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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May 27. 2021

①사르트르, "타자를 발견하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은 이제막 철학에 발을 뗀 이들에게 퍽 좋은 참고서가 아닐 수 없다. 쉽지만 얕지 않고, 넓지만 산만하지 않다. 사르트르, 레비나스, 푸코, 들뢰즈 등 비교적 일반 대중에게도 친숙한 철학자부터 블랑쇼, 크리스테바 등 전공자가 아니라면 생소한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사상가들의 분투를 알곡만 추려 성실히 기록한 책이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프랑스 현대 철학의 아름다운 서막을 열어젖힌 철학자 사르트르의 '타자론'을 소개한다. 아무쪼록 프랑스 현대철학의 맥을 짚는 데 요긴한 포스팅이 되길 바란다.



*참고로 책에서 사르트르 파트 해제를 맡은 이는 변광배 교수다. 외대 불어과 출신의 변광배 교수는 프랑스 몽펠리에 3대학에서 사르트르 연구를 마친 후 외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프랑스 철학 서적, 특히 사르트르 서적을 활발하게 집필해온 학자다. 포스팅에서 다뤄지는 내용은 전적으로 변광배 교수의 성취를 바탕으로 했으니, 만약 본 포스팅을 통해 사르트르 철학을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변광배 교수의 서적들을 추가로 읽어보길 권하는 바다.






1.일자와 타자


철학을 처음 공부하는 이들에겐 낯선 단어겠지만, 철학의 정원에 들어선 모든 이들이 채 몇 걸음도 못 걸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단어가 있다. 바로 '타자(autrui)'이다. 이는 일차적인 의미에선 '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철학적 세계에서 그 의미의 지평은 아득하게 뻗어 나간다. 우선 우리는 '타자'를 이해하기에 앞서 '일자(一者)'라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찍이 서양 철학 전통에서 일자는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다. 간단히 이해하자면, 일자란 이 세상의 가장 근원적인 원동력이자 절대자, 혹은 유일한 원천이자 제1의 원칙 등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철학을 처음 공부하면 형이상학이라는 익숙하고도 낯선 말을 자주 듣게 될 것이다. 형이상학의 의미를 제대로 정의하자면 다시 두터운 책 한 권 만큼의 논의가 추가로 필요하겠지만, 여기선 간단히 '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따져 묻는 학문' 쯤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쉽게 말해 일자는 만물의 발생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 힘인 셈이다. 이는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시대에 따라 다양한 탈을 뒤집어 쓴 채 나타났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이데아라 불리는 형이상학적 근본인으로 사유되었고, 중세에는 신이라는 관념을 옷입고 등장했으며, 근대로 넘어와서는 사유 주체로서의 인간, 즉 '나'라는 개념(여기에 혁혁한 공을 세운 건 코기토를 주창하며 등장한 데카르트이다)으로 나타났다. 이들 각각은 세상의 절대적 원인으로 사유되었다는 점에서 '일자'라는 맥락 안에 수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현대 철학의 주요한 사조라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강령을 이해하기가 수월해졌다. 쉽게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자에 대한 해체를 주된 운동 목표로 삼으니 말이다. 변광배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이 뭐냐는 물음에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기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서구철학사에서 중심을 차지했던 '일자'의 폭력으로 인해 주변부로 밀려났던 '타자'가 그 중심을 향해 획책한 반란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변광배 교수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타자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해 타자는 일자의 지배 아래 밀려난 주변부의 것들이다. 예컨대 이성주의 시대에 밀려난 광기의 위상(이를 고고학적으로 지적한 것이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이다)이라든가, 남성중심주의에 밀려난 여성의 지위(이에 대한 역전 운동이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으며, 여유가 된다면 여성의 타자성을 지적한 '보부아르'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자), 혹은 클래식 음악만 예술 대접 받는 시대에 맞서는 트로트 음악의 위용처럼 말이다. 이처럼 일자-타자의 대립쌍은 중심과 주변부의 대립, 즉 권력을 누리는 것과 억압 받는 것 사이의 요소들 모두에서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르트르가 프랑스 현대 철학에 미친 영향은 실로 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타자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을 최초로 시도한 학자가 바로 사르트르이니 말이다.


(왼쪽-보부아르, 오른쪽-사르트르)










2. 존재의 세 영역

:사물, 나, 타자


타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이어가보도록 하자. 사르트르에 따르면 존재는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하나는 '인간 존재'이고, 또 하나는 '사물 존재'이다. 이때 이 둘을 가르는 요소는 다름아닌 '의식conscience'이다. 쉽게 말해, 의식이 있으면 인간, 없으면 사물이라는 말이다. 나아가 사르트르는 이 둘을 각각 '대자 존재(인간)'와 '즉자 존재(사물)'로 명명한다. 전자의 경우, 즉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거리를 둘 수 있으며 스스로를 돌이키고 살필 수 있는 반성적 존재라는 점에서 '대자적'이라 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 즉 사물은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둘 수 없다는 점에서 '즉자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분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대자 존재', 즉 인간을 다시 둘로 구분한다. 바로 '나'와 '타자'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이 사르트르가 말하는 존재의 세 영역--사물, 나, 타자--에 대한 개괄이다.


사르트르는 먼저 '타자'의 존재를 가벼운 방법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아니, 타자가 가지는 일상적 위상에 대한 발랄한 통찰이랄까. 여하튼 그것은 바로 수치심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수치심은 '타자'의 존재를 전제하는 감정이다. 예컨대 길을 가던 중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발라당 넘어지는 것과, 그것을 타자에게 목격 당했을 때의 수치심은 질적으로 다르다. 전자의 수치심은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후자의 수치심은 타자의 불확실한 반응과, 혹은 나와 타자 사이의 측정 불가한 간극 사이에서 오는 0에서 무한대 사이의 조롱(?)에 맞서야 하는 수치이다. 즉 타자를 전제로 발생하는 수치심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며 극복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타자를 전제로 하는 수치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타자 그 자체에 대한 사유를 진지하게 임할 충분한 명분이 되어줄지 모른다.







3.타자

:나를 바라보는 자


타자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사르트르에 따르면 "타자란 나를 바라보는 자"이다. 즉 사르트르는 '시선' 개념을 통해 타자를 정의하고자 시도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 자신, 즉 '나' 자신의 시선에 대해 돌아보도록 하자. 우리가 타자를 바라볼 때 그를 사물로 바라보느냐, 혹은 인간으로 바라보느냐는 타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만약 우리가 타자를 사물로 바라본다면 그는 나의 시선에 닮긴 커다란 세계 속 하나의 장식으로 전락한다. 즉 '나'의 세계에서 사물이 차지하는 위상과 타자가 차지하는 위상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타자의 세계는 '나'의 세계 아래 잠식할 따름이며, 이때 '내'가 구성하고 조직하는 세계의 중심은 온전히 '나' 하나다. 따라서 '나'의 시선을 해체할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타자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대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이때 타자는 사물의 위상에서 도약하여 '나'의 세계를 소멸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눈'의 주체로 거듭난다. 다시 말해 '나'는 더 이상 이 세계의 유일한 시선이 아니며, 따라서 '나'는 타자의 시선 아래 포획될 수 있는 객체의 가능성을 부여 받는다. 사르트르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나'의 세계에 발생하는 '내출혈(hémorragie interne)'이다. 즉 '타자'가 '나'를 바라볼 때 '나'의 세계 위에 '타자'의 세계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이때 '나'의 세계는 '타자'의 세계로 유출되어 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방 안에 있는 '나'를 떠올려 보라. 이때 '나'의 세계 속에서 방 안은 온전히 '나'의 세계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조망할 수도 있고, 그저 한가로이 방 곳곳을 살펴보며 은근한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나'도 모르는 새 어떤 '타자'가 몰래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어떨까. 이때 '나'는 '타자'의 시선이 구축한 세계의 배경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즉 '타자'는 '나'의 세계를 훔쳐가는 특수한 존재이며 따라서 사르트르는 타자를 '나'의 세계 속에 생긴 '하나의 작은 균열'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4.신체

:시선의 대상


앞선 논의해서 타자는 '나를 바라보는 자', 즉 시선 개념을 통해 정의되었다. 이때 우리가 유념할 것은 시선의 대상으로 놓이는 것이 다름아닌 '신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타자에 의해 관찰되는 '나'는 엄밀히 말하면 '나의 신체'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에겐 '신체론'이 중요한 철학적 논의가 아닐 수 없다. 사르트르는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신체에 접근한다. 제1차원은 '대자-신체'이다. 이때 '대자'는 쉽게 말해 '나'를 의미한다(기억을 환기하기 위해 앞선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사르트르는 존재를 '인간 존재'인 '대자 존재', 그리고 '사물 존재'인 '즉자 존재'로 구분한다. 다만 '대자 존재'는 다시 '나'와 '타자'로 구분되는데 이때 이때 '나'가 '대자 존재'이며, '타자'는 '대타 존재'이다). 제1차원에서 '나'와 신체는 불가분의 상태, 즉 몰아의 경지에 이르며, 따라서 '나'의 의식과 신체는 마치 합일을 이룬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마치 케이지 위에 오른 격투기 선수가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 덕에 자신의 신체가 치명적인 상해를 입어도 이를 온전히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어서 제2차원은 '대타-신체'이다. 이는 즉 '나'의 신체가 타자의 시선에 포획된 상태(혹은 그 반대도 성립)를 가리키는 것으로, 예컨대 타인에게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타자의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몸을 가꾸는 상태를 상정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3차원은 '타자에 대한 대자 신체'이다. 이는 상술한 제2차원의 개념에 불확실함의 요소를 더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타자의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 특정한 행위를 수행할 수 있으나, 그러한 우리의 행위가 타자의 시선에 어떻게 해석될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즉 우리는 자기 자신이 타자에게 어떻게 내비칠지를 확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확실함을 뒤집어 쓴 채 대자로서의 신체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5.시선과 갈등

:주체가 누구냐


사르트르 철학에 관심을 가져본 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대목이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때 실존은 인간의 존재 양상을 표현하는 말로서, 즉 인간은 특정한 본질에 선행하여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예컨대 연필은 '글씨를 적기 위한 도구'로서의 본질을 갖고 있고, '안경'은 '착용한 이로 하여금 시력을 개선하는 것'으로서의 본질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에 반해 인간은 특정한 본질, 예컨대 학생, 남편, 아내, 정치인 등등 그 어떤 본질로도 규정되지 않는 '무'의 존재이다. 우리는 학생이 아니어도, 남편이 아니어도, 아내가 아니어도, 정치인이 아니어도,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니 말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을 부여 받지 않은 백지 상태로 존재하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본질을 창조해나갈 책임을 지게 한다. 이처럼 인간 존재가 자신 자신을 새로이 창조하는 과정을 가리켜 '기투(projet)'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시 시선 개념을 상기해보자. 앞서 말했듯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창조해 나갈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책임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나'도 기투하고, '타자'도 기투해야 한다. 애석하게도 이 대목에서 타자는 '나'의 기투를 방해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의 시선 속에 포획된 '나'는 객체화되어 '나'의 본질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와 '타자'는 갈등 관계를 이룬다. 서로가 서로의 시선 속에 포획되어 서로의 세계에 '내출혈'을 일으킬까 노심초사하는 갈등 관계 말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러한 투쟁 속에서 우리는 승격과 강등을 반복하게 된다. 객체가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승격이고, 그 반대가 강등이며, 승격의 단계에서 우리는 응시하는 존재로, 강등의 단계에서 우리는 응시당하는 존재로 변해버린다.


사르트르의 단편 <에로스트라트>에 등장하는 인물은 7층의 발코니에서 살기를 고집한다. 그에게 7층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곳이며, 즉 자신이 타자에게 응시 당하지 않을 수 있으며, 다만 자신은 타자를 응시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조망 권력을 갖는 곳으로 사유된다.


*참고로 사르트르는 신의 부재를 믿는 입장이지만 신에 대한 그의 관념적 정의에 따르면, 신이란 인간의 시선에 의해 '영원히 객체화되지 않는 시선'이라 규정된다.








6.타자와의 관계

:지옥이냐 천국이냐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타자는 '나'의 세계에 '내출혈'을 일으키며, 또한 '나'의 기투를 방해하고, '나'의 세계를 훔쳐가는 도적 같은 자이다. 그렇다면 타자는 '지옥'일까? 흥미롭게도 사르트르에 따르면 타자는 지옥인 동시에 천국일 수도, 즉 두 가지 상반된 존재론적 위상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사유된다. 바로 '지옥(enfer)'으로서의 타자와, '나와 나 자신을 연결해주는 필수불가결한 중재자'로서의 타자로서 말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앞서 설명했듯 타자는 그의 시선을 통해 '나'의 세계를 와해할 수 있으며, 이때 '나'는 타자의 시선 속에서 객체화된 포로로 전락한다. 지옥으로서의 타자에 의해 말이다. 반면 후자에 따르면 타자는 '내'가 스스로 보지 못하는 나의 '외부'를 발견해주는 생성의 시선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때 타자에 의해 조망되는 '나의 외부(mon dehors)', '나의 본성(ma nature)', '나의 비밀(mon secret)'은 나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의 존재근거를 이루는 강력한 실마리로 기능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건 나에 대한 진실을 얻으려면 나는 타자를 통과해야만 한다. 타자는 나의 존재에 필수불가결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나에 대해 가지는 인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타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의 비밀을 알려줄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두 가지가 가능하다. 먼저 제1태도는 이른바 '동화의 태도'로서, 즉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비밀'을 발견해준 타자의 시선에 부응하여, 타자가 '내'게 건넨 '나'의 존재 근거를 흡수하고자 노력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사르트르는 그 예로 사랑과 언어 등을 제시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주체로서 관계 맺어야 하며, 또한 언어 수행 속에서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 주체로서 관계 맺어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는 모두 실패로 끝난다. 시선과 시선의 투쟁 속에서 두 연인은 결국 주체의 자리를 뺏고 뺏기는 투쟁 관계를 벗어날 수 없으며, 언어 역시 듣는 자에 의해 쉴 새 없이 왜곡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면 제2태도는 '초월의 태도'로서, 즉 타자의 시선 속에 구성된 '나'의 존재를 '나'의 전부인양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뛰어넘고 초월하려는 태도를 뜻한다. 사르트르는 그 예로 사디즘과 성적 욕망 등을 제시한다. 사디즘의 주체는 상대를 굴복시키고 객체화하여 그의 자유를 빼앗으려 하고, 성적 욕망은 애무를 통해 타자의 신체를 '조각'하여 타자를 객체화하려 시도한다. 하지만 이 둘 모두 궁극적으로는 실패로 끝난다. 사디즘의 객체는 언제든지 사디즘의 주체에게 시선을 건네며 그를 객체화 할 수 있고(객체의 반란), 또한 성적 욕망 역시 성행위가 끝나고 나면 두 사람은 그저 독립적인 살 덩어리로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1태도와 제2태도 모두 최종적으론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으므로 사르트르는 나와 타자 간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무용한 수난(passion inutile)'을 겪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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