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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Dec 05. 2020

사랑으로 승격되지 못한 감정

『초조한 마음』, 슈테판 츠바이크


우리의 일상은 크고 작은 연민들로 얼룩져 있다. 예컨대 거리의 남루한 행상인을 향한 당신의 측은한 눈빛과, 고작 70만원을 갚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으로 삶을 마감한 이를 보도하는 뉴스를 황급히 끄는 당신의 분주한 손, 혹은 세상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삶을 허덕이다 지친 거울 속의 당신 자신처럼 말이다. 이처럼 연민은 우리의 일상에 만연하다. 타인을 향한 연민, 계층을 향한 연민, 자기 자신을 향한 연민 등. 하지만 거기까지다. 연민의 주체는 결코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하기야 자기 연민과 자기애를 혼동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연민은 불행함에 대한 해결욕이지만, 사랑은 불행함마저 감내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연민은 그 심연 속에 아주 은밀한 위계 의식까지 품고 있다. 타인의 불행함을 안타까이 여기는 바로 그 관조적인 태도로부터 나는 저만큼 불행하지 않다는, 혹은 나에겐 저 사람을 도울 능력이 있다는 모종의 자부심을 확인하는 식이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의 소설 『초조한 마음』을 통해 앞서 언급한 연민의 심층을 깊이 들여보고자 시도했다. 심리소설의 대가라는 명성답게 그는 인간의 연민을 섬세하고도 예리하게 그려냈고, 따라서 연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독자들의 마음 속에 커다란 돌을 던지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독자의 몫은 돌덩이가 그려낸 파문 끝에 다시금 연민을 재정의하는 일 뿐이다. 당신에게 연민이란 무엇인가. 연민을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가.






소설의 주인공은 호프밀러라는 이름의 군 장교이다. 어렸을 적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호프밀러는 오직 경제적인 이유로 군에 입대하여 장교 생활을 시작한다. 군대에서 매일같이 무료하고 반복되는 나날을 보내던 호프밀러는 아주 우연한 기회로 그 지역 대부호 케케스팔바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된다. 정복 차림으로 잘 빼입은 호프밀러는 기쁜 마음으로 파티에 참석한다. 이윽고 파티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춤추는 시간이 시작되었고 호프밀러는 한 여인에게 춤을 추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그녀는 안색이 굳더니 이내 흥분하며 발작하기 시작했고 호프밀러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영문도 모르고 저택을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나중에 호프밀러가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춤을 추자고 제안한 여인이 케케스팔바의 딸 '에디트'라는 사실, 그리고 그녀는 일어설 수 없는 불구라는 사실이다. 죄책감이 밀려온 호프밀러는 그날 이후로 줄곧 케케스팔바의 저택에 방문하여 에디트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호프밀러는 행복해하는 에디트의 모습을 보며 그녀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비로소 안도감을 느낄 수 있던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을 통해 타인이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희미한 자부심을 느끼기까지 한다. 호프밀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남에게도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존재의 의미와 사명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프밀러의 공허한 연민 속에서 에디트는 남몰래 사랑을 꽃피우고 있었다. 호프밀러의 관심과 애정이 에디트에겐 사랑의 씨앗을 싹틔우는 따사로운 물과 다름없던 것이다.



그녀는 내가 피할 새도 없이 양손으로 내 관자놀이를 꽉 움켜쥐더니 내 입술을 자신의 이마에서 떼어내 입술로 가져갔다.


호프밀러는 에디트의 마음에 아연실색하며 그제서야 자기가 여태껏 베풀어온 하찮은 연민의 심각한 결과를 직면하게 되었다. 에디트를 향한 호프밀러의 연민은 책임감이 아닌 죄책감의 열매였던 것이다. 놀란 호프밀러는 에디트의 삶에서 서둘러 빠져나오기로 결심한다. 이처럼 연약한 인물 호프밀러에게 에디트의 주치의 콘도어 박사는 이야기한다.


연민이라는 것은 양날을 가졌답니다. 연민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손을 떼고, 특히 마음을 떼야 합니다.  (…)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서 잠시 콘도어라는 인물을 설명하자면 그는 자기희생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가난한 환자들을 무상으로 돌보며, 그 어떤 환자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의사적 소명이라 자신있게 말한다. 심지어 그가 결혼한 여인은 과거에 그가 치료하는 데 실패했던 맹인이다. 즉 콘도어에게 연민이란 고통에 처한 타인의 손을 잡고 고통으로부터 동반 탈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비록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지라도 그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였던 셈이다. 이로써 호프밀러의 연민은 그저 연약한 인간의 '초조한 마음'으로 콘도어의 희생과 대조를 이룬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호프밀러는 결국 연민 때문에 에디트와 약혼식을 거행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식을 마친 후 들른 술집에서 동료들이 약혼 사실을 따져묻자 그는 돈 때문에 불구와 결혼한다는 세간의 평판이 두려웠던 나머지 약혼 사실을 부인하고 만다. 이윽고 소식을 전해들은 에디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소설은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 소설 『초조한 마음』을 통해 츠바이크가 드러내고자 한 주제의식은 콘도어의 대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연민이라는 것은 양날을 가졌답니다. 연민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손을 떼고, 특히 마음을 떼야 합니다.  (…)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에 따르면 연민이란 감상적 연민과 창조적 연민으로 나뉜다. 감상적 연민이란 고통에 처한 타인을 직면했을 때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드는 미안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 하지만 그로부터 빠져나오고 싶은 탈출욕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복합적인 마음이다. 하여 감상적 연민의 주체가 베푸는 선의는 어딘가 공허하기 마련이다. 행동은 밖을 향하지만 실상 자기 자신에게 드러내는 자족적인 의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호프밀러가 에디트를 도우며 스스로 도취했던 그의 자부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프밀러는 에디트의 불행을 땔감삼아 도취적 연민에 스스로 불을 지폈던 셈이다. 반면 창조적 연민이란 타인의 비참한 최후까지 기꺼이 함께 하고자 하는 끈기와 의지를 필요로 한다. 예컨대 콘도어 박사가 치료하는 데 실패했던 환자와 결혼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츠바이크는 어설픈 연민이 도리어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아가 책임지지 못할 연민은 타인에게 칼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창조적 연민 역시 연민의 갈래에 지나지 않는다. 책임감으로 성사된 결혼의 당사자 아내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따라서 연민은 그것이 감상적 연민이건 창조적 연민이건 사랑으로 승격되지 못한 초조한 마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 논문에서는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을 심리적 시대소설로 해석하려고 시도했다. 예컨대 불구로 주저 앉은 에디트의 모습은 당시 온갖 병폐로 물든 오스트라이아의 정세를 반영하는가 하면, 나아가 군대의 명령 문화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호프밀러의 태도는 2차 대전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전 무기력한 국민들의 모습을 드러내며, 또한 위 본문에선 요약하지 않고 넘어갔으나 케케스팔바가 본디 대저택의 진짜 주인이었던 후작 부인으로부터 대저택을 빼앗는 과정의 묘사는 무능한 세습 귀족들의 자리를 자본가들이 꿰차는 모습에 대한 시대적 묘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는 연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연민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그의 말대로 연민의 기저는 슬픔이다. 이 점이 연민을 사랑과 이별하게 만든다. 무릇 사랑은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기쁨의 우물이 샘솟는 법이지만, 연민은 슬픔이 쇠함과 더불어 같이 증발하고 만다. 더욱 역설적인 점은 연민의 주체 스스로가 자신이 연민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 모종의 자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호프밀러가 에디트의 웃는 얼굴을 보며 만족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자학적 슬픔을 기저로 삼는 연민의 감정은 타인의 고통을 못 견뎌하는 심약한 마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외적 탈출구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이 은근히 자기 연민을 즐기는 꼴이 딱 그렇다. 그들이 느끼는 자기 연민은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고픈 의지와 스스로 자처한 자학적 슬픔의 조합이다.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의 주체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느끼는 일체감의 연민이다. 반면 호프밀러가 에디트에게 느낀 연민은 나의 삶과 그녀의 삶에 대한 철저한 거리두기로부터 가능했던 분리감의 연민이다. 분리감의 연민은 유약한 내면의 담지자가 즐기는 불건전한 취미에 지나진 않을까.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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