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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May 29. 2021

우리 모두의 사막

『어린왕자 그림 해석』, 신혜순

*유튜브 해설 : https://www.youtube.com/watch?v=VRKWaQm9nxc&t=317s




본 포스팅은 신혜순의 『어린왕자 그림 해석』이라는 미술 심리 서적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작품 『어린왕자』 리뷰는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sonss1992/222325809328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생텍쥐페리의 작품 『어린왕자』는 감동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아름다운 삽화로도 유명합니다. 익히 잘 알려진 어린왕자의 스케치 이외에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 장미에게 물을 주는 어린 왕자의 모습 등 소박하고 순수한 그림들이 전해지고 있죠. 다만 우리는 『어린왕자』의 환상적인 플롯에 집중하느라 미처 그림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탐구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생텍쥐페리가 남긴 삽화들을 통해 『어린왕자』의 숨겨진 의미를 미술 심리학적으로 조명한 오늘의 책, 신혜순의 『어린왕자 그림 해석』입니다.





1. 페르소나


고대 그리스의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커다란 탈을 쓰고 연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가면으로서, 즉 배우들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장치였죠. 바로 이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합니다. 즉 관객들이 보는 배우의 모습은 배우의 맨얼굴(참자아)이 아닌 페르소나, 즉 사회적 자아라고 할 수 있죠. 흥미롭게도 이러한 광경은 보통의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재현됩니다. 우리 역시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저마다 가면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죠. 예컨대 우리는 슬프지 않아도 슬픈 척 해야 할 때가 있고, 유쾌하지 않더라도 미소 지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회라는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맨얼굴을 감추고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성격을 뜻하는 영어 단어(personality)가 페르소나(persona)에서 기원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여태껏 우리가 자신의 성격이라고 믿어 왔던 특질조차 실은 사회 생활을 위해 후천적으로 발달된 성격일지도 모르니 말이죠. 따라서 우리는 그동안 페르소나로 덮어두고 외면했던 스스로의 맨얼굴을 들여다보려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참된 자아가 결국 가면에 완전히 잡아 먹힐지도 모르니 말이죠.



동화 『어린왕자』에는 페르소나에 대한 생텍쥐페리의 철학이 곧잘 드러나곤 합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맨 첫번째 그림을 보겠습니다.



그림에서 뱀은 연약하고 어린 동물을 칭칭 감싸고 있죠. 예부터 뱀은 생명력과 영적인 활력을 상징했습니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의술과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도 뱀이 감겨 있었으며, 탄생과 죽음의 반복을 상징하는 우로보로스에도 꼬리를 삼키는 뱀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뱀은 이미 오래전부터 강인한 생명력과 영적인 힘을 지닌 존재로 사유되어 왔죠. 따라서 뱀에게 사로잡힌 어린 동물은 곧 삼켜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즉 뱀의 강인한 생명력은 그 반대편에서 속박과 불안이라는 반대 급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뱀은 우리의 맨얼굴을 속박하는 외부 세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강력한 외부 세계의 질서는 우리의 연약한 본질적 자아를 구속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죠. 이는 다음의 그림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림에서 코끼리는 뱀에게 삼켜져 있습니다. 외부 세계의 강력한 힘이 마침내 우리의 본질적인 자아를 질식하게 하고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는 거죠.1) 그 결과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림 속의 코끼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림을 모자로 인식하게 됩니다.



여기서 모자는 사회적 격식, 혹은 머리에 쓴다는 점에서 이성과 사고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즉 본질적 자아를 상실하고 사회적 자아로 인식되는 거죠. 작중 그림을 그린 주인공은 혹여나 그림 속에 숨은 코끼리를 발견해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왜 모자를 그렸냐는 말뿐이었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코끼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화 주제에 맞추려고 노력하죠. 즉 맨얼굴의 자아를 포기하고 비로소 페르소나를 쓰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주인공은 사막에서 어린왕자를 만나게 됩니다.2) 이는 주인공이 어릴 적 잃어버린 자기 자신, 즉 맨얼굴의 자아로 해석될 수 있죠. 이윽고 어린왕자는 주인공에게 양을 그려 달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 어떤 외부의 요청이라기보다 주인공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실존적인 요청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잠시 후 주인공이 완성한 양 그림은 어린왕자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주인공이 그린 양의 모습들이 어린왕자의 순수함을 만족시키기엔 너무나도 현실적이었기 때문이죠. 즉 이러한 두 사람의 대립은 상상력과 순수함을 요청하는 참자아(어린왕자)와, 현실성과 합리를 추구하는 사회적 자아(주인공의 페르소나) 사이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주인공은 잠시 후 상자를 그리며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주인공은 상자 안에 양이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죠. 어린왕자는 상자를 마음에 들어 했으며, 이로써 주인공은 참된 자아와의 소통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됩니다. 참고로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양은 희생제의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제물 중 하나로, 즉 주인공이 페르소나를 벗기 위해 필요한 수난과 부활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페르소나에 대한 풍자는 한 천문학자의 모습을 통해 더욱 적나라하게 고발됩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 발견한 별을 천문학 회의에서 자신 있게 발표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남루한 옷차림 때문인지 천문학자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천문학자가 양복으로 고쳐 입고 똑 같은 내용을 발표하자 그제서야 사람들은 천문학자의 발표 내용을 믿게 되죠. 이처럼 발표의 내용과 본질보다 규범이나 제복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본질적 자아보다 페르소나를 중시하는 세태를 풍자하는 모습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페르소나로부터 벗어나 맨얼굴의 자아를 대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어린왕자는 자신의 별을 떠나기 전에 화산을 꼼꼼히 청소합니다. 이때 화산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근원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3) 즉 맨얼굴의 자아를 대면하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의 솔직한 감정에 주목해야 한다는 거죠. 다만 유감스럽게도 사회적 코드에 익숙해진 우리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에 집중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곤 합니다. 원만한 사회 생활을 위해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의 감정을 외면하고 억압하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화산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우리 자신의 은밀한 속마음에 다가서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감정을 대면하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로 끝내 페르소나를 벗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2. 악무한


헤겔 철학의 용어 중 악무한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쉽게 말해 끝나지 않는 무한 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즉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끝없이 나아가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의미하죠.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괴테는 “인생은 속력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을 남긴 바 있으며, 마하트만 간디는 “방향이 잘못되면 속도는 아무 의미 없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우리는 무한한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악무한의 굴레에 빠져든다는 거죠. 우리는 어린 왕자의 여행을 통해 악무한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어린왕자가 맨 처음 방문한 별에 살던 왕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왕은 보기에도 불편한 의자와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있죠. 이는 왕의 권력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으로 기능하는 동시에 왕이 개인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불편함을 의미합니다. 즉 강한 권력에 비례하는 개인의 쓸쓸함을 나타내는 바이죠. 뿐만 아니라 왕의 옷에 새겨진 수많은 별들은 하늘의 높은 권력에 대한 그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왕은 힘이 있으면 고독하지 않을 것이라 믿지만, 정작 힘을 추구할수록 더욱 고독해지는 악무한의 굴레에 빠져 있는 거죠. 이는 어린왕자가 방문한 모든 별에서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예컨대 주정뱅이는 술 마신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며, 사업가는 풍요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지만 정작 일을 할수록 마음이 가난해지는 악무한의 굴레에 빠져 들죠. 이처럼 내면의 고독을 외면하고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행위는 도리어 더 극심한 고독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방향이 잘못된 이상 속도는 공허한 자기 만족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이로써 오늘의 책, 신혜순의 『어린왕자 그림해석』을 아주 간단히 소개해드렸습니다. 『어린왕자』에서 작중 비행사는 뜻밖의 사고로 사막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막에서 어린왕자를 만나게 되죠. 그런 의미에서 사막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막의 침묵은 의미 없이 반복되는 공허한 수다를 멈추도록 돕기 때문이죠. 따라서 삶의 동력을 상실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건 저마다의 사막이며, 그 멈춤과 고요의 시공간 속에서 우리는 자기만의 어린왕자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사막은 무의미한 공간으로 사유되곤 합니다. 내면의 결핍과 쓸쓸함을 직면하려 하기보다 고독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에 익숙한 현대인은 텅 빈 사막을 화려한 도시로 가꾸기 위해 애쓰죠. 그러나 이는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기만 하는 악무한의 굴레에 지나지 않습니다. 권력이나 명예, 혹은 돈을 통해 제아무리 자신의 사회적 자아를 살찌울지라도 페르소나 뒤에 울고 있는 맨얼굴의 자아를 달랠 길은 없으니 말이죠. 아무쪼록 이 짧은 글이 멈춤과 침묵을 낳는 한 편의 사막이 되었길 바라며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1) 작고 얇은 뱀이 자기보다 훨씬 커다란 덩치의 코끼리를 삼킨다는 역설은 페르소나에 가린 우리의 ‘맨얼굴’이 실은 얼마나 거대하고 영웅적인 자아인가, 하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2) 주인공은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 불시착하게 됩니다. 이는 페르소나로 살아가는 인간 삶의 근원적인 동력 부족을 고발하는 듯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내면의 참자아를 상실한 채 사회적 자아로 살아가다 보면 자기 자신이 고갈되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하죠. 또한 사막은 고독과 사색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주인공이 어린왕자를 대면한 것은, 고독과 사색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존재(참자아)를 궁구할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3) 화산을 청소하는 것을 ‘책임’과 관련하여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존재론에 대한 생텍쥐페리의 고찰을 살펴보면 특히 그의 작품 『인간의 대지』를 통해 드러나듯 ‘관계’와 ‘책임’에 대한 철학이 두드러지곤 합니다. 작품에서 그는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야. 그것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참함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고." 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화산을 청소하는 어린왕자의 모습은 별을 떠나기 전에도 자신의 맡은 바 역할과 관계에 충실하려는 존재적 노력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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