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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Feb 14. 2021

노동은 '좋은 것'일 수 있을까?

『노동에 대한 새로운 철학』, 토마스 바셰크


노동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있지만 모두 이분법적인 구획 아래 포획 가능할 것이다. 한편엔 노동이 좋은 것이라는 담론, 다른 한편엔 노동이 나쁜 것이라는 담론으로 말이다. 그 중 오늘날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는 담론은 단연 후자인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수많은 직장인들의 꿈은 퇴사라는 재담은 이미 농담 이상의 대접을 받지 않던가. 따지고 보면 직장인들은 이미 그들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지 않을 뿐이다. 즉 그들을 회사에 묶어두는 것은 사장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다. 이제 '자발적 복종'이라는 라보에티의 날카로운 통찰이 직장인들을 겨눈다. 고대의 노예들은 주인의 눈을 피해 탈출하길 진심으로 꿈꿨던 낭만이라도 있었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기꺼이 자발적으로 복종하여 쫓아내지 말아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사고와 판단 체계까지 노예화된 것이다. 과연 이 같은 사유 흐름은 노동에 대한--혹은 노동자에 대한--정당한 평가라 할 수 있을까? 과연 현대의 노동자는 정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율성이 박탈된 노예에 불과하며, 개인적 재량권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생각 없는 기계'에 불과한 걸까? 노동의 부정적 담론에 맞서 기꺼이 '좋은 노동'을 외쳤던 오늘의 책, 토마스 바셰크의 『노동에 대한 새로운 철학』이다.





1. 노동의 지위



노동의 지위는 훌륭한 태생적 배경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성서에 따르면 인간이 노동하게 된 이유는 인간이 지은 죄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이 최초로 지은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은 게 화근이었다. 하나님은 약속을 어긴 아담과 하와에게 크게 노했고, 그 벌로 아담(남성)에겐 평생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노동의 의무를, 하와(여성)에겐 출산의 의무를 주얻던 것이다. 즉 노동이란 심판의 대가로서 주어진 것, 즉 죄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메시지가 반복된다. 시시포스는 신의 명령을 어긴 대가로 커다란 돌덩이를 지고 산꼭대기 위에 올려 놓아야 하는 벌을 받는다. 그런데 시시포스가 기껏 돌덩이를 산 정상에 올려두면, 돌덩이는 뾰족한 산 꼭대기 모양 탓에 다시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시시포스는 그 의미 없이 반복되는 형벌에 영원히 갇힌 것이다. 즉 형벌로서의 노동과 그 무의미성이 시시포스의 고통을 통해 폭로되는 셈이다. 이러한 '저주로서의 노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2. 노동은 나쁜 것인가?



노동을 '도구'로 취급하는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소급된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제작'과 '실천'으로 구분했다. 먼저 '제작'에서 중요한 것은 목표이다. 제작 행위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이며,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제작 행위의 생명력도 소멸한다. 가령 오늘날 대다수 직장인들의 노동은 제작이다. 월급날을 목표로 삼아 나머지 날엔 열심히 제작 행위에 몰두하는 것이다. 반면 '실천'은 활동 그 자체를 위한 활동이다.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활동 그 자체가 이미 생명령을 가진 활동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대표적인 예로 철학적 사색을 제시했다. 그는 심지어 "자유로운 인간의 육체나 영혼 혹은 정신으로 하여금 덕을 행할 수 없게 만드는 일체의 작업, 기술, 지식은 저속하다고" 말하며 제작 행위를 무시했다. 안타깝게도 이처럼 도구로서의 행위를 저속하게 바라보는 그의 생각은 도구로서의 노동, 즉 생계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다. 목적을 위한 활동 속에서도 또 다른 목적을 생성할 수 있는 주체의 의지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철학자들의 사색이 가능하기 위해 그들의 노동을 대신 해주는 수많은 노예의 노동을 계산하지 못했다. 생계 노동의 필연성을 간과한 것이다.



혹자는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을 '노동은 나쁜 것이다'라는 담론의 근거로 활용하려는 시도하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마르스크의 의도를 오인한, 따라서 잘못된 시도이다. 먼저 그가 말하는 소외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컨대 오늘날 직장인들의 노동만 봐도 그렇다. 직장인들은 단지 회사의 일, 즉 남의 일을 할 뿐이며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회사 일이 곧 나의 일'이라는 충성심 높은 직장인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으로 체결된 계약 관계하의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상품으로부터 소외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며, 또한 직장인들은 협력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 서로로부터 소외된다. 하지만 이러한 마르크스의 분석과 노동에 대한 비판적 견지는 생산수단을 자본가가 독점한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노동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았다기보다 자본가에게 종속된 노동을 부정했을 뿐이다(다만 이러한 분석은 자본가라는 집단을 공통의 이해관계 아래 묶인 거대한 총체라고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다분하다. 삼성가와 편의점 점주는 동일한 자본가인가?). 쉽게 말해 마르크스 역시 노동의 본질 자체를 나쁜 것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으며, 심지어 만약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통제할 수 있다면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발현할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책의 저자 토마스 바셰크는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에 따르면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노동 속에서 일체감을 보이는 노동자들도 존재한다. 이처럼 마르스크는 수많은 시민의 복잡한 이해 관계를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두 집단 속에서 정리하는 성급한 일반화를 범하는 과정에서 계급 내 계급의 차이를 면밀히 고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3. 노동은 좋은 것인가?


토마스 바셰크는 노동을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 이원론적 시각을 비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본래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표상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그것이 가진 부정적인 속성만을 근거로 대상 전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사유하는 것은 어리석은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노동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은 긍정적인 측면도, 부정적인 측면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부정적인 측면이 관찰된다고 해서 노동 자체를 폐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 바셰크의 논점은 간단하다. 인류는 노동을 철회하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니라 노동을 개선하기 위해, 즉 '좋은 노동'을 양산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노동이란 무엇인가?


그에 앞서 '노동의 좋은점'을 먼저 짚어보도록 하자. 저자에 따르면 노동은 1)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는 데 필요한 기준과 표준, 문제와 도전을 제공'한다. 주어진 목표 아래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존재로서 응전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일종의 의무감과 책임감을 지닌 존재로 거듭난다. 이러한 논리에서 실업이 인간에게 끼치는 우울은 단지 취업이라는 상태가 디폴트로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응전할 과제의 부재, 혹은 자기효용감을 느낄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 훨씬 심각한 실업의 문제점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노동은 2) '우리가 지닌 창조성과 협동 능력을 자극'하며 '타인의 인정과 존중을 가져다주는' 활동이다. 이는 종전에 마르크스가 설파한 소외 개념에 대한 전면적인 반박이다. 저자에 따르면 노동자는 자신이 소외되기를 소망할 때만 소외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노동자는 소외되지 않기로 최선을 다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언뜻 느껴지기엔 자본주의 원리를 내면화한 노예적 태도라 비난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단언한다. 노동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그 일을 하기 위해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노동 조건과 표준들을 열심히 연구하며, 그것보다 더 나은 표준을 생산하기 위한 능동적인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한 재량권이 발휘될 때 노동자는 자신의 세계를 외부로 발산할 수 있는 창조적인 지위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노동자는 노동을 수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그 흔적을 세계에 남기는 존재가 되길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노동'이란 '노동의 좋은점'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는 노동을 말한다. 따라서 이제껏 우리가 노동을 '나쁜 노동'으로만 여겨왔다면 그 이유는 '노동의 좋은점'이 발휘될 수 없는 노동이었거나, 혹은 우리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노동의 좋은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다. 여기서 전자는 사회구조적 문제이고, 후자는 개인적 차원의 노력 문제다. 따라서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좋은 노동을 양상하기 위한 거국적 노력과 더불어 자신의 선 자리에서 본인의 노동을 좋은 노동으로 개선하기 위한 개인적 차원의 각성이 필요할 것이다.






End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노동 없이 행복할 수 없다. 노동은 인간으로 하여금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인간 본인의 효용감을 스스로 확인하도록 도우며, 또한 노동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 및 연대를 가능케하며, 나아가 삶의 의미로 작용하여 본인의 실존적 지위를 확증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짧은 노동을 위해 분투할 것이 아니라 좋은 노동을 되찾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계를 위한 노동에 허덕이는 한 개인이 그 안에서 의미를 찾기란 어려운 것이다. 물론 저자는 그러한 푸념에 대해 인과를 뒤집은 해석이라 비난할 지도 모른다. 지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게 아니라 의미를 찾지 못해 지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산꼭대기에 돌을 올려야만 하는 일에서 그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시시포스의 노동은 사회와 아무런 맥락을 갖지 못하는 독립적인 형벌이며, 그의 형벌이 진정한 형벌일 수 있는 이유는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점 그 자체가 아니던가. 따라서 본래부터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강박적이고 자발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나아가 신체까지 권력에 내바치는 결과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 속에서 의미를 찾으라는 제안은 대상이 처한 환경을 알지 못한 채 섣불리 강요되어져선 안 될 노릇이다. 다만 우리는 스스로 자문해야 할 뿐이다. 나는 노동을 바라는가 바라지 않는가, 또 어떤 노동을 바라고 바라지 않는가. 최적의 노동은 노동과 향유의 경계가 불분명한 바로 그 지점에 있을지 모른다. 앞선 자문의 내용에 신실할수록 모호한 경계를 찾을 수 있으리라.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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