이 심판 받는 일입니다." 니체의 등장과 더불어 도덕이 무너져 버린 시대에 율법의 기준은 순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 대한 진정한 심판자도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비상한다고 착각하는 모든 이들의 전락을 꿈꾸는 카뮈의 작품이 오늘날 이리도 통렬할 수가.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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