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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Mar 15. 2021

에리히 프롬을 처음 읽는 이들에게

『에리히 프롬』, 옌스 푀르스터


국내에서 에리히 프롬은『사랑의 기술』로 잘 알려진 베스트 셀러 작가이다. 다만 『사랑의 기술』이 그에게 가져다준 대중적 성공은 도리어 그의 사상가적 면모를 가린 면이 없잖아 있다. 예컨대『사랑의 기술』을 흥미롭게 읽은 독자가 막상 그에게 흥미를 갖고 프롬의 사상을 집중 탐구하려 할 때 겪게 되는 혼란이 이를 증명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그의 이해, 윤리에 대한 그의 이해, 그리고 사회학과 심리학을 통합하려 시도했던 그의 깊이가 도무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대중 독자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수의 철학자들도 프롬을 딱 '대중 작가'로 바라보곤 한다. 하기야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학자라하더라도 모든 개별 학자들의 사상을 심층적으로 연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정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자원은 늘 우선순위에 따라 배분되기 마련이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프롬은 철학자들에게조차 필수적으로 읽히는 사상가는 아니었다(어쩌면 철학자들은 대중 작가들에게 다소 인색한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책이 그렇게나 많이 팔렸다고? 얼마나 쉽게 썼으면 그래!). 하지만 단언컨대 프롬은 깊이 공부해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학자이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이론을 통합하려 했던 노력, 선불교와 정신분석에 대한 메타적 이해, 인본주의 심리학에 대한 프롬의 입장은 그의 진지한 학자적 태도를 도저히 신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나의 설득이 (당신에게)유효했다면 옌스 푀르스터의 책, 『에리히 프롬』을 통해 프롬의 사상을 가볍게 공부해보기를 권면한다.


*옌스 푀르스터의 책『에리히 프롬』은 다소 가벼운 입문서이긴 합니다. 또한 구성이 다소 산만하다는 인상이 있으니 이 점 참고해 주셔요 :)








01.『소유나 존재냐』



프롬은 스위스 무랄토에서 생을 마감한다. 사인은 심근경색이다. 그전에 이미 세번의 심근경색을 경험했으니,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네 번째 심근경색은 아마도 그에겐 예기치 못한 손님이 아니었으리라. 생전에 프롬은 삶의 양식에 대하여 '소유'와 '존재'를 구분했다. 두 양식은 실존적 고독에 처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대표적인 선택지라 할 수 있다. 먼저 전자에 해당하는 1)소유의 양식이란 '물질적 자산의 획득이나 소유를 포함'하는 것으로, 즉 물질에 대한 추구, 혹은 물질화된 가치에 매몰된 삶의 양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소유의 양식을 살아가는 사람은 소유의 끝없는 증식과 확대를 삶의 목표로 삼기 쉽다. 프롬은 특히 소유의 양식에 비관적이었다. 소유적 삶은 물질에 기반하는 것이자 물집에 집착하는 것이며, 따라서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함몰되는 것이다. 프롬은 이를 '영원한 젖먹이'라고 비판했다. 손에 집히는 것이면 무엇이건 입으로 가져가는 젖먹이 아이처럼 물질에 대한 끝없는 집착은 해갈 없는 영원한 갈증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말이다. 반면 2)존재의 양식이란 '학습과 기억, 말하기와 글 읽기, 지식과 사랑' 등의 활동이 본연의 의미를 상하지 않은 채 경험되는 것을 뜻한다. 본연의 의미가 헤치지 않는다는 말은 사회 구조에 의해 재해석되어 변주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식조차도 순수한 학구열에 의한 것이 아닌 지식 산업의 아이템으로 전락하기 일쑤다. 이처럼 '존재'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왜곡되지 않은 채 순수 존재 그 자체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존재의 양식인 것이다.







02.사회적 성격


에리히 프롬의 유명한 이론 중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회적 성격이란 '한 집단 구성원 대부분이 갖는 성격 구조의 본질적 핵심으로, 그 집단의 기본 경험과 생활 방식의 결과로서 발달'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속한 사회가 어떤 사회이냐에 따라, 즉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따라 집단 구성원들이 일정한 사회적 성향을 갖는다는 말이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 구성원들은 효율을 중시하고, 가치 중심적이며, 생산적인 활동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을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그것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회적 성격인 셈이다.


프롬은 1950년부터 1973년까지 멕시코에 머물렀다. 그간 멕시코에서 진행된 프롬의 연구 중 앞서 말한 사회적 성격과 관련지어 언급할 만한 연구가 하나 있다. 연구 주제는 멕시코 농부들의 심리에 관한 것으로, 즉 멕시코혁명을 통해 대지주로부터 해방된 농부들이 도리어 해방된 이후 불행한 삶을 살게되었는가에 대한 심층 탐구였다. 프롬에 따르면 그 이유는 대농장시대를 살아가며 농부들의 사회적 성격이 그에 맞게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멕시코 농부들은 오랜 기간 동안 대지주들의 명령에 순응하는 체제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그 결과 수동적이고 굴종적인 행동 양식이 그들의 사회적 성격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방 이후 예기치 않은 자유를 획득한 농부들은 자유를 누릴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이러한 발상은 프롬의 초기작『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주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는 것이 프롬의 설명이다. 이른바 사회적 성격에 발목 잡힌 개인의 참상이랄까.


참고로 1950년 프롬이 멕시코로 건너간 결정적인 계기는 당시 아내였던 헤니의 영향이 컸다. 당시 헤니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런 그녀를 위해 프롬은 온천 치료가 용이하다고 알려진(당시 온천 치료는 최신 치료 요법이었다) 멕시코로 가길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프롬과 함께 멕시코로 떠난 헤니의 생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52년, 프롬은 헤니의 시체를 마주하게 된다. 이 일로 프롬은 한동안 우울을 겪기도 했으나, 1953년 12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애니스라는 여인과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사실 프롬을 만나기 전 이미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었던 헤니는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과도 관계가 깊었다. 심지어 벤야민과 함께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려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공유한 시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도중 벤야민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 결과 헤니만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헤니와의 사별 후 프롬은 애니스라는 여인과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헤니를 떠나보낸 지 불과 1년만의 일이었다. 애니스와의 관계에서 프롬은 확실히 사치스러운 면모를 보였다. 특히 그가 애니스와 함께 살기 위해 쿠에르나바카에 지은 궁궐 같은 집이 그러했으며, 또한 그 집에서 벌어진 유명인사들과의 잦은 사교 모임--혹은 파티--이 그러했다. 비싼 자동차와 화려한 음식은 물론이었고, 술과 음악, 그리고 춤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프롬의 모습은 '소유의 삶', 다시 말해 물질적 삶을 비판하던 그의 이론과는 다소 모순적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를 변호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프롬의 행동은 순전히 아내 사랑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되곤 한다. 프롬 혼자였다면 결코 누리지 않았을 것들이라며 말이다.


프롬은 병든 사회가 병든 인간을 양산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만약 심리학의 치료 대상이 오직 인간 개인에만 한정된다면 그것은 훌륭한 심리학이 될 수 없다.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사회는 그대로 내버려둔 채 인간 개인의 마음만 어르고 달래는 행위는 지속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앞뒤가 뒤바뀐 형국이니 말이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에 몸담은 구성원이 번아웃을 호소하고 있다고 해보자. 이 경우 심리학이 구성원의 번아웃을 치료하여 다시 그를 직장으로 되돌려 보낸다면 이때 심리학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하수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은 지속적으로 피로하여 소진될 것이지만, 심리학은 그로 하여금 '할 수 있다'는 환상과 더불어 피로가 회복된 것 같은 환상적 현실만을 주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03.『사랑의 기술』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라 할 수 있는 『사랑의 기술』에서 서술되는 사랑의 기본 양상은 '존재의 실존 양식'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롬에게 존재란 그 자체가 목적이며,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목적은 사랑 받기 위함이 아닌, 사랑 '하기' 위함이며, 따라서 사랑 받지 않길 바랄 때 사랑 받게 되는 역설적인 결과로 귀결된다. 사랑의 순수성, 즉 '하기' 위한 사랑 속에서만 사랑은 사랑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간의 사랑은 '소유의 방식'을 따른다.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며, 각자가 그들의 자아 실현을 목표로 삼고, 또 상대로부터 행복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이는 서로로 하여금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게 만드는 불상사를 초래하기 마련이며, 또한 사랑하기 위한 자신의 능동적 수행에는 점차로 무뎌지게 만든다. 그리하여 결국 사랑 '받지' 못한다고 느끼게 된 두 사람에게 남는 건 이별 뿐이 없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외롭고 고독하다. 인간은 분리된 존재이며, 소외된 존재이다. 아무도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자가 없으며, 또한 원치 않는다고 죽지 않을 수 있는 자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분리감을 극복하고자 한다. 더러는 섹스에 집착하기도 하고, 더러는 예술 작품을 만드는 창조자가 되기도 하며, 더러는 자신이 속한 곳에 강력한 일체감을 느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롬이 볼 때 이러한 해결책들은 훌륭한 해결책이 아니다. 섹스를 통한 합일의 기운은 영원할 수 없으며, 예술 작품을 창조함으로써 성취하는 주인 의식은 인간 관계와 달리 자유로운 타자성이 부재하며, 소속감을 통한 합일은 개성의 상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는 건 사랑이다. 프롬에게 사랑이란 실존적 위기에 대한 인간의 유일한 탈출구이다. 프롬은 사랑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불안을 종식시킬 수 있는 힘을 갖는다고 말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잘' 사랑해야 한다. 여기서 '잘'이 뜻하는 바는 사랑의 본래적 목표, 즉 '주는 것'으로서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가장 귀중한 것, 자신의 생명,,, 자신의 기쁨, 자신의 지식, 자신의 이해, 자신의 슬픔, 무엇보다 자기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만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한 쌍의 연인은 '둘 만의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능력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할 줄은 모른 채 자신의 연인만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인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연인도 오롯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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