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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an 30. 2021

베일을 들출 자신 있나요?

『인생의 베일』, 서머싯 몸



사랑에 눈먼 인간의 아둔함이란 그 어찌나 박약하던가. 이른바 콩깍지라 불리는 그것, 즉 상대의 원본 그대로를 직시하지 못하게끔 막아서는 '마법의 베일'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실로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그러니 인간은 사랑하기에 콩깍지에 씌이는 것이 아니라, 콩깍지에 씌임으로써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베일이 차츰 벗겨지 뒤 우리는 원본의 조악함을 마주하곤 실색한다. 왜 내가 그 이를 자상하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를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 여겼을까 운운. 사랑에 있어 이 같은 베일의 효과는 사랑을 낭만적으로 구성하는 만큼이나 허구적이다. 상대에 대한 낭만적 환상과 기대가 실은 원본을 한껏 감춘 허구 위에 건설된 모래성이니 말이다. 중요한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진다. 상대의 원본을 깨달을 만큼 인식이 성장했을 때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지난 날 자신의 안목을 부끄러워하며 과감히 상대를 떠날 것인가, 혹은 진실에 가까워졌음을 기뻐하며 상대를 껴안을 것인가. 정답은 없다. 다만 인간은 과연 원본 그대로의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도대체 어떠한 원본을 소망하는지가 고민의 주제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건 베일 너머의 사람일까, 혹은 베일 그 자체일까. 베일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묻어나는 서머싯 몸의 책, 『인생의 베일』이다.






서머싯 몸은 『인생의 베일』의 영감을 단테의 『신곡』에서 받았다고 밝힌다. 그가 언급한『신곡』의 대목은 다음과 같다.


"부디, 당신이 현세로 돌아가 이 긴 여행의 피로를 풀게 되거든," 두 번째에 이어 세 번째 망령이 말했다네. "나 피아를 기억해 주세요. 시에나에서 태어나 마렘마에서 죽었나니, 그 경위는 보석 반지로 나를 아내로 맞은 그가 알고 있나이다."


서머싯 몸에 따르면 위에서 등장한 '피아'는 이탈리아 시에나 지방의 귀부인이다. 그녀의 남편은 피아가 불륜을 저질렀음을 의심했으나 감히 그녀의 가족들이 두려워 피아를 죽일 용기는 없었고, 따라서 마렘마에 있는 자기 성으로 데려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그곳에서 유독 가스로 천천히 피아를 죽이길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피아가 좀처럼 죽지 않고 시간만 흐르자 조바심이 난 그는 피아를 창밖으로 던져 버린다. 서머싯 몸은 이로부터 영감을 받아 한 여자의 부정을 의심한 남편이 그녀를 데리고 위험한 곳으로 떠나는 이야기를 써낸다. 베일에 싸인 인생에 대한 탐구, 혹은 베일 그 자체에 대한 탐구가 농익은 그의 소설,『인생의 베일』이다.






서머싯 몸은 퍼시 셸리의 구절을 인용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색의 베일, 살아 있는 자들은 그것을 인생이라 부른다.' 베일 너머의 원본이 아닌 베일 자체가 인생이라는 것, 심지어 그것은 오색의 찬란한 베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얼핏 매체 이론가들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매체가 발달함과 더불어 인간은 직접적으로 세상과 관계 맺기 보다 매개된 세상과 관계 맺게 되었다. 이때 중요한 건 원본이 아니라 매체이다. 예컨대 우리는 어떤 성향의 정치 유튜브 채널을 시청하냐에 따라 바다 건너 미국의 현실을 민주주의의 정의가 망가진 부정선거의 현장으로, 혹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는 음모론적 세력과의 전장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즉 현대인은 세상 그 자체를 경험하기보다 매체에 의해 재구성된 세계, 즉 매개된 세계를 경험한다. 다시 말해 매체는 베일이자, 인간의 삶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작은 따옴표로 인용한 문장들은 『인생의 베일』(민음사)에 나온 구절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발췌한 서머싯 몸의 글입니다. 이를 통해 독자 여러분들께서 서머싯 몸의 소설을 다소나마 직접 읽는 기분을 체험할 수 있길 기대하는 바입니다. 또한 글의 구성은 줄거리의 전개에 따라 감상을 덧붙이는 식으로 작성하여 보다 상세한 줄거리를 다루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에 따라 글의 분량도 상당히 늘어나긴 했으나 보다 진지한 감상을 위한 방법이었음에 독자 여러분들의 너른 양해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1.


줄거리


소설의 시작은 놀란 키티의 모습을 조명하며 시작한다. 키티는 그녀의 방 안에서 찰스와 밀회를 갖던 중이다. 그런데 돌연 밖에서 누군가 문고리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 방문을 잠가 놓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불륜 현장을 고스란히 들킬 뻔 했다. 방문을 열려고 한 것은 누구였을까. 키티는 그것이 자신의 남편 월터 페인일까 두려웠다. 무던한 찰스는 '하녀나 하인 중 하나였겠지' 라고 공허한 위로를 던졌으나 키티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과연 그 사람은 누구일까.


감상


키티는 그때 깨달아야 했다. 떨리는 그녀의 마음을 달랠 수 없는 찰스의 무심함을 말이다. 어쩌면 서머싯 몸은 이를 통해 찰스와 키티 사이에 은밀하게 형성된 권력 관계에 대해 독자에게 넌지시 힌트를 내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베일』에서 집요하게 천착하는 주제이기도 한 바로 그 권력 관계의 주제는 다름아닌 '외사랑'이다. 애석하게도 작중에서 사유되는 사랑의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수평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인간은 사랑하는 만큼 약자이며, 사랑하지 않는 만큼 권력자이다. 사랑의 농도는 기꺼이 그를 위해 약자가 될 의지와 비례하는 탓이다. 이별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어찌 비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하튼 이 대목에서 독자는 키티가 깨닫지 못한 사실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찰스는 떨리는 키티의 마음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없는 남자이며, 따라서 그녀를 오래도록 책임질 의지가 없는 남자라는 사실 말이다.


문학적 차원에서 소설 초반부의 서술적 특징을 살펴보면, 작품초반 발화주체(서술자)는 3인칭이며, 시각주체는 찰스이다. 찰스의 시선에 비친 키티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됨으로써, 키티의 긴장된 감정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예컨대 찰스는 키티가 '기절할까봐 걱정스러워' 그녀를 침대에 앉히기도 하고, 그녀의 훌쩍거리는 모습에 '화가 나서' 타이르기도 한다. 이처럼 키티의 모습을 직접 바라보고 있는 찰스의 주관을 서술함으로써 독자는 키티의 떨리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2.


줄거리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키티는 마침내 불편한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 날 방문을 열려고 한 의문의 주인공은 키티의 남편 월터 페인이 맞았던 것이다. 월터는 점심 시간을 이용해 평소 키티가 찾던 책 한 권을 전해주러 집에 들렀고 상황을 파악하게 된다. 비밀을 들킨 키티는 '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당황하고 겁에 질렸으나 우습게도 그 순간 떠오른 건 찰스였다. 키티에게 찰스는 '이 모든 걸 감당할 만큼 가치 있는 사내'였기 때문이다. 홍콩의 총독부 차관으로 일하는 찰스는 '마흔한 살이었지만 몸매가 여전히 미끈했고 발걸음도 젊은 사람처럼 경쾌한 남자'였다. 반면 키티는 자신이 월터를 사랑하지 않음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더이상 그녀는 '남편과 관계된 일이라면 아무것도 원치 않'을 지경이 된 것이다. 키티와 월터는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걸까.





3.


줄거리


키티는 회상에 잠긴다. 키티가 어렸을 적 그녀의 어머니 가스틴 부인은 '엄격하고 냉혹하며' 게다가 '야심 많고 인색한 데다 우매한' 여자였다. 가스틴 부인은 '자신의 성공이 오직 그(남편)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비통한 사실을 인정'하고 남편을 조종했다. 그녀는 남편의 직업적 성공을 위해 애썼고, 그에 따르는 명예를 꿈꿨다. 따라서 그녀는 이따금씩 남편에게서 저항의 기미가 보일 때마다 남편에게서 '평화를 빼앗고 결국에는 그가 지쳐서 항복하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보고 자란 어머니의 모습이 그렇다 보니 가스틴 부인의 두 딸 역시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 별다른 존경은 실리지 않았다. 가스틴 부인의 딸, 그러니까 키티와 도리스는 아버지를 '수입의 원천 이외에 다른 존재로는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가스틴 부인(키티의 어머니)은 남편이 '한 시골 법원으로부터 시간제 판사 자리를 얻게 되자' 그 쯤에서 욕심을 거두고, 대신 딸들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충족되지 못한 야망을 '딸들을 좋은 곳에 시집 보냄으로써' 보상받고자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작은 딸 도리스는 결코 미인이라 할 수 있는 얼굴은 아니었으나 다행히도 큰 딸 키티는 제법 미인이었다. 키티는 '짙고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의 '윤기 흐르고 생기 넘치는 갈색의 고수머리는 살짝 붉은 기가 돌았고 고른 치아에 피부는 매끄럽고 사랑스러'웠다. 따라서 부인은 키티에게 희망을 걸었다. 예컨대 상당한 재산과 훌륭하 명예를 가진 남자와의 결혼 말이다. 운좋게도 '어머니의 야심은 그녀(키티) 자신의 욕망과도 부합'했고 키티는 이곳저곳 사교계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신랑감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청혼하는 남자 중에 지위와 수입이 만족스러운 남자'는 전혀 없었고 따라서 키티는 해가 갈수록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어느덧 사교계에 데뷔(?)한 도리스가 고작 첫해에 제법 준수한 배경의 남자과 약혼을 하고 만다. 덜컥 겁이난 키티는 가족에 짐이 되기 싫었던 나머지 그동안 자신을 따르던 한 남자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바로 월터 페인이다. 물론 키티는 월터를 전혀 남자로 느끼지 않았다. 키티는 '조금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다만 동생 도리스마저 결혼한 마당에 홀로 늙어가며 가족에게 짐이 되는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었을 뿐이다.


감상


역시나 반복되는 주제는 외사랑과, 그것의 좌절이다. 맨 먼저 드러나는 건 가스틴 부인과 그의 남편의 관계다. 물론 작품 내에서 그 둘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여부에 대한 감정 묘사는 드러나지 않으나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서로의 기대가 달랐다는 것이다. 가스틴 부인은 남편을 도구처럼 여기고 싶어했고 남편은 그에 반항하는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마침내 그는 부인에게 굴복하고 그녀의 요청에 따라 삶을 살게되었으며, 심지어 딸들에게조차 '수입의 원천'에 지나지 않는 삶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경우 결코 수평적이지 않은 그들 관계의 무게추는 누가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의 문제로는 환원될 수 없겠으나 적어도 그들의 관계가 권력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어지는 가스틴 부인의 편애 또한 상징적이다. 가스틴 부인은 외모가 아쉬운 도리스보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키티에게 희망을 갖는다. 하지만 정작 사교계에서 성과(?)를 냈던 건 도리스다. 즉 가스틴 부인은 희망을 걸었던 이로부터 좌절을, 무심했던 이로부터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이렇듯 관계 속에서 인간의 기대는 원본 자체가 아닌 화려한 베일, 이른바 조건을 따라 발생하기 쉽지만 우습게도 그러한 얄팍한 기대는 곧잘 좌절되고 만다. 나아가 키티와 월터의 관계는 외사랑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키티는 '조금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반면 키티에 대한 월터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으로 묘사된다. 그는 왜 키티를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었으며, 그의 사랑은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는 작품의 주요한 주제이니 만큼 줄거리를 더 살펴본 후 다시 논의하기로 하자.





4.


줄거리


영국 정부의 세균학자였던 월터가 홍콩으로 발령 받으며 결혼과 동시에 키티는 남편을 따라 홍콩으로 건너간다. 키티는 그곳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남편의 직업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 불만이었다. 세균학자라는 남편의 직업은 그들을 '특별히 주목받는 처지'로 만들어주지 못했던 탓이다. 하지만 이윽고 무료했던 키티의 삶에 커다란 변화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것은 어느 만찬 자리에서 마주한 도로시의 남편 찰스 타운센드가 가져온 변화였다. 이미 월터 페인과도 구면이었던 찰스는 '키가 컸'고, '게다가 외모도 아름다웠'으며, '첫눈에 봐도 아주 건강했고 군살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리하여 키티와 찰스는 첫만남으로부터 석 달도 채 못 되어 어두운 사랑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감상


『인간의 베일』의 원제는『The Painted Veil』이다. 서머싯 몸이 소설의 시작 전에 인용한 바 퍼시셸리의 말 대로 오색의 베일이 인생이라는 구절을 염두에 둔다면 책의 원제는 '채색된 베일'로 직역될 수 있다. 또한 베일은 이미 그 존재 자체로 원본의 정체를 희미하게 하므로 심지어 알록달록한 베일이라면 베일 너머의 원본은 더욱더 짙은 암흑 속에 모습을 감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키티와 찰스가 사랑에 빠졌던 것은 서로에게서 아름다운 오색 베일을 발견했던 탓이라 해석될 수 있다. 예컨대 찰스의 베일은 '첫눈에 봐도 아주 건강'하고 '군살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남성다움이었다. 키티는 그러한 찰스의 베일이 찬란해 보였고, 찰스 또한 키티에게서 똑같은 경험을 했으리라. 다만 중요한 점은 우리 모두 타인을 베일 너머의 것으로밖에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타인을 실존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없으며 타인이 가진 조건 속에서만 타인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을 가린 베일은 결국 인간 자체라 해도 무방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퍼시 셸리도 베일을 인생 자체라 해석한 것은 아닐까. 참고로 'Painted'라는 단어는 문어체에서 '공허한'의 뜻을 갖기도 한다. 만약 앞서 언급한 대로 정말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게 베일 뿐이며 심지어 그것이 허구라면, 우리는 별수없이 허구를 진실이라 믿은 채 단념하고 살아가는 공허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펼쳐질 소설의 주제의식은 충분히 예측가능해졌다. 한껏 치장한 가공의 베일 너머의 비록 그 원본이 추하고 남루할 지라도 기꺼이 원본을 사랑하고자 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키티와 찰스, 그리고 월터의 불안한 삼각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좀 더 살펴보자.




5.


줄거리


키티의 불륜 사실을 진작에 알고 있던 월터는 어느 날 키티에게 말을 꺼낸다. 콜레라가 창궐한 메이탄푸에 의료 파견을 나가겠다는 것이다. 키티는 남편이 그런 위험한 곳에 가겠다는 말에 의아함과 약간의 걱정이 일었으나 그것은 잠시후 그녀가 겪을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월터는 키티에게 자신과 동행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명령이었고, 심지어 협박에 가까웠다. 그는 키티가 메이탄푸로 가지 않는다면 그녀를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다만 월터는 이상한 제안을 한다. 요컨대 찰스가 그의 아내 도로시와 이혼할 것을 약속하고, 또한 이혼 후 일주일 내로 찰스가 키티와 재혼할 것을 확답하면 월터 역시 키티와 깔끔하게 이혼해 주겠다는 것이다. 월터는 키티에게 선심을 발휘할 요량이었던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월터는 찰스가 한때의 감정놀음을 위해 안정된 세계를 버릴 만큼 낭만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간파했던 것이다. 그렇다. 월터는 키티에게 좌절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진실에 눈먼 키티는 다음날 곧바로 찰스에게 달려가 월터의 '제안'을 일러주었고, 서둘러 도로시와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할 것을 확답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역시나 월터의 예측은 정확했다. 찰스는 도로시와 이혼할 수 없으니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마침내 베일을 벗은 찰스의 '원본'을 마주한 키티는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이 날 실망시킬 걸, 그는 알고 있었어.' '이상하리만큼 그(월터)는 당신(찰스)을 정확하게 판단했어요. 나의 환상을 그토록 잔인하게 깨뜨려 버리다니, 그 사람다워요.' 이리하여 키티는 메이탄푸에 가야 할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것이다.


감상


지금부터 나는 다소 위험한(?) 분석을 시도하려 한다. 다만 나의 분석은 점차로 수정될 것이며 그에 따라 외견상의 위험성을 벗어보일 것이고, 따라서 글이 마무리 될 즈음엔 그리 위험한 분석이 아님을 독자 여러분들도 이해해줄 것이라 확신한다. 요컨대 나는 월터의 사랑이 기독교적 속성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과감하게 말하면, 월터는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속성 일부를 공유한다. 다만 그것은 완성된 형태로서의 예수이기보다 성장하는 인물로서의 예수이다. 따라서 보다 구체적으로 월터를 정의한다면 인간적 속성을 겸비한 존재이되 다만 점진적으로 예수에 가까워지는 인물이다. 그러니 일단은 '월터=예수'라고 거칠게 도식화한 채 논의를 진전시켜 보자. 일단 첫째로 드러나는 월터의 속성은 무대가성이다. 그는 불륜을 들킨 키티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길 기대하지도 않았고 당신이 그래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않았어. 내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니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때때로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하거나 당신에게서 유쾌한 애정의 눈빛을 느꼈을 때 황홀했어. 나는 내 사랑으로 당신을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내 애정에 참을성을 잃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이는지 언제나 조심했어. 대부분의 남편들이 권리로 여기는 걸 나는 호의로 받아들였어."



월터의 속성은 출발부터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으로 시작했다. 월터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임에 감사했고, 때때로 키티가 그로 인해 행복해하는 것에 황홀했으며, 그녀를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고, 그녀가 '참을성을 잃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일까 주의했다. 그는 무릇 남편이 아내로부터 받을 수 있는 평범한 존중과 애정이라는 '권리'조차 '호의'로 받아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월터는 애초에 키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키티는 여동생 도리스의 결혼에 쫓기듯 남편감을 골랐으며 따라서 그녀에게 월터란 가스틴 부인에게 남편이 도구인 것과 진배없는 존재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월터의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 사랑이자 가히 종교적 사랑이라고 일단 말해둘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고작 이 정도로 월터의 사랑을 종교적 사랑에 견주는 건 무리일 것이다. 우선 월터에 대한 논의는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다시 줄거리로 돌아가 보자.




6.


줄거리


키티는 세상의 모든 절망을 얼굴에 간직한 채 월터와 함께 메이탄푸로 가게 된다. 단테의 『신곡』에 드러난 피아의 망령처럼 말이다. 여하튼 키티는 메이탄푸로 가는 길 내내 '갈가리 찢겨진 가슴을 안고' 찰스로부터 거절당한 '가슴 아픈 장면들을 낱낱이 되새겨 보았'다. 애석하게도 키티는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찰스)로부터 버림 받았고, 이제 그녀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월터)로부터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마침내 메이탄푸에서 머물 그들의 거처에 도착하자 '한 남자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워딩턴이었고, 행정 부관이었다. 그는 키티보다 '키가 크지 않고 대머리에 얼굴이 작고 수염이 없'는 남자였으며, 콜레라로 쑥대밭이 된 메이탄푸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왜 떠나지 않았냐는 월터의 물음에 워딩턴은 '글쎄요, 제 부하들을 절반이나 잃었고 나머지도 몸져 누워서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여기 남아서 수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답하며 책임감을 드러냈다. 그밖에도 메이탄푸에는 수녀들이 남아 고아를 돌보는 등 희생정신을 발휘하고 있었다. 원장 수녀에 따르면 그녀는 동료 수녀 7명과 함께 프랑스에서 메이탄푸까지 먼 걸음을 했으며, 이제 남은 건 모두 세 명 뿐이다. 워딩턴을 비롯하여 수녀까지 죽음을 불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메이탄푸에서 콜레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이제 키티는 자신도 그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깨달았고, 자신을 잡아 이끈 월터를 원망한다.


감상


메이탄푸의 공간적인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자명하게도 키티에게 그곳은 죄의 결과이자 형벌의 공간이다. 따라서 메이탄푸는 키티에게 감옥이며, 그녀가 메이탄푸에서 경험해야 마땅할 정서는 고통과 후회로 얼룩진 절망감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워딩턴을 보라. 그는 메이탄푸를 떠날 수 있음에도 떠나지 않고 남아 죽음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한다. 워딩턴에게서 발견되는 이 같은 책임의 정서는 메이탄푸 전체를 관통하는 공간적 의미로 확대된다. 즉 메이탄푸는 비록 콜레라로 쑥대밭이 되었으나 죽음의 공간이 아닌 '회복되야 할' 공간으로 사유되며, 따라서 키티가 맞닥뜨릴 형벌은 죽음이 아닌 '정화'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피아의 망령'이 '연옥'편에 나오는 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가톨릭 교리에서 연옥이란 천국으로 가기 전에 그간 저지른 죄를 씻는 곳이 아니던가. 따라서 메이탄푸는 키티가 자신의 '원본'을 직면하고 베일을 벗어던지게 되는 곳으로 기능할 수 있으리라.




7.


줄거리


메이탄푸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키티는 끔찍하게 두려웠다. 그녀는 속으로 '도망치자, 그냥 도망치는 거야.' 하는 말을 끝없이 되뇌였고 다짐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그녀가 간다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날 워딩턴은 수녀원의 원장이 키티를 보고 싶어한다고 그녀에게 전했다. 기분전환이 필요했던 키티에겐 좋은 선택지였다. 이윽고 수녀는 키티를 기분 좋게 맞이해 주었고, 수녀원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제법 흘러 키티가 집에 가고자 수녀원을 나설 때였다. 문득 키티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그녀는 수녀들의 삶속에서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지만 자기 자신은 한없이 쓸모없고 비루한 존재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녀는 말했다. '아, 난 너무 무가치하구나.' 며칠 뒤 키티는 다시 수녀원에 방문하여 자신도 그곳 일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키티는 '봉사하는 일에서 영혼을 재충전하는 길을 발견했'으며 점차 메이탄푸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녀원엔 키티가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여섯 살짜리 계집애로 뇌수종을 앓고 있는 커다란 머리는 작게 쪼그라든 몸 위에서 가분수처럼 흔들거렸고 크고 공허한 눈에 침을 질질 흘리는 바보였다.' 키티는 아이가 역겹게 느껴져서 피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아이는 키티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 키티도 용기내서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은 순간, 아이는 돌연 키티에게 흥미를 잃고 더이상 키티를 쳐다보지도 않는 게 아닌가. 키티는 자신이 대체 무엇을 잘못한 건지 어리둥절했지만, 그 이후로 키티가 아무리 아이를 꼬드겨봐도 더 이상 아이는 키티를 본 체 하지 않았다.


감상


『인생의 베일』을 키티의 성장소설이라 평가할 수 있다면 그 강력한 근거로 작용하는 대목은 아마도 바로 이 장면, 즉 키티가 수녀원에서 일을 시작하는 장면일 것이다. 메이탄푸에서의 하루하루를 낙담 속에서 보내던 키티는 마침내 '도망가자'던 읊조림을 단념하고 운명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도망갈 곳이 없음을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연옥의 상징성을 염두에 둘 때 키티는 거듭나지 않은 채로는 결코 메이탄푸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런 의미에서 키티는 수녀원에서의 나날들을 통해 점차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메이탄푸의 대자연을 바라보며 이따금 지난 날의 일들을 후회하기도 하고, 월터의 헌신적 사랑에 대한 그녀 자신의 배신을 되돌아 보기도 한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들수록 키티는 더욱더 수녀원 일에 매진하며 자신을 괴롭히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키티의 성장은 또다른 비극의 서막을 예고하는 바이기도 하다. 여태껏 작중 인물들의 사랑은 늘상 외사랑이지 않았던가. 이에 대한 직접적 비유 중 하나로 등장하는 '여섯 살짜리' 아이의 존재는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아이는 자신을 싫어하는 키티를 좋다고 쫓아다녔으나, 키티가 관심을 주자마자 자신의 사랑을 철회했다. 사랑은 결코 수평적일 수 없다는 비극을 노골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키티가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월터에게 다가가는 순간 키티를 향한 월터의 사랑 역시 증발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8.


줄거리


어느 날 새벽 키티가 잠에 든 무렵 문을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워딩턴 외 몇몇 사람들이었다. 워딩턴은 키티에게 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남편에게 가자고 말했다. 키티의 남편 월터가 결국 콜레라에 걸리고 만 것이다. 서둘러 키티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월터에게로 달려간다. 키티는 말했다. "월터, 제발 날 용서해 줘요. 너무나 미안해요.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어요. 뼈저리게 후홰해요." 그런데 남편 월터는 뜻모를 말을 또박또박 말했다. "죽은 건 개였어." 키티는 '돌로 굳어 버린 것처럼' 놀랐다. 저 무슨 무의미한 말이라니. 잠시 후 월터는 죽었다. 키티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감상


월터의 죽음으로부터 우린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에게 또한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한 걸까. 단지 키티의 배신에 대해 복수를 하고 싶었다면 오직 키티에게만 고통을 주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았을까. 과연 그는 공멸하길 바랐던 걸까. 왜 그는 키티에게만 고통을 선사하는 손쉬은 방법을 택하지 않고 고난에 동참하는 어려운 길을 택했던 걸까. 이러한 고민은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메이탄푸로의 동행 속에 담긴 그의 마음은 키티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키티 홀로 짊어지지 않게 하려는 대속적인 사랑이자 구원의 사랑이며, 그녀를 처단하기 위한 형벌이 아니라 정화하고 회복하기 위한 십자가였던 것이다. 작품 어딘가에서 수녀 원장은 키티에게 말했다. '하늘이 저희에게 선생님을 보내셨습니다.' 즉 월터는 키티의 실수를 근거로 그녀를 포기하고 외면하는 사랑이 아니라 또다른 기회의 장 속에 그녀를 새로이 위치 시키는 헌신과 양보의 사랑이며, 바로 이러한 월터의 속성이 그를 종교적 의미에서 파악할 수 있는 두번째 근거로 작용한다. 다만 곧바로 가능한 반론은 결코 월터가 선한 의도를 지니고 메이탄푸행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키티는 월터에게 자신이 메이탄푸에서 죽길 바랐냐고 물었고, 월터는 그렇다고 답했다. 메이탄푸행을 택한 월터의 마음은 복수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나는 월터의 사랑을 숭고하고 고귀한 그 무엇으로 고양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무조건적인 사랑, 혹은 타인과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랑만이 타인을 감동시키고 감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월터 또한 인간적인 약점에 흔들리는 유한자적 사랑의 한계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또한 메이탄푸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돌보는 중에 성장했으며 마침내 대속적 사랑을 완성했다. 찰스와 달리 오직 상대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월터의 사랑만이 키티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월터가 죽기 전 유언처럼 남긴 '죽은 건 개였다'는 영국 작가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시 『미친 개의 죽음에 관한 애가』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그의 시에서 한 마을에 사는 남자는 동네 잡종개와 친구가 된다. 그런데 어느 날 개가 남자를 물었고 사람들은 곧 남자가 죽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남자는 상처가 나았고 정작 죽은 건 개였다. 월터가 말했듯 정작 사람을 문 개만 죽은 것이다. 이러한 비유에 담긴 월터의 진심을 짐작해 본다면 키티에게 상처를 준 본인 또한 커다란 상처를 입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요컨대 월터는 키티에 대한 배신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어낼 수 없는 사랑, 한편으론 그녀에게 상처 입힘으로써 자신 또한 상처 받았음을 내보이고 싶은 원망감, 하지만 그녀에게 입힌 상처에 대한 후회 등 아주 복잡하교 미묘한 감정의 혼합 속에서 홀로 고통 받았던 것이다.




9.


줄거리


월터가 죽은 뒤 머지않아 키티는 그와 살았던 홍콩을 경유하여 고향 땅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런데 키티가 홍콩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웬 여인이 홍콩에 도착한 키티를 맞아주었으니 그녀의 정체는 도로시 타운센드, 즉 찰스의 아내였다. 워딩턴의 전보로 키티의 소식을 들은 도로시는 키티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키티의 도착시간을 맞춰 마중 나온 것이다. 도로시는 키티에게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세요. 찰스와 나는 부인이 홍콩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와 함께 있었으면 해요.' 라고 말했다. 도로시의 집에 방문한 키티는 이윽고 찰스를 마주쳤다. 그는 뻔뻔스럽게도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정말 기쁩니다."라고 내뱉는 게 아닌가. 키티는 찰스의 모습이 역겨웠다. 하지만 우습게도 키티는 도로시가 집을 비운 날 또 한 번 찰스와 섹스를 하고 만다.


'그녀는 몸을 떨며 흐느꼈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그의 팔의 압력이 이상하게 위안을 주었다. 온몸에 그것을 느끼고 싶은 열망이 솟아났다.' '그녀는 여자가 아니었고 그녀의 인격은 와해되었다. 그녀는 단지 욕망이었다. 그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의 팔에 안긴 그녀는 너무 가벼웠다. 그가 그녀를 옮기는 동안 그녀는 사랑에 흠뻑 취해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그녀의 머리가 베개 위로 떨어졌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행동에 또 다시 실망한 키티는 서둘러 홍콩을 떠나 본국의 부모님 집으로 떠난다. 다만 그녀를 기다리는 슬픈 소식이 하나 있었다. 가스틴 부인이 죽은 것이다. 키티는 '그 냉혹하고 군림하기 좋아하고 야심 찬 여인이 죽음에 의해 모든 세속적 야욕을 좌절당한 채 이렇게 꼼짝도 않고 조용히 누워 있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슬픈 감정이 일었다. 반면 키티는 아버지가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듯한 눈치를 받았다. 생각해 보면 키티의 아버지 가스틴은 '집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적이 없었고 그저 당연한 존재였으며 가족에게 더 화려한 것을 제공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다소 멸시를 받아아야 했으며' 가족들 모두에게 '돈을 벌어오는 사람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내의 죽음으로 그는 안도감으로 충만해졌고 이제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이 기회가 그에게 자유를 보장해 줄 터였'으며, '앞에 펼쳐진 새로운 삶을 보았고 마침내 그 모든 세월을 겪고 나서 휴식과 행복이라는 상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스틴은 바하마의 재판장 자리를 제안 받았고, 따라서 이제 영국을 떠나기만 하면 드디어 자기만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키티는 돌연 아버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아버지?' 키티의 물음에 아버지의 잠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키티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둘은 행복을 약속하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감상


과거 찰스와 밀회를 갖던 시절 키티는 도로시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다. 키티의 눈에 비친 도로시는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고 상냥한 태도로 그녀에게 합당한 말들을 했지만 그녀가 보이는 그 모든 친절함이 오히려 거리감을 만들었'으며, '그녀의 얼굴은 가면 같았'고, 어딘가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도로시는 메이탄푸에서 돌아온 키티를 편견 없이 맞아주었다. 자신의 남편과 바람이 난 여인에게 기꺼이 집을 내어준 것이다. 물론 도로시가 그 사실을 알았는지 여부에 대해서 소설은 직접적인 서술을 피했으나 독자들은 도로시가 결코 무지한 인물이 아님을 워딩턴의 진술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키티가 메이탄푸에 머물던 시절 워딩턴이 도로시에 대해 언급한 바에 따르면 워딩턴은 그녀가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 농담하는 것을' 이따금씩 들었고, 심지어 그녀는 '찰스에게 빠진 불쌍한 여자들과 친구라도 되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워딩턴의 고백을 염두에 둘 때 도로시가 키티의 불륜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이며, 따라서 그녀가 집을 내어주는 행위는 용서를 상징하는 바로 기능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물론 일부 독자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지도 모른다. 도로시가 키티를 집에 들일 수 있었던 것은 실은 도로시와 찰스의 사랑이 뜨겁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추측이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이유는 여태껏 도로시에 대한 부정적 서술이 모두 관찰과 추측, 혹은 주변적 고백에 토대를 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키티가 도로시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 인상은 그녀를 향한 키티 본인의 관찰과 추측에 의한 것이며, 또한 워딩턴이라는 주변 인물의 외부 고백에 의한 것이다. 반면 도로시가 키티를 맞이하는 장면에 대한 서술은 오로지 서술자에 의해 현실을 그대로 옮긴 서술로서, 즉 매체에 의한 가상 현실이 아닌, 현실 그 자체의 서술이라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이제껏 키티가 도로시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는 도로시의 '베일'에 불과하며, 키티를 향한 도로시의 용서야말로 도로시의 원본에 대한 서술인 셈이다. 그렇다면 독자들이 의문을 갖게 되는 지점은 도대체 키티가 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하는 점이다. 왜 그녀는 그토록 실망했던 찰스와 다시 섹스를 했던 걸까. 찰스와 섹스를 하는 순간 키티는 그녀의 인격이 '와해되'는 기분을 경험했으며, 그녀 자신이 단지 '욕망이었다'고 느낀다. 즉 키티는 월터의 대속적 사랑과, 메이탄푸 사람들에게서 관찰한 뜨거운 희생정신, 그리고 도로시의 용서를 통해 인간 욕망의 부질없음을 깨달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욕망 자체를 그녀 자신에게서 삭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욕망에 대한 회의적 서술로 해석되어선 안 될 것이다. 서머싯 몸이 전하고자 했던 바는 욕망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는 '인간의 굴레' 그 자체를 고발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만 욕망이 인간의 일부임을 직시하고 그 다음의 후회 없는 행동을 계획하며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제안하고자 한 것이다. 예컨대 키티는 찰스와의 예기치 않은 섹스를 후회하며 곧바로 영국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떠났다. 찰스를 향한 뜨거운 욕망에만 매달렸던 과거의 키티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지점이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녀는 성장했고, 스스로에게 어려운 결정을 내일 수 있는 인물로 거듭난 것이다. 작품 말미에서 그녀는 부인을 잃고 홀로남은 아버지에게 자신도 아버지와 동행할 것을 다짐한다. 초반에서 언급했듯 가스틴 가족은 모두 가스틴을 돈 버는 기계인 양, 도구처럼 여겼다. 다시 말해 가스틴은 그의 주변 인물들 때문에 본인이 원치 않은 베일을 뒤집어 쓴 채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가스틴 부인의 죽음으로 가스틴은 날 것의 삶, 자기만의 삶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았다. 따라서 아버지와 동행하겠다는 키티의 각오는 베일 너머의 원본을 진정으로 사랑하겠다는 각오,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의 주체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키티는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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