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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Apr 28. 2021

하이데거로 읽는 어린왕자

『어린왕자』, 생텍쥐페리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bxROubP3kKY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현대 사회를 가리켜 ‘고향 상실의 시대’라 부른 바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고향이란 서로 간의 유대감과 따뜻한 정이 넘치며, 또한 느긋한 정취와 넉넉한 여유가 샘솟는 공간이죠. 그에 반해 현대 사회는 시시각각으로 급변하는 시대이며, 늘 다급한 마음으로 적응해야 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분주한 현대 사회에 지친 우리는 때때로 사랑과 휴식을 갈구하며, 잃어버린 고향을 무의식적으로 그리워하곤 하죠. 그런데 실은 우리의 고향이 그리 멀지 않은 곳, 바로 우리의 어린 시절에 있다면 어떨까요? 늘 조급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놓치고 사는 우리들에게, 어른들은 이상하다는 말을 하염없이 되뇌이던 오늘의 책,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입니다.








1.‘나’와 어린왕자의 만남

: 존재와 존재자


한 아이가 코끼리를 집어삼킨 보아뱀 그림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며 그림이 무섭지 않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모자 그림이 뭐가 무섭냐며 이제 그림 따위는 집어 치우고, 역사나 계산, 혹은 문법 공부나 하라고 충고하죠. 풀이 죽은 아이는 화가의 꿈을 접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흘러 아이가 어른이 됐을 때의 일입니다. 비행기 조종사가 된 그는 어느 날 뜻밖의 엔진 고장으로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지고 말죠. 수중에 있는 것이라곤 고작 일주일 정도 마실 물 뿐이었던 비행사는 두렵고 무서운 마음으로 밤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그는 낯선 목소리에 잠에서 깹니다. 한 아이가 양을 그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사막 한 가운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운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기묘한 아이였습니다. 당황한 비행사는 어릴 적 상처를 떠올리며 이제 그림 따위는 그리지 않는다고 퉁명스럽게 답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양을 그려 달라고 말합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어릴 적 어른들에게 보여주었던 보아뱀 그림을 건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이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정확하게 알아봅니다. 이것이 비행사와 어린왕자의 첫만남이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라는 두 개념을 엄밀히 구분합니다.1) 그에 따르면 ‘존재자’란 자연과 인간, 그리고 모든 사물을 가리키며, 존재는 존재자들의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존재자라면, 그들의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이 바로 존재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매일 밤 덮고 자는 이불과, 늘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 혹은 가족과 친구 등이 모두 존재자이고, 그들 각각의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이 바로 존재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자들을 성스러운 것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 사회에서 존재자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상실했기 때문이죠.2) 예컨대 오늘날 강이라는 존재자는 수력 발전을 위한 에너지로 간주되기 십상이며, 심지어 사람이라는 존재자마저 인적 자원으로 불리는 게 당연해졌습니다. 즉 오늘날 존재자들은 오직 계산 가능한 조건들로 해체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존재의 성스러움은 존재자에게서 빠져 달아나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자를 이론적으로만 파악하려는 현대인들은 호수에 충만하게 흐르는 고요함도, 바람결에 실린 계절의 냄새도, 혹은 인간의 따뜻한 숨결도 느끼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광경은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과 꼭 닮았습니다. 이를테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모자라고 이해한 어른들의 모습은 존재자만 보려 하고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죠. 이처럼 있는 그대로만 분석하려는 과학적 사고에서 보이는 것 너머의 진실은 은폐되어 버립니다.




바꿔 말하면, 존재자 안에 깃든 성스러운 성격을 발견하기 위해선 과학적 사고에만 갇혀선 안 된다는 이야기이죠. 이러한 맥락에서 주인공이 엔진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하는 대목은 제법 의미심장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과학 기술의 결함을 통해 과학적 사고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기 때문이죠. 이제 주인공은 외롭고 적막한 사막에서 고독한 단독자로서의 자기를 대면하게 될 것이며, 또한 죽음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삶이란 무엇인지, 존재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겠죠. 때마침 등장한 어린왕자는 비행사와 함께 질문을 풀어나갈 동반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2.어린왕자의 여행

: 지시-연관 체계로의 세계


본래 어린왕자는 지구 바깥의 다른 별3)에서 왔습니다. 그곳에서 어린 왕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름다운 장미를 정성을 다해 돌봤죠. 하지만 자존심 강한 장미는 때때로 어린왕자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서슴지 않았고 상처 받은 어린 왕자는 장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며 여행을 떠납니다. 별을 떠난 어린 왕자가 첫번째로 방문한 곳은 왕이 살고 있는 별이었습니다. 왕은 어린왕자에게 자신이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린다며 우쭐거렸지만 정작 자기 별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왕—‘짐은 아직 나의 왕국을 다 돌아보지 않았다’—이었죠. 이에 어린왕자는 어른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여행을 떠납니다. 이윽고 어린왕자가 찾아간 두번째 별은 허영장이가 사는 별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찬양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죠. 따라서 그는 어린왕자가 무슨 말을 해도 줄곧 못 들은 체했습니다. 자기를 찬양하는 말 이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번에도 어린왕자는 어른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여행을 떠납니다.

세번째로 방문한 별은 술꾼이 살고 있는 별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왕자에게 술을 마시는 사실이 부끄럽다 말하며, 따라서 그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술 마시는 것을 잊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역시나 어린왕자는 어른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여행을 떠납니다. 어린왕자가 찾아간 네번째 별에는 사업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어린왕자의 방문을 귀찮아하며, 다만 자신의 막대한 소유를 자랑할 뿐이었습니다. 어린왕자는 대책 없이 갖기만 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의아해하며 여행을 속개합니다. 다섯번째로 방문한 별에는 아주 성실한 가로등지기4)가 살고 있었습니다. 가로등지기는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낮에는 가로등을 켜고 밤에는 끄는 일을 반복했죠. 어린왕자는 그토록 남을 위해 헌신하는 가로등지기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둘이 있기엔 별이 너무 비좁았던 터라 다시 여행을 떠납니다. 이어서 여섯번째 별에는 지리학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과 바다를 기록하는 일을 했지만 정작 자신의 별에 산과 바다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했죠. 어린왕자는 다시 여행을 떠났고 그가 일곱번째로 도착한 별은 바로 지구입니다. 지구의 광경을 목격한 어린 왕자는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지구에는 111명의 왕과, 3억 1,100만 명의 허영장이, 750만 명의 술꾼, 90만 명의 사업가, 46만 2,511명의 가로등지기, 그리고 7,000명의 지리학자가 있었기 때문이죠. 지구의 사람들은 급행열차를 타고 어딘가를 향해 분주하게 이동했으며, 거리의 상인들은 사람들의 시간을 절약해줄 수 있는 이상한 물건7)들을 팔았습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어린왕자는 지구야말로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죠.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이를 하이데거의 용어로 ‘피투성’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내던져진’ 상태를 뜻하는 개념이죠. 다만 인간이 스스로의 피투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한 가지 계기가 필요합니다. 바로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더불어, 자신의 죽음을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고독감을 경험하게 되죠. 이때 인간은 극심한 불안을 호소하게 되며 자신의 부조리한 처지, 즉 스스로의 동의도 없이 세상에 던져진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안’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기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안을 통해 인간은 삶이란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죠.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문제 삼는 태도를 ‘실존’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동물과 달리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으며, 스스로의 고유한 ‘존재’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실존적 존재인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를 쉽게 상실하고 맙니다. 경쟁이 미덕이 되어 버린 사회에서 사람들은 세상이 요구하는 바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이죠. 예컨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어나 코딩을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도 단지 그것이 시대적 요구이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균일하고 몰개성항 존재가 되어 가는 거죠. 하이데거는 이를 ‘비본래적 실존’이라 말합니다. 앞서 살펴본 실존이 스스로의 고유한 존재를 찾아 나서는 삶이라면, 비본래적 실존은 자신의 고유성을 외면하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사는 삶을 의미하죠. 다시 말해 ‘실존’은 ‘존재’에 몰입하는 삶이며, ‘비본래적 실존’은 ‘존재’를 외면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본래적 실존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물을 목적으로 대합니다. 즉 사물의 고유한 ‘존재’를 긍정하기보다는 도처에 널린 ‘존재자’처럼 사물을 대하는 거죠. 이때 사물들은 일련의 목적 속에서 서로 연관을 맺으며 하나의 ‘세계’를 이루게 됩니다. 조금 어려운 대목이므로 간단한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컨대 망치는 망치질하는 사람과 망치질 당하는 못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망치일 수 있습니다. 만약 망치질과 못이 존재하지 않다면 망치는 더 이상 망치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겠죠. 이처럼 도구는 저 홀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도구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도구의 이러한 성질을 ‘지시’라고 설명합니다. 즉 망치와 망치질(하는 사람), 그리고 못이라는 요소들은 각각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지시하고 지시 받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제 기능을 하게 된다는 설명이죠. 이처럼 도구들은 일련의 목적 속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세계, 즉 ‘지시-연관 체계’5)를 이루게 됩니다.









다시 정리하면, 비본래적 실존 양식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물을 목적으로 대하고, 그러한 목적 속에서 사물들은 서로 연관을 맺으며 ‘지시-연관 체계’라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설명이죠. 따라서 우리는 사물을 대하는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각기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인간은 스스로가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저마다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이 같은 분석은 어린왕자의 여행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예컨대 어린왕자가 처음으로 찾아간 별에 살던 왕은 권력을 추구했습니다. 왕은 어린왕자를 보자마자 신하로 여겼을 뿐 아니라, 심지어 별마저도 자신의 지배 아래 있다고 여기는 교만한 모습을 보였죠. 즉 그에게 존재자들은 자신(왕)의 권력을 확인시켜 주는 수단에 불과했며, 그러한 지시-연관 체계 속에서 왕은 자기만의 권위주의적인 세계에 갇혀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밖의 다른 별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명예를 추구하는 허영장이는 남들이 본인을 찬양해야 한다는 착각 속에 살았으며, 술 마시는 게 부끄러운 알코올 중독자는 자기 연민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또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업가는 존재를 값으로만 평가하는 숫자의 세계 속에 살았으며, 성실한 가로등지기는 비록 남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았으나 정작 자기가 없는 세계를 살았습니다. 끝으로 지리학자는 산과 바다의 성스러운 존재는 보지 못한 채 오직 지식으로서의 산과 바다만 기록하는 관념의 세계 속에 살았죠. 이처럼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지시-연관 체계에 갇혀 있었으므로 어린왕자를 비롯한 모든 존재자를 도구로 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3.

길들이기

: 존재와의 관계 맺음


지구를 여행하던 어린왕자는 한 가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이제껏 어린왕자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믿었던 장미가 눈 앞에 무려 5,000송이나 피어 있던 것입니다. 어린왕자는 장미6)가 이 사실을 알면 어쩌나,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과 더불어 여태껏 그 흔한 장미를 유일하다고 생각한 자신을 부끄러이 여겼죠. 바로 그때 여우가 나타납니다.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말합니다. “길들인다는 건 인연을 맺는다는 뜻이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거지. 넌 내게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사람이고 나도 너에게 세상 오직 하나뿐인 여우가 되는 거야.” 이를 들은 어린왕자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길들인다는 것, 즉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라는 사실 말이죠. 따라서 어린왕자는 자기 별에 홀로 남아 있는 장미가 지구에 널린 5,000송이의 장미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여우는 덧붙여 말합니다. “무언가를 잘 보기 위해서는 오로지 마음으로 봐야 하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과거에 어린왕자는 장미의 이런저런 말들에 상처 받기도 했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장미의 진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어린왕자는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를 만나게 됩니다. 어린왕자는 이제껏 자신이 겪은 이야기들을 비행사에게 털어놓으며 이제 장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죠. 그런데 얼마 뒤 비행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합니다. 어린왕자가 뱀에게 시켜 자신에게 독을 쏘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왕자는 놀란 비행사를 보며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 내 별은 먼 곳에 있어서 내 몸을 버리지 않고는 갈 수 없어. 껍데기를 버린다고 해서 슬플 건 없지.” 비행사는 슬픈 예감이 들었지만 어린왕자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얼마 뒤 어린왕자는 비행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스스로 죽음에 듭니다. “별들은 정말 아름다워. 그건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한 송이 꽃 때문일 거야. (···) 사람들은 저마다 별을 가지고 있어. (···) 학자에게는 연구의 대상이고, 사업가에게는 금으로 보일 테지. (···) 아저씨는 세상 그 누구도 갖지 못한 별을 갖게 될 거야.






다시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앞서 소개했듯 존재자란 사물과, 인간, 그리고 자연 등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키며, 존재는 존재자들에 깃든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존재자는 그들의 고유한 존재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현대인들의 과학적 사고 속에서 존재자들은 오직 계산 가능한 조건들로 해체되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잃어버린 존재를 되찾기 위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시인이 되라고 말합니다(“인간의 소명은 시인으로서 지상에 거주하는 것이다”). 즉 존재자를 분석하고 관리하는 경영자의 마음이 아니라 존재자에 깃든 성스러움에 주목하는 시인의 마음을 가지라는 설명이죠. 예컨대 장석주 시인의 시 <대추 한 알>의 일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처럼 시인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고작 대추라는 존재자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과 자연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존재자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시선 대신 존재의 성스러움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시인이 되라고 주문했던 거죠.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데거의 유명한 명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대목에 등장하는 ‘언어’도 ‘시적 언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대상을 이론적으로 분석하려는 ‘과학적 언어’가 아니라 대상이 가진 고유성과 성스러움을 들여다보는 ‘시적 언어’를 뜻하는 거죠. 그렇다면 다시 동화 속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작중 여우는 길들임의 방법론을 묻는 어린왕자에게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참을성이 아주 많아야 하지. 먼저 내게서 거리를 두고 풀밭에 앉아 있어. 가끔씩 내가 너를 곁눈질로 쳐다볼 거야. 하지만 넌 아무 말도 해선 안 돼. 자고로 말이란 오해의 근본이기 때문이지.” 즉 여우의 말을 정리하면, 길들임이란 첫째로 인내를 요구하며, 또한 대상과의 거리 유지를 필요로 하고, 끝으로 언어적 접근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여우가 언급한 ‘언어’는 ‘과학적 언어’를 의미합니다. 대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도리어 대상에 대한 오해만 불러오기 때문이죠. 예컨대 똑 같은 대추를 보더라도 과학자는 대추의 효능만을 볼 것이고, 시인은 그 안에 깃든 생명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우의 말처럼 과학적인 언어로 존재자를 규정하려 할 것이 아니라, 존재자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꾸준하고 느긋한 시인의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동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어린왕자는 왜 죽음8)을 겪어야 했을까요?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부정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음이 주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인간은 그러한 진지하고 엄숙한 기분 속에서 평소엔 진부하게 보아 넘겼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경이’의 기분이라고 부릅니다. 경이에 빠진 인간은 세상의 모든 존재에 감탄할 수 있게 되죠. 다만 이러한 경이의 기분은 놀라움의 기분과는 사뭇 다릅니다. 놀라움은 뛰어난 것에 대한 감탄이지만 경이는 모든 것에 대한 감탄이죠. 예컨대 높은 산을 봤을 때 우리는 놀라움을 느낄 수 있지만, 경이에 빠진 인간은 마을의 흔한 동산조차 감탄하며 바라봅니다. 경이를 체험한 인간은 모든 존재자들이 내뿜는 무한한 광채, 이른바 ‘존재의 빛’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어린왕자의 죽음을 겪은 비행사 역시 경이의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그에게 밤하늘의 별은 더 이상 진부하고 의미 없는 별이 아닙니다. 그는 별 속에서 남들이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장미와 어린왕자의 죽음을 발견할 테니 말이죠. 즉 그에게 별빛은 존재의 빛이며, 그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중요한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오늘의 책,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소개를 마쳤습니다. 작중 어린왕자는 슬픈 기분이 들 때면 해 지는 모습이 보고 싶다 말합니다(“나는 기분이 울적할 때면, 해 지는 모습이 보고 싶어.” “해질 무렵이 정말 좋아.”). 심지어 어떤 날에는 해가 지는 것을 마흔 세 번이나 보았을 만큼 그는 해질 무렵을 좋아한다고 하죠. 과연 어린왕자가 그토록 노을을 사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명하게도 밝은 태양은 세상의 수많은 존재자들을 드러냅니다. 덕분에 우리가 경험하는 대낮의 세계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드러나는 밝은 세계라 할 수 있죠. 하지만 태양이 비추는 것은 존재자이지, 존재 그 자체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태양을 통해 드러나는 밝은 세계는 그저 눈만 있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존재자들의 세계인 것입니다. 어린왕자가 보고 싶었던 것은 존재자 너머의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어린왕자에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 믿는 어른들이 무척이나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즉 어린왕자에게 해질 무렵은 과학의 빛이 힘을 잃고 존재의 빛이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아무쪼록 눈에 보이는 존재자 너머로 존재의 성스러움을 감상할 수 있는 시인이 되길 소망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1)존재자는 ‘무엇이 존재하냐’는 질문의 답으로 가능한 것이라면, 존재는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냐’는 질문의 답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존재자가 ‘있’도록 할 수 있는 근본 방식, 혹은 존재자의 ‘드러남’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원인, 존재자의 '도래'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바로 '존재'입니다.


2)존재자를 측정과 계산이 가능한 조건들로만 이해하려는 현대인의 태도는 『어린왕자』 속 다음의 대목을 통해서도 부연됩니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꺼내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 애 목소리는 어때? 무슨 놀이를 제일 좋아하니? 그 애는 나비 수집을 좋아하니?” 이렇게 묻는 일은 절대 없다. “그 애는 몇 살이니? 형제는 몇 명이래? 그 애 아버지는 돈을 얼마나 벌어?” 질문들이 고작 이런 것들이다. 숫자를 통해서만 그 친구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 『어린왕자』 에서 비행사가 추측하건대 어린왕자가 살던 별은 아마도 ‘소혹성 B612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서술됩니다(물론 허구의 별이며, 상상의 소산이다). 비행사가 구태여 어림짐작하면서까지 그 이름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어른—하이데거 식으론 '세상사람'—에 대한 풍자로 해석 가능하죠. 다음은 ‘비행사'의 독백입니다.


“내가 소혹성 B612호에 대해 이토록 자세히 말하고 별의 번호까지 가르쳐주는 이유는 모두 어른들 때문이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4) 어린왕자는 성실한 가로등지기를 긍정적으로 언급합니다. 비록 가로등지기가 수동적이긴 할지라도 자기가 아닌 타인을 위해 성실하다는 점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어린왕자는 그와 친구가 되길 소망했지만 다만 별이 작아서 어쩔 수 없이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유난히 네 번째 별이 작았다는 것입니다. 늘 '남'을 위해 '나'의 공간을 내어주는 사람들은 정작 자기가 발 디딜 세계가 없기 마련입니다.


5) 본문에서 ‘지시-연관 체계’라는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도입이 다소 길어 지루하셨을 겁니다. 키워드를 나열하면 피투성, 실존, 비본래적 실존, 도구, 지시-연관 체계 순으로 정리됩니다. 논리의 흐름을 잘 파악하시면 각각의 개념들을 하나의 스토리로 꿰시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6) 사실 『어린왕자』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의 계보 속에서 B612호에 사는 아름다운 ‘장미’는 생텍쥐페리의 아내 ‘콘수엘로 드 생텍쥐페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콘수엘로를 사랑했으나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던 관계에 대한 남편 생텍쥐페리의 회한 내지는 늦은 사랑이 장미에 대한 어린왕자의 마음으로 투사되었던 거죠(B612호에 있는 화산은 콘수엘로의 출신 엘살바도르에 화산이 많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비튼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콘수엘로에 대한 생텍쥐페리의 책임이 장미에 대한 어린왕자의 책임으로 표현되었다고 보는 해석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본문에서는 하이데거 철학을 『어린왕자』 해석에 일관적으로 적용하고자 ‘장미’를 존재자로, ‘어린왕자’를 ‘현존재’로 소개했습니다. 이는 장미-어린왕자의 관계를 사물-인간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처럼 보일 여지가 다분하며, 이러한 해석은 전통적 해석과 상충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죠. 이러한 잠재적인 오해를 미리 해명하자면, 존재자는 사물과 인간, 자연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며, 따라서 인간은 존재자인 동시에 현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디폴트는 존재자이고 지향점은 현존재라 할 수도 있겠네요.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장미-어린왕자의 관계를 정리한다면, 어린왕자가 성장하기 전 둘의 관계는 존재자-존재자의 관계였으며, 성장 후의 관계는 존재(자)-현존재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 어린왕자가 지구에서 만난 상인과 나누는 다음의 대화는 특히 인상적입니다.


(상인이 팔고 있는 약은 갈증을 없애 주는 효능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시간을 많이 절약해 주거든. 전문가들이 계산을 해보았는데 일주일에 53분이나 절약된다는 구나.” “그럼 그 53분으로 뭘 하죠?” ‘만약 나에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53분이 있다면 신선한 물이 있는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갈 텐데…’


위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듯, 사람들은 물조차도 도구로 대합니다. 예컨대 물은 갈증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하는 거죠. 이때 물은 다른 도구, 즉 갈증을 해결해주는 약으로 대체 가능한 존재자입니다. 존재를 상실한 존재자는 이처럼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8) 어린왕자의 죽음은 다층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린왕자가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해석의 견지에서는 현대적 자아—과학적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며, 비행기 조종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에게 ‘불안’을 선사하기 위한 인간의 실재적 죽음, 즉 무력과 고독을 선사하는 의미로서의 죽음이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자는 어린왕자가 장미의 ‘말’에 집중했던 걸 후회한다는 고백을 통해 설득력을 얻으며, 후자는 비행기 조종사의 ‘회심’, 즉 어린왕자를 그리워하며 ‘별’을 ‘존재’로 보게 되는 모습을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현’은 ‘나타날 현(現)’으로서, 즉 인간(현존재)은 ‘존재가 드러나고 나타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가 인간을 통해 나타난다는 뜻이죠. 다시 말해 현존재로서 인간이 가진 책임은 존재자들이 그들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드러내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존재자를 과학적 분석의 대상으로만 삼아 도리어 존재를 상실하게 한다면 이는 현존재로서의 책임을 도외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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