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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an 21. 2021

당신, 자유의 포로는 아닐테죠?

『여인의 초상』, 헨리 제임스


끔찍한 상상이 하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훌쩍 세월이 흐른 뒤 지긋한 노인이 되어버린 '나'가 지금의 '나'와 별반 다른 바 없는 존재일 거라는 상상, 그 어떤 지적 성숙이나, 혹은 욕망에 대한 통제력, 타인을 포용하는 아량, 절제와 솔선수범의 미덕 등 그 무엇 하나 발전 없는 존재일 거라는 상상, 즉 지금 모습 그대로 나이만 먹은 존재가 될 거라는 상상, 그리하여 손녀딸에게 그 흔한 지혜의 한 조각 조차 건네줄 수 없는 존재일 거라는 상상, 그것은 지극히 끔찍한 상상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모종의 발전을 이룬다. 아니, 변화라고 해야 맞을까. 삶의 지난한 궤적과 굴곡 속에서 크고 작은 풍파에 고스란히 노출된 우리 인생은 그 어떤 외고집의 인생일 지언정 조각되기 마련이다. 그렇다. 우리는 조각된다. 때로는 뜻하는 대로, 혹은 예기치 않은 대로 조각된다. 극심한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있던 인간도 그보다 짙은 회한의 무게를 호소할 때 비로소 삶으로 탈출한다. 제아무리 커다란 바위도 가벼운 빗방울의 꾸준함에 결국 살점을 내어주지 않던가.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렴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인간도 깎이고 깎이는 것이 인생이다. 깎이고 깎이는 인간의 하염없는 여정이 곧 인생이다. 그것이 우리의 초상이다. 이런 견지에서 헨리 제임스의 소설 『여인의 초상』은 이처럼 깎여져야만 하는 인간의 일생, 혹은 그 인생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빼곡이 담은 이야기가 아닐까 .







소설의 주인공은 빼어난 미모의 젊은 미국 아가씨, 이사벨 아처다. 이사벨은 부유한 이모 터쳇 부인의 권유로 이모와 함께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고, 이로써 소설의 돛은 미국주의와 유럽주의의 충돌을 예고하며 순항을 알린다. 유럽에서 그녀가 향한 곳은 영국에 자리한 이모부의 집, 이름하여 가든코트라 불리는 훌륭한 대저택이었다. 그곳의 주인이자 이사벨의 이모부 터쳇은 은행을 경영하여 큰 돈을 모은 영국인으로, 비록 귀족 계급은 아니지만 점잖고 지혜로운 노인이었으며, 그의 아들 랠프 터쳇은 하버드와 옥스퍼드를 졸업한 지성인으로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닌 인물이다. 다만 랠프는 갈수록 쇠약해지는 건강 탓에 도무지 일할 수 없는 인물이다. 뛰어난 지성과 탁월한 예술적 감각을 지녔음에도 육체의 쇠함에는 어느 누구도 저항할 순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하여 랠프는 가든코트에서 평화로이 지내며 요양하듯 지냈고, 따라서 이사벨의 등장은 무료했던 삶의 커다란 변주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머지않아 랠프는 사촌동생인 이사벨에게 묘한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사벨에게 호감을 느낀 건 그 뿐이 아니다. 랠프의 친구로서 이따금 가든코트에 방문하던 귀족 계급의 영국 신사 워버튼 경도 이사벨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 것이다. 그는 용기내어 이사벨에게 청혼을 했다. 이에 이사벨은 답했다.


“(당신과 결혼하면)정말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지만 다른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해요.”


이사벨은 한 해 수입이 수만 파운드에 달하는 영국 귀족의 청혼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후로도 워버튼은 재차 이사벨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윽고 소식을 전해 들은 랠프는 그녀에게 야릇한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너무나도 좋은 기회를 놓쳤다며 이사벨을 타박하는 그의 표정 속에 모종의 안도감이 풍겼던 것이다. 랠프는 이사벨을 위해 커다란 결단을 한다. 아버지 터쳇과 상의하여 랠프 몫에 해당하는 상당한 재산을 이사벨에게 떼어주기로 한 것이다. 이는 이사벨로 하여금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길 염원하는 랠프의 애정 어린 결단이었다. 얼마 후 터쳇은 죽었고, 이리하여 이사벨은 젊고 아름다우며 심지어 부유한 미국 여인이 된다.


이사벨에겐 친구가 있었다. 이름은 헨리에타 스택폴, 직업은 기자다. 그녀는 이사벨 만큼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이며, 또한 능력 있고 진취적인 여성이다. 이사벨을 따라 유럽으로 건너간 걸 보면 이사벨에 대한 애정도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녀는 이사벨이 마다하는 소원을 실현하고자 남몰래 애썼다. 캐스퍼 굿우드라는 이름의 미국 남성을 이사벨과 연결하려 한 것이다. 물론 캐스퍼 굿우드는 성공한 사업가였고, 외모도 준수했지만 이사벨은 이미 그의 고백을 거절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에타는 이사벨과 굿우드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부단히 뒤에서 애쓰곤 했던 것이다. 끝내 이사벨은 캐스퍼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했고 이로써 그녀는 훌륭한 두 남자의 고백을 거절하게 된 여인이 된다.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로 종속되길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자유를 바라 마지않던 이자벨의 삶에 마담 멀이 등장하며 균열의 조짐이 드리운다. 마담 멀은 어딘가 교양 있어 보이면서도 음침한 구석이 다분한 여성으로, 섣불리 규정하기 어려운 음험한 인물이다. 터쳇 부인과의 친분으로 가든코트에 방문한 마담 멀은 평소와 같이 피아노 연주에 빠져 있었고, 이사벨은 그런 마담 멀의 모습에 큰 매력과 호감을 느낀다. 이윽고 마담 멀은 이사벨에게 좋은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며 오스몬드를 소개한다. 가진 재산도, 대단한 명성도 없었던 오스몬드이지만 탁월한 예술적 안목 만큼은 괄목할 만한 남자였다. 이사벨은 어찌된 영문인지 이전의 남자들관 달리 오스몬드의 청혼에 승낙했고 둘은 부부가 되어 로마에 살림을 차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마담 멀의 은밀한 계략에 지나지 않았다. 오스몬드는 마담 멀의 과거 불륜남이었으며, 마담 멀은 오스몬드와의 관계에서 낳은 딸 팬지를 보다 부유한 환경에서 살아가게 만들고픈 바람으로 이사벨을 포획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마담 멀과 오스몬드의 협잡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둘은 그들의 딸 펜지를 워버튼 경과 혼인시키기 위해 이사벨을 종용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이사벨은 재물과 명예에 눈먼 오스몬드의 본색을 깨닫고는 크게 실의에 빠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때마침 영국으로부터 랠프의 죽음이 임박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이사벨은 곧바로 영국으로 건너간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녀와 오스몬드 사이에 잡음이 일긴 했으나 이미 오스몬드에게 크게 실망한 이사벨의 발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가든코트에 도착한 이사벨은 마침내 랠프에게 솔직하게 고백한다. 자신의 지난 생이 불행했으며, 랠프를 진심으로 아꼈다고 말이다. 그러나 랠프가 죽은 뒤 이사벨은 다시 로마로 돌아가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과연 그녀는 오스몬드에게로 돌아간 걸까?





맨 처음 기록할 만한 사건은 이사벨이 영국 신사 워버튼의 청혼을 거절한 사건이다. 생각해 보면 한 여자가 한 남자의 청혼을 거절한 것은 지극히 있음직한 사건이다. 따라서 이사벨이 워버튼의 청혼을 거절한 사건은 그건이 진정 사건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사건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에 의해 사건으로 격상한 것이다. 마치 '문제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어느 영화 대사와 비슷한 맥락이랄까.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 보자. 이사벨이 워버튼의 청혼을 거절한 사건을 터쳇 부인과 터쳇, 랠프 등은 왜 '문제' 삼았던 걸까? 여기엔 여성에 대한 시대적 요구 및 기대 사항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결혼은 유사 이래 여성의 마땅한 의무로 치부되지 않았던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만 보더라도 딸을 결혼 시장의 훌륭한 상품으로 일궈내려는 한 가족의 요란스러움을 금새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목표는 딸을 결혼시키는 것이 아니라 '잘' 결혼시키는 것, 즉 명망 있고 재산 많은 가문에 시집 보내는 것이었으며, 이후에 당면한 아내의 역할은 공적 영역에서 노동하고 돌아온 남편을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 잘 내조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여자는 여성이기를 포기하고 아내이기로 결심하는 것이 마땅한 미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사벨이 워버튼의 청혼을 거절한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사건'이다. 첫째는 워버튼의 배경이 대단했다는 것, 예컨대 그가 의회에 의석을 가진 귀족이며 또한 대단한 재산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이다. '잘' 결혼하는 것이 여성의 지상 목표처럼 여겨지던 시대에서 그러한 기회를 걷어차는 행위는 가히 사건이 아닐 수 없으리라. 둘째는 이사벨의 결심이 단지 한 사람의 청혼을 거절하는 일회적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자체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겠다고 단언했다. 이사벨은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분방한 여인이었으며, 따라서 결혼을 통해 그녀에게 부과되는 아내로서의 의무에 종속되고 싶지 않았다. 결혼은 그녀로 하여금 더 많은 삶의 기회를 빼앗을 것이고, 기회를 박탈 당한 초라한 여성의 초상이 되길 거부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신여성이다. 기존의 여성들이 체화환 시대적 담론, 쉽게 말해 '잘' 결혼하는 것을 자기 자신의 사명으로 내재화한 뭇 여성들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이사벨은 신여성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욱 중요한 두 번째 질문을 던져보자. 도대체 왜 그녀는 오스몬드의 청혼을 받아들였던 것일까?








이사벨의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 우린 먼저 인간 의식의 남루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어떠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가? 이에 대한 나름의 답을 우리 모두 갖고 있을 것이다. 예컨대 '나는 자유를 추구해', '나는 열정적인 사람이야', '나는 계획적인 사람이야' 등등. 그렇다면 다시 자문해 보자. 우리는 앞서 답한 것의 대척점에 선 가치를 결코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가령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종속되길 바라지 않으며, 열정적인 사람은 이따금 늘어지는 여흥에 좀처럼 흥미가 없으며, 계획적인 사람은 일말의 즉흥미도 거부한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의 실제는 각자의 의식 세계에서 스스로 자가 진단한 자기 인식보다 대단히 복잡하니 말이다. 이사벨 역시 마찬가지로 남루한 인간이다. 그녀는 자유를 추구하는 미국적 여인이었으나, 한편으론 구속에서 느끼는 안정감에 기대고 싶었을 지 모른다. 심지어는 그저 자유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자유라는 것이 참 묘한 관념이어서, 추구하는 순간 종속되고 마는 모순적인 속성이 있기 마련이다. 자유를 쫓으려는 순간 자유로워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잠시도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사벨은 결혼하지 않고 싶은 동시에 결혼하고 싶은 분열된 의식의 담지자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사벨로 하여금 자유를 추구하는 그녀의 정신을 섣불리 소거하진 말자. 적어도 그녀 스스로는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 그녀 자신의 솔직한 욕망이라 믿고 있으니 말이다. 독자들은 자유를 추구하는 이사벨의 정신을 살려 읽더라도 그녀가 워버튼이나 캐스퍼가 아닌 오즈먼드를 택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녀가 오즈먼드를 택할 수 있었던 건 적어도 주체자로서의 자유를 박탈 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지 모른다. 자명하게도 그녀에게 청혼한 두 남자 워버튼과 굿우드는 둘 다 매력적인 결혼 상대였다. 재산은 그 둘 매력의 공통분모였으며, 워버튼은 고전적인 형식미를 앞세운 영국 신사로서의 매력을, 굿우드는 자유롭고 분방한 미국적 매력을 풍기는 사내였다. 그러나 그러한 완벽미는 도리어 그녀로 하여금 채워줄 공간의 부재를 뜻하기도 했다. 뜨겁게 빛을 발하는 태양에 고작 전구 하나가 더해줄 빛이 없듯이, 자칫 이사벨은 완벽한 두 남자의 최종 목표, 즉 '훌륭한 아내' 역할로 그치게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던 것이다. 반면 오즈먼드는 달랐다. 별다른 재산도 없는 그는 이사벨이 채워줄 게 많은 상대였다. 심리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이사벨에게 자기효능감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탁월한 상대였던 것이다. 즉 이사벨은 결혼하기 싫지만 결혼하고 싶은 분열된 의식 속에서 그 둘을 무리 없이 통합할 수 있는 상대, 오즈먼드와의 결혼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헨리 제임스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건'을 인물의 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사건 그 자체를 서술하기 보다 사건에 대한 인물의 반응을 서술하길 즐겼던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인의 초상』은 이사벨이 겪는 사건을 통해 변화하는 그녀의 굴곡진 의식에 대한 서술이며, 바로 그 굴곡이 이사벨의 초상과 다름아니다. 몇가지 그녀의 굴곡을 되짚어 보자. 사건을 겪기 전 이사벨은 지극히 낭만적인 여성이었다. 지극히 자유를 추구했으며, 수없는 경험 속에 스스로를 던져 보이고 싶은 의욕이 충만한 여성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세상의 밝은 면만을 바라보길 소망했다는 점에서 순진한 여성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귀족 계급 워버튼 경의 청혼을 거절한다. 형식미로 대표되는 영국 신사, 즉 구세계의 전형을 향해 자유롭고 분방한 미국주의적 정신을 내뿜은 것이다. 이때 이사벨의 결정을 의아하게 여기는 주변 사람들과 이를 신경 쓰지 않는 이사벨의 내면 묘사는 현실적인 주변 사람들과 대조를 이루는 이사벨의 심리를 통해 그녀의 무구한 낭만성을 도드라지게 하는 기능을 한다. 아무튼 이 시기 이사벨은 현실 감각이 부재한 낭만적 의식을 자랑스레 여기는 인물이다. 그러나 훗날 그녀가 결혼하게 된 오즈먼드는 그녀의 낭만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예술가적 세계에 한껏 심취한 오즈먼드는 이사벨이란 그가 여태껏 모아왔던 수많은 수집품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헨리 제임스의 서술이 흥미롭다.


지금 그들 두 사람에게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자세, 반드시 알아야 되거나 알아서는 안 될 사람 등이 정해져 있었다. 마치 그림이 그려진 태피스트리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그녀는 장식된 존재로서 오즈먼드의 탐미적 안목을 더욱 영화롭게 보이도록 돕는 기능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토록 낭만적이었던 이사벨은 왜 오즈먼드와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왜 일찍이 청산하지 못했던 걸까. 바로 이 대목에서 자유를 향한 그녀의 허위의식이 드러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녀는 자유롭기 보다 자유로워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집안의 생활이 감옥 같다는 사실을 스스로 의식하면서도, 또한 오즈먼드의 딸 팬지가 수도원에서 감옥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그녀 자신을 향할 세간의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즉 이사벨은 이중의 구속에 속박되고 만다. 오즈먼드가 주체로 작용하는 집안에서의 구속과, 그녀 자신의 의식이 주체로 작용하는 세간으로부터의 구속, 따라서 그녀는 자유롭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해 가장 자유롭지 못한 포로로 살아가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서 이사벨은 그녀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랠프에게 솔직히 털어놓는다. 이는 외면적으론 결함이 있음에 대한 고백이며, 내면적으론 '결함이 없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즉 비로소 이사벨은 행복해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를 획득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그녀는 다시 로마로 돌아간 것일까. 그녀는 결국 운명에 굴복하여 시대가 요구한 아내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만 걸까. 이에 대한 학계의 해석이 분분하다. 일각에선 헨리 제임스는 반페미니스트이며 따라서 여성의 숙명적 굴복을 암시하는 거라 주장하며, 또 다른 이들은 팬지를 위해 돌아간 것이다, 혹은 돌아간 이후 오즈먼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절충적인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이에 대해 난 그녀가 더이상 낭만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에 로마로 돌아갈 수 있었을 거라 독해한다. 젊은 시절 오직 세상의 밝은 면에만 천착했던 그녀이지만 정작 그녀의 의식을 확장시킨 것은 세상의 어두운 면이 아니던가. 자유도 명암이 있는 법이며, 따사롭고 화창한 자유가 있는가 하면 어둡고 음침한 자유도 있는 것이다. 그녀는 어둠을 피해 밝은 세상으로 달아나는 것이 자유는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이사벨이 로마로 돌아가 다시 오즈먼드의 집에 가더라도 이를 자유에 대한 포기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자유로워 보여야 한다는 허위 의식에서 만큼은 자유로워졌으니 투쟁의 자유를 기대할 수 있지도 않을까. 이쯤에서 그녀의 깨달음에 깃든 대사는 참으로 감각적으로 읽히지 않을 수 없다.


오스먼드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는 구혼을 할 무렵에도 그녀처럼 본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사벨은 그의 본성의 반쪽만을 보았으며, 그것은 마치 지구의 그늘 때문에 일부가 가려진 달의 표면을 본 것과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만월(滿月), 즉 인간 전체를 보게 된 것이다.



비로소 그녀는 밝은 세상과 어두운 세상, 인생 전체를 보게 된 것이다.



메모한 구절들


이사벨이 대답해다. “내가 이모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모님이 누군가가 자기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시지 않기 때문이야. 이모님은 남들이 자기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아랑곳하지 않으시거든.”


“제가 응접실에 있었던 게 잘못인가요?” / “그렇고말고. 여기선 점잖은 집에서는 젊은 여자가 밤늦게까지 남자들과 함께 앉아 있는 법이 없어.” / “그 자리에서 제게 가르쳐 주신 건 당연해요. 이해하기 힘들지만 알게 되어 다행이에요.” / “언제든지 가르쳐 주마. 지나치게 나서는 일이 내 눈에 띌 때마다 말이야.” / “그렇게 해 주세요. 하지만 이모님의 충고가 항상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 “아무렴, 넌 자기 방식을 너무나 좋아하니까” / “맞아요, 전 제 방식을 무척 좋아해요. 그런데 해서는 안 될 일이 뭔지 항상 알고 싶어요.” / “네 마음대로 하려고?” / “선택을 하려고요.”


“워버튼 경은 매우 붙임성 있고 꽤나 훌륭한 청년이란다. 연수입이 10만 파운드나 되고, 이 작은 선나라에 그의 토지가 200제곱키로미터나 있으며, 그밖에도 많은 것을 소유했지. 집도 대여섯 채나 되고. 식탁에 내 자리가 있듯이 의회엔 그의 자리가 있어. 그리고 문학, 미술, 과학, 매력적인 젊은 여성 등 세련된 취미에도 관심이 많거든. 가장 세련된 건 새로운 견해에 대한 취미지. 이것은 굉장한 위안거리여서, 아마 젊은 여성은 제외하고는 다른 무엇보다 비중이 클 정도란다.”


그녀는 워버튼 경과 결혼할 수 없었다. 세상을 자유롭게 둘러보겠다는, 그녀가 여태 품어 왔고 당장 누릴 수 있는 기분 좋은 계획과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당신과 결혼하면)정말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지만 다른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해요.”

“하지만 전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난 예외적인 생활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어.’라고요.”

“무엇으로부터 당신을 분리한다는 거죠?”

“인생으로부터죠. 평범한 기회나 위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고통 받는 일로부터요.”

“아, 아처 양. 나는 삶 혹은 어떤 기회나 위험으로부터 당신을 해방하려는 게 아니랍니다. 사실은 정말 그러고 싶지만요! 도대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나요? 정말이지 나는 중국 황제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건 그저 편안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운명이에요. 평범한 운명 말입니다.”

“나 자신을 속박하지 않겠다는 소원에는 어떤 잘못도 없다고 생각해. 난 결혼을 통해 인생을 시작하고 싶지 않아. 여자가 할 수 있는 다른 일들도 많으니까.”

“충분한 수입만 있다면 생계 때문에 결혼할 필요가 없거든요. 그건 제가 막고 싶은 일이에요. 이사벨은 자유를 갈망한답니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자유로워질 거에요.”


마담 멀 “나 정도의 나이가 되면 모든 인간에겐 껍질이 있다는 것을 참작해야 한다는 걸 알게 돼요. 껍질이란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을 말하는 거예요. 이것으로부터 고립된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답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부속품들의 집합체 같은 거죠. ‘자아’라는 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 걸까요? 자아는 우리에게 붙어 있는 모든 것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다시 흘러나와요. 나는 나 자신의 대부분이 내가 골라 입는 옷에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물건’을 아주 소중히 여긴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개인의 자아는 자신을 스스로 표현한 것이거든요. 집이며 가구, 옷, 우리가 읽는 책, 사귀는 친구, 이 모든 것이 모두 자아를 표현하지요.”


워버튼 경의 청혼을 거절한 젊은 아가씨가 중년 홀아비에다 수상쩍은 딸이 있고 수입도 모호하며 이름도 없는 미국인 미술 애호가에게 만족한다는 것은 성공에 대한 터쳇 부인의 개념에 도저히 맞지 않았다.


지금 그들 두 사람에게는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자세, 반드시 알아야 되거나 알아서는 안 될 사람 등이 정해져 있었다. 마치 그림이 그려진 태피스트리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참고논문


여경우,『헨리 제임스 작품에 나타난 사랑』, 헨리제임스연구 창간호, 1996

유희석, 『헨리 제임스의 '국제주제'와 세계문학』, 영미문학연구, 2014

김향숙, 『'여인의 초상'에 나타난 진보적 여성』, 신영어영문학회 학술발표회 자료집, 2007

도현지, 『'여인의 초상' : 이사벨의 현실』, 신영어영문학회, 2012

고영란, 『이사벨의 인식의 성장과 서술기법』, 근대영미소설, 2013

윤조원, 『이자벨은 어디로? : <여인의 초상>의 행복/불행한 결말에 관하여』, 미국학논집, 2005

최정선, 『헨리제임스의 <여인의 초상>: 이자벨 아처의 선택과 결말의 해석문제』, 근대영미소설, 2007

민경택, 『<여인의 초상에 나타난 결혼과 여성의 정체성 추구 실패』, 호손과미국소설연구, 2005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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