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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an 24. 2021

소설, 어떻게 읽는지 아세요?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최시한


학창 시절, 소설을 시간 낭비라 여겼던 기억이 있다. 소설은 '가짜'라 믿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국어 교과서도 '소설은 있음직한 이야기를 상상적으로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라 가르쳤다. 하여 나는 감히 가짜에 마음 쏟을 여유가 없는 여느 바쁜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진짜 세계에 집중하기로 영리한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데미안』을 읽으며 한참을 깨졌다. 진짜와 가짜라는 간단한 구도로는 손쉽게 현실과 소설을 분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의심이 슬며시 나의 내면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점차 설득력 있는 구름이 내 안에 가득찼기 때문이다. 그렇다. 소설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 실은 나일지도 모른다는, 아니, 반드시 나라는 강렬한 심리적 추체험 속에서 소설은 현실로서 경험되고, 또 체험된다. 허구의 인물은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나'의 고뇌와 번민을 대리하는 인물로서 현현한다. 따라서 소설은 허구로 탄생했으나, 현실로 부활한다, 다만 섬세하고 예민한 독자에 의하여.


작가 최시한은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설은 다른 이야기 갈래에 비해 인간의 내면을 깊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온갖 사물과 영향을 주고받는 그 내면의 움직임을 독자 스스로, 정신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소설을 체험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독자라면 한 번 쯤 가볍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





1. 소설, 소설 읽기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진부한 답은 '현실에 있음직한 이야기를 상상하여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이라는 것다. 이는 우리가 학창시절부터 줄곧 들어온 소설의 보편적 정의이다. 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아니, 명확하지만 썩 유용하지 않다. 예컨대 사과의 정의와 비교해 볼까. 사과는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 낙엽교목의 식물인 사과나무의 열매로서 알칼리성 식품이며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동맥경화 예방에 효과적인 과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뭐, 이 장황한 설명 덕에 사과라는 과일이 입체적으로 이해되기라도 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싶다. 나에게 사과란 그저 '과일', 좀 보태면 '상큼한 과일', 딱 그 정도 설명으로 충분하다. 즉 논점은 사과의 정체를 분석하는 일이 아니라, 사과가 나에게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대상의 '정체'를 까발리기 앞서 대상의 가치에 '흥미'를 가져보자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면, 소설의 정의는 단지 '이야기'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마치 사과가 나에게 '상큼한' 과일인 것처럼--당신에게 소설이란 '어떤' 이야기이냐는 것이다. 책의 저자 최시한은 소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세상을 '이야기식'으로 파악하고 전달하기에, 이야기 행위는 삶 자체의 핵심을 이루며 그 갈래도 다양한다. 소설은 세상에 널려 있는 이 이야기의 한 갈래이다.




인간은 세상을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파악한다. 인간의 인지적 특성이다. 머릿속으로 혼자 뇌까리는 생각도, 타인과 벌이는 격렬한 논쟁도, 혹은 번화한 거리의 간판을 읽어내는 순간도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고 파악하다. 소설은 그러한 이야기의 한 갈래인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매우 특수한 형태이다. 왜냐하면 소설은 이야기를 다소 특별한 방식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방식을 '서술'이라 한다. 즉 소설은 '줄거리(이야기)'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갈래라 할 수 있다. 무릇 열정적인 작가라면 자신만의 창의적인 작법으로 줄거리를 서술하기 마련이다. 가령 결론을 먼저 서술하여 독자로 하여금 결론의 원인을 궁금하게 하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혹은 사건의 진행을 매우 천천히 서술하며 긴장감을 고조하는 식이다. 반면 독자는 서술된 소설을 읽어내며 그 안에 담긴 줄거리(이야기)를 정리해 나간다. 이 때 독자가 줄거리(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커다란 두 축은 '사건'과 '인물'이다. 어떤 사건이, 어떤 순서로, 또 어떤 인과 관계에 따라 발생하는 지 이해하는 과정을 수평적 독서라 하며, 인물이 왜 그런 사건을 저질렀는지, 그 과정에서 인물이 무엇을 느꼈을 지 공감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수직적 독서라 한다(다만 책의 저자 최시한은 이처럼 수직적 독서를 사건, 수평적 독서를 인물로 해석하는 것이 다소 거친 정의일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따라서 입체적인 독서란 수평적 독서와 수직적 독서를 둘 다 게을리 하지 않는 다면적 독서이다.


저자는 소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며 1장을 마무리한다.


소설은 인물과 사건을 가지고 가치 있는 무엇을 체험시키려는 것이지, 이미 정해진 무엇을 확인하고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무릇 탁월한 말이 그럿듯이, 좋은 소설은 기존의 관습과 규범이 억압한 것을 풀어놓고, 이기심과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가치를 추구하여, 독자를 자기 자신과 현실의 벌거벗은 모습에 직면하게 한다. 따라서 소설을 잘 읽는다는 것은, 정확하게 읽는다기보다 적절하고 깊이 있게, 또 다양하고 세련되게 읽는 것이며, 감동을 맛보면서 사물의 고갱이를 보는 눈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간의 궁극적인 숙제를 푸는 데 도움을 주는 지적이고 정서적인 활동이다.








2. 서술상황과 초점화



이야기를 맛있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른바 달변가라 불리우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평범한 소재의 이야기도 재밌게 변주하는 탁월한 능력으로 곧잘 친구들로부터 인기를 얻곤 한다. 이렇듯 이야기는 그것이 '무슨' 이야기이냐도 중요하지만 '누가' 들려주냐도 중요한 법이다.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서술자가 작중 인물 중 누구의 시선을 빌리냐에 따라 독자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손쉬운 예로 주요섭의『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제시한다. 해당 작품의 줄거리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옥희 어머니가 사랑 손님과 미묘한 정을 공유하되 사회적 인습에 의해 좌절하는 이야기로 서술자는 어린 딸 옥희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칫 눈살이 찌푸려질 수도 있는 어른의 사랑을 순수하고 무구한 아이의 시선을 빌려 보다 독자로 하여금 보다 부드러운 독해를 가능토록 한다. 만약 서술자가 옥희 어머니였다면 보다 독자는 전보다 훨씬 비극적인 여성의 삶을 독해했으리라. 하지만 작가는 주요섭의 그러한 시도--서술자를 옥희로 설정한 것--를 비판적으로 독해한다. 왜냐하면 남편을 잃은 아내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인습, 예컨대 남편을 따라 죽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붙은 미망인이라는 용어나, 혹은 삼종지도, 일부종사로 대변되는 남성중심 문화가 어린 옥희의 무구한 시선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즉 주요섭은 옥희 어머니가 사회적 인습에 굴복하여 사랑 손님과의 사랑을 단념하고 "엄마는 옥희 하나문 그뿐"이라 절규하는 장면을 통해 그것이 여성의 마땅한 삶인 것처럼 해석될 여지를 남겨 놓은 것이다. 이처럼 서술자는 작품 해석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니 만큼 독자도 이를 염두에 두고 예민한 독서를 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3~4. 사건



소설을 '잘' 읽기 위해 독자는 줄거리(이야기)를 정리하며 읽어야 한다. 물론 줄거리는 앞서 말했듯 사건과 인물의 총체이다. 따라서 독자가 정리해야 할 건 사건과 인물이다. 혹자들은 사건과 인물을 같은 범주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건의 주체는 늘 인물이며, 또한 인물은 사건을 통해 생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건은 인물이 저지를 행위로 규정되는 협의로서의 사건부터 시작하여 외부 세계에 대한 인물의 내적 반응과 심리, 혹은 정서와 같은 정신 세계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사건까지 그 범위가 넓다. 아울러 인물이란 그 어떤 사건도 겪지 않은 진공 상태의 존재로서 결코 사유될 수 없다. 따라서 소설을 읽는 독자는 사건과 인물을 통합적으로 이해하여 감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가령 '소년이 소녀가 기르는 닭을 때렸다'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해보자. 이때 독자는 소년의 외적 행위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저지른 소년의 내적 동기와 심리, 그에 대한 소녀의 반응, 닭의 상징 등을 총체적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사건을 기억할 거냐는 문제이다. 사실 소설에서 사건은 아주 넌지시 드러날 때도 많은 법이라 예민하지 않은 독자라면 그 중요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넘겨 읽기 십상이다.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다시 소설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되돌아가 보자. 앞서 언급했듯 소설은 '현실에서 있음직한 이야기를 상상하여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대체 왜 '허구적 이야기'라 불리우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설은 말 그대로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제아무리 고증에 철저한 역사소설일 지언정 '허구'이며, 작가의 상상에 의하여 재구성된 '재현된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설과 독자 사이엔 기묘한 관계가 형성된다. 소설은 작품 자체의 내재적인 논리를 따르고 독자는 현실 세계의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독서가 진행됨에 따라 독자는 현실 세계의 논리를 체화한 채 본인에게 익숙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소설 속 세계관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독자는 소설 속 허구적 진실을 통해 작품 밖의 현실 경험적 진실을 떠올리고, 또한 현실 경험적 진실을 통해 소설의 허구적 진실을 이해하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의 연쇄과정 속에서 독자는 작품에 동화되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설 읽기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문화와 이념, 사회현실 등을 체험으로 알며, 과연 무엇이 가치 있는 행위인가를 따지는 의식, 즉 가치의식을 기르는 것이다.



중요한 건 현실 경험적 질서와 허구적 질서 중 후자에 무게추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는 자신의 현실 경험적 질서를 토대로 작품을 속단해선 안 되며, 작가의 주제의식이 무엇인지 상상하며, 작가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건을 파악해야 한다. 즉 독자 본인의 현실 경험적 질서에서 중히 여겨지는 사건을 줄거리의 핵으로 둔다면 작가가 구성한 질서를 벗어나는 독서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훈련이 필요한 부분이다. 무엇이 중요한 사건이냐 하는 꾸준하고 진지한 관찰을 통해서 말이다. 한 가지 팁이 있다면 사건 그 자체를 주목하기보다 인물의 욕망과 감정에 집중하는 방법을 권한다. 즉 A라는 사건을 통해 한 인물의 욕망과 감정, 정서, 혹은 생각 및 계획이 바뀐다면, 쉽게 말해 사건 A가 한 인물에게 변화를 준다면, 그 변화의 크기 만큼이나 사건 A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작가의 주제의식은 작가가 중요하다 여긴 사건 속에 담기는 법이니 소설을 읽을 때 꼭 실습해 보길 권한다. 아울러 저자는 '소설 읽는 과정을, 하위의 작은 사건들을 상위의 중심사건에 수렴시키는 과정'이라 말한다. 따라서 독자는 작은 사건들과 중심사건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과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보다 유기적으로 소설을 독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플롯



작가는 소설을 쓰기 앞서 스스로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볼 것이다. '무엇을' 쓸 것이며, 또한 '어떻게' 쓸 것인지 말이다. 여기서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줄거리(사건이나 갈등, 주제의식을 함축한 한 편의 이야기)라면, '어떻게'에 대한 답이 '플롯'이라 할 수 있다. 저자 최시한은 플롯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플롯은 사건을 배열하고 결합하는 서술 원리이다.



앞서 우리는 소설을 '잘' 읽기 위해 하위사건과 중심사건이 무엇인지 상상하며 독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살펴봤다. 다행히도 작가는 독자의 수고를 줄여주기 위해 중심사건이 두드러지도록 사건의 순서를 재배치하거나, 혹은 정보의 양을 조절하곤 한다. 그러한 구성 과정 전체가 곧 플롯의 일환인 셈이다. 플롯에 대한 저자 최시한의 부연을 좀 더 살펴보자.


플롯이란 작자가 의미를 창출하고 정서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갈등을 제시하는 서술 원리, 즉 갈등의 전개에 따라 사건들을 배열하고 통합하여, 작품에 논리적/미적 질서를 형성하며, 독자의 정서를 북돋우는 원리라고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플롯은 작가 본인이 의도하는 효과를 구현하기 위한 서술 기법인 셈이다. 즉 줄거리에 담긴 주제의식을 최대로 '잘' 전달하기 위한 작가의 고안물이 곧 플롯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줄거리와 플롯의 결정적인 차이 중 한 가지는 바로 시간이다. 독자는 줄거리를 자연 시간적 관점에서 파악하지만, 플롯은 시간이 아닌 인과적 질서를 원리로 삼는다. 가령 '왕이 죽자 왕비도 죽었다'라는 서술은 줄거리인데 반해 '왕비가 죽었다. 알고 보니 그 이유는 왕이 죽은 슬픔 때문이었다.'라는 서술은 플롯이다. 전자는 자연 시간적 관점에서 파악되는 '이야기'이지만, 후자는 시간의 질서를 거스르고 인과적 효과에 주목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전달하고자 하는 줄거리의 질서를 파괴하고 변용함으로써 스스로가 의도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를 작법 용어로 '구성'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요소 혹은 부분들의 관계를 통일성 있게 짜는 행위 및 그 결과를 구성이라 한다. 구성이란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고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 소재들을 어떤 관점에서 변용하고 결합하여 작품을 완성하는 원리이자 그에 따른 행위이다.



좁은 의미에서 구성과 플롯은 혼용해서 사용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 다만 독자가 주의할 건 본인이 읽고 있는 소설에 어떤 플롯/구성이 활용되었는지, 또한 그에 따른 효과는 무엇인지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독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 최시한은 이러한 독자의 미덕을 보다 구체적으로 개괄하여 1) 거듭되는 의문, 2) 지속되는 기대라고 정리한다. 거듭되는 의문이란 작중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질문으로서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며, 인물은 어떤 마음일지, 하위사건들간의 관련성은 개연성이 충분한지 등을 묻는 태도이다. 반면 지속되는 기대란 작중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질문으로서 인물의 성격상 앞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그의 감정과 욕망이 변할지 등을 궁금해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의문과 기대 속에서 독자는 소설의 플롯이 유기적으로 연관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비판적으로 숙고할 수 있는 독해력을 갖게 될 것이다.


소설의 저자는 플롯을 구성함에 있어 시간 불일치와 정보 조절 전략을 택하곤 한다. 시간 불일치는 줄거리의 자연 시간적 질서를 필요에 따라 비트는 작법 전략을 가리키며, 정보 조절이란 독자에게 의도적으로 제한된 정보만 줌으로써 독자의 긴장감을 조절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뭐가 됐든 독자는 이러한 저자의 의도를 염두에 두고 플롯의 구성적 시도를 통해 줄거리 전달에 어떤 효과적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탐구하며 독해할 수 있어야겠다.






6~7. 시간과 공간



시간 개념에 대해 소설은 그림 예술과는 달리 좀 더 마술적 창조자가 될 가능성을 획득한다. 한 장의 그림은 액자 속에 고정된 시각적 이미지 한 컷으로 존재하는데 반해 소설의 창작자는 현실 경험적 시간을 파괴하는 기회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앞서 언급한 '5. 플롯' 개념과 중첩되는 대목이다. 플롯의 구성 전략 둘 중 하나가 바로 '시간의 불일치'이지 않았던가. 사실이 그렇다. 소설의 창작자는 자연적 시간 개념, 다시 말해 우리의 현실 경험적 시간 개념을 뒤트는 플롯 구성을 통해 독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쉽게 말해, 대중 독자가 소설을 읽으며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는 현실에서 감각하는 '경험세계의 시간'의 논리를 벗어난 '허구적 시간'을 소설 속에서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허구'라는 말을 혼동하여 앞서 말한 즐거움이 판타지 소설에만 국한된 것이라 오해하진 말자. '허구적 시간'이라 함은 선형적으로 나아가는 '경험세계의 시간'과 달리 소설의 창작자에 따라 무한 논리의 시간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예컨대 서머싯 몸의 소설 『인생의 베일』을 살펴보자. 소설의 첫 장면은 어느 오후 점심 때 키티와 찰스가 불륜을 즐기던 중 누군가 밖에서 방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돌리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키티와 찰스는 방문 밖에 선 의문의 사람이 키티의 남편일까 걱정하며 노심초사한다. 다행히 의문의 사람은 강제로 문을 열지 않고 떠난 듯 했으나 키티는 걱정되는 마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과연 그는 키티의 남편일까? 흥미롭게도--어쩌면 당연하게도--작가 서머싯 몸은 그 주인공의 정체를 곧바로 알려주지 않는다. 경험세계의 시간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사건이 일어난 당일 저녁 키티의 남편이 퇴근하고 그가 키티와 나누는 대화를 서술함으로써 독자의 긴장을 이완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작가는 돌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키티의 결혼이 이루어진 배경을 서술하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독자는 사건의 결말을 알지 못한 채 숨죽이고 키티의 사정을 살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소설의 플롯에서 발생하는 '허구적 시간' 질서를 다시금 현실의 '경험적 시간'으로 환원하여 이해하되, '허구적 시간'을 통해 의도한 작가의 효과를 상상하고 공감하여 독해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간을 묘사하는 데 있어 소설은 그 장르적 특성상 영화 만큼 노골적일 수 없다.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공간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영화와 달리 소설은 감각적인 서술을 통해 공간을 형상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소설의 한계라 특징지어질 수 없다. 소설을 통해 독자는 자기의 의식 세계에 허구적 세계를 마음껏 채색할 자유를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즉 작가는 독자에게 보다 생생한 색감을 안내하도록 친절함을 발휘하되, 각자의 의식 세계에 그림을 그리는 건 독자 본인인 셈이다. 이 책의 저자 최시한에 따르면 이것은 '영상 매체보다 언어 매체가 어린이의 상상력 발달에 더 도움이 된다는 주장'의 근거인 것이다.



또한 소설에서 공간은 상징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으므로 주의 깊은 독서가 필요한 대목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소설을 읽을 때 단지 인물의 '행위'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짙으나, 섬세한 독자라면 사건과 사물(공간과 인물)을 둘 다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이는 말이 쉽지, 실제 독서에서 수행하기엔 어려운 작업이다. 사건을 파악하는 건 그저 논리적 선후 관계에 따라 있는 그대로를 기억하는 비교적 단순한 지적 노동인데 반해 공간의 은유적/상징적 의미가 소설의 주제 의식과 맺는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의외로 많은 상식과 독해 훈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소설 읽기를 다층적으로 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사건 중심 읽기의 훈련에 먼저 열심히 임하는 것이 우선이라 말하고 싶다.



참고로 영화 <기생충>에서 상류층 인물에 속하는 동익(이선균 분)은 계단을 올라가는 상승적 이미지를 자주 보이는 데 반해 하류층 인물에 속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계단을 내려가는 하강적 이미지를 빈번히 연출한다. 비록 <기생충>은 영화이니 만큼 앞서 언급한 연출을 이미지를 통해 수행했으나 이 또한 소설로 옮긴다면 서술자의 관찰자 시점에 의한 서술로서 충분한 공간 묘사(를 통한 은유적 의미 전달)가 가능할 것이다.






8~9. 인물과 인물형상화


인물은 사건의 일부라는 주장이 있다. 행위하지 않는 진공 상태의 인물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인물을 상상한다면 그 인물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어리거나 노쇠하거나, 내국인이거나 외국인이거나, 아무튼 특정한 조건 속에서 상상되기 마련이다. 그러한 조건은 인물의 소극적 행위이자 특성으로서, 즉 '완전한 무위'의 인물은 상상될 수 없다는 설명이다. 또한 저자에 따르면 '작품 속에서 인물은, 특질들의 총체'이다. 여기서 말하는 특질이란 다른 인물과 구별되는 그만의 자질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들이 종합되어 욕망과 감정, 정서, 도덕관, 성격 등을 이루며, 그로써 완성된 인물을 독자는 평가하고 판단한다. 때로 창작자는 인물의 특질을 직접 '서술하기'도 하고, 혹은 인물의 행동을 통해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가 인물을 형상화하는, 쉽게 말해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속성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이름, 행동, 신분사항, 특질을 제시하는 공간소가 그것이다. 첫째로 인물의 이름은 때때로 커다란 메타포로 기능하기도 한다. 예컨대 영화 <반두비>에서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민서'인데, 그녀가 대변하는 남루하고 서글픈 애환의 삶은 곧 '서민'의 삶을 반영하는 바이기도 하다. 즉 '민서'는 '서민'의 뒤틀린 표현일 지도 모르는 것이다. 둘째로 행동이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다는 사실엔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성격이 행동의 원인이라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 일상에서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통해 상대의 성격을 규정한다.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행동은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실마리라 할 수 있다. 세번째는 신분사항이다. 신분사항은 곧 인물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며, 나아가 인물의 행동 반경을 제한하기도 한다. 인간이 환경적 존재라는 명제 아래 소설 속 인물 역시 스스로에게 규정 지어진 신분사항 만큼 그 만큼 자기다움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공간소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물 형상화에 흔히 사용되는 공간소는 인물의 생김새, 차림새, 그가 생활하는 방, 집, 거리, 풍경, 비나 눈 같은 기후 현상' 따위이다. 중요한 건 이들 종류를 달달 외우고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 인물에 공감하고 그들의 욕망과 감정에 같이 서러워하고 통쾌해할 수 있는 공명의 유대에 동참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저자 최시한은 '소설을 읽는 일은 체험을 풍부하게 하는 일이요, 값진 내면적 능력을 기르는 활동'이라 말했다. 아무쪼록 소설 읽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는 유쾌한 내적 여정에 떠나시기를 권면한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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