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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May 29. 2021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박찬국


철학자가 지향해야 할 학자적 덕목 중 하나는 단연 '희의(skepticism)'이다. 요컨대 자명하게 여겨지는 것에 대해 '과연 그러한가'라고 따져 묻는 태도 말이다. 이는 우리의 익숙한 사고 전통에 제동을 걸어 새로운 우주로 들어서기 위한 관문이자, 장차 유익한 균열을 불러올 씨앗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자들은 견고한 우상의 텃밭에 차가운 균열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일지도 모르겠다. 그 중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개념에 균열을 내려고 시도했다. 이를테면, 존재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과연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맞냐, 라는 일면 당연한(?) 질문을 던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진의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일상적 사고 습관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그것과, 그가 밝혀내려는 참된 '존재'의 의미가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는 무엇이며, 존재하는 인간의 삶이란 또 무엇일지, 박찬국의 친절한 설명으로 들여다보는 하이데거 입문서,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이다.







1.고향 상실의 시대



하이데거에 따르면 바야흐로 현대는 '고향 상실의 시대'이다. 그가 뜻하는 고향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정과 깊은 유대감이 있는 곳, 그리하여 어느 누구든 느긋한 마음으로 안정된 나날을 영위하며, 늘 사랑이 샘솟는 곳을 가리킨다. 그에 반해 우리가 몸담은 현실은 뒤쳐지지 않기 위해 늘 스스로를 채근해야 하는 곳, 적응하기 위해 분투를 벌이느라 늘상 피로를 호소하는 곳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잃어버린 '고향'을 늘 그리워한다. 예컨대 우리는 고향에서 누렸던 사랑과 휴식, 안정을 갈구한다. 마치 뭇어른들이 동심을 잃고나서야 그것을 그리워하듯, 현대인들은 고향을 떠나고 나서야 그곳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의 그리움은 해결될 수 없는 공허한 욕망이다. 모든 가치를 양적으로 환산하는 현실에서 사랑은 무조건적 교감이 아닌 조건의 계산과 교환을 전제하며, 휴식은 여행 산업 속으로, 안정은 임금과 복지로 어설프게 대체되어 버렸지 않던가. 이로써 사람들은 진정으로 고향을 상실하게 되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면서, 정작 그것을 가졌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이제 우리는 계산할 수 없었던 옛고향의 가치들을, 계산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현대의 대체물로 위로 받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그 근본 원인 중 하나로 '과학의 종교화'를 꼽는다. 여기서 그가 '종교화'라는 날선 워딩을 사용한 것은 현대인의 사고 습관 속에 자리한 과학의 위상 때문이다. 마치 중세인들이 진리는 '신'을 통해 드러난다고 믿었던 바와 같이 현대인들은 진리가 '과학'을 통해 드러난다고 믿는다. 즉 오늘날 과학의 바깥은 비이성과 비논리의 영역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렇듯 과학이 종교화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상(존재자)을 오직 과학 속에서 이해하려 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존재자와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자'란 인간과 자연, 그리고 모든 사물이다. 예컨대 우리가 덮고 자는 이불, 지금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 쓰고 있는 안경, 가족, 친구, 태양 등등, 우리의 일상적 사고에서 '존재한다'라고 믿어지는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존재자인 것이다. 반면 '존재'는 존재자가 우리에게 현전할 수 있도록 돕는 가능 근거로서, 쉽게 말해 존재자들의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을 뜻한다. 다만 현대인은 '존재'를 쉽게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앞서 하이데거가 말한 대로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 버렸으니 말이다. 바로 그 배경에 '과학의 종교화'가 자리잡고 있다. 현대인은 과학적 사고 속에서 대상을 바라보려는 습관을 온 몸으로 익혔고, 따라서 우리는 과학적 사고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존재가 되었다. 즉 인간은 과학적 사고를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주체가 아니고, 과학적 사고의 틀에 갇혀 버린 존재가 된 것이다. 이제 현대인은 존재자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분류하여 통제하려는 경영자가 되길 자처하며, 존재자의 독자적인 존재, 존재자의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을 발견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애초에 이론적으로 해명될 수 없는 '존재'라는 성질은, 과학적 사고 속에서는 결코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인간의 이론적 파악을 거부하며 스스로를 은닉하는 '존재'--'존재가 자신을 은닉한다'--의 특성으로 인해 존재가 빠진 존재자만 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가 이 땅에 존재를 회복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2.경이와 존재 경험



존재자에게서 존재를 발견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존재자를 성스러운 것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뜻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경험은 '경이'라는 기분 속에서 가능하다. 경이란 말 그대로 존재자의 '존재' 자체를 감탄하며 바라볼 수 있는 기분을 뜻한다. 이러한 '경이'는 '놀라움'과는 구분된다. 놀라움은 뛰어난 것에 대한 감탄이지만, 경이는 존재를 우열의 평가에서 바라보지 않고 존재 그 자체에 감탄할 수 있도록 돕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높은 산꼭대기의 깎아지른듯한 절경에 감탄하는 것이 놀라움이라면, 경이는 어느 동네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동산을 보고서도 감탄할 수 있는 기분이다. 이는 존재자의 외형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에 깃든 고유하고 성스러운 '존재'를 발견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경이 속에서 존재자를 바라보며 그것의 고유한 존재를 경험하는 것을 가리켜 '존재 경험'이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향 상실의 시대'는 존재 경험이 상실된 시대라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막상 '존재'가 사라져버리자 인간은 고독을 달래기 위해 그럴싸한 대체물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술이나 마약 같은 도취적인 대체품들은 물론이거니와 부나 명예에 이르는 추상적 가치들이 예에 속한다(박찬국의 지적에 따르면 이처럼 인간이 대체물을 만들어 고독을 달래려는 현상은 에리히프롬이 제안했던 네크로필리아, 즉 인공물에 대한 현대인의 애착--가령 자신의 아내가 다쳤을 때보다 자동차가 망가졌을 때 더욱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견주어 생각해볼 수 있다).



여하튼 경이는 진부하게 보아 넘겼던 것들에 감탄할 수 있는 중요한 기분이다. 이때 우리는 세계 전체를 놀라운 것으로 경험하며, 그 안에 깃든 존재를 면밀히 바라볼 의지를 갖게 된다. 즉 경이의 기분 속에서야 인간은 비로소 세상의 숨겨진 내적 세계, 그 고요하면서도 웅장한 비밀을 품고 있는 신비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주의 깊은 '바라봄' 속에서 드디어 사물은 자기만이 가진 빛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이를 '존재의 빛'이라 한다. 이는 사물에 들어찬 무한한 의미로 출렁이는 신비로운 빛이며, 인간의 과학적 분석을 뛰어넘는 고차원의 빛이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빛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로 '시인'을 꼽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인은 존재자에 숨은 존재를 발견하는 자들이다. 시인은 경이라는 근본 기분 속에서 존재자에 깃든 비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눈으로 볼 수 없는 심원한 무언가를 들여다보는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말한다. '인간은 본래 시인이며 시인으로서 지상에 거주해야 한다' 즉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건네는 제안은 경영인이나 기술인처럼 존재자를 지배의 대상으로 보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존재 그 자체의 신비를 긍정하고 발견할 수 있는 시인의 마음을 지향하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또다시 말한다. '시적인 태도란 사물들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의지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고, 이러한 태도에서야말로 사람들은 자신의 진리를 스스로 드러낸다.'





3.현존재의 의무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한다. 존재자는 '있음'으로 도래하여 현전하는 모든 것, 즉 인간과 사물, 자연을 통칭하며, 존재는 존재자들의 가능근거이자 근본힘, 즉 존재자들의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이다. 과학적 사고만이 정답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사람들은 존재자를 이해하고 분석하여 통제하려고만 한다. 그 과정에서 존재자는 오직 계산가능한 조건들로 해체되어 버렸고, 즉 존재는 존재자로부터 빠져 달아나버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경이의 기분 속에서 존재자를 고요히 바라볼 수 있는 시인의 태도이다. 여기까지가 지금껏 살펴본 내용이다.


앞서 언급한 내용을 재정의하면, 과학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계산적 사유'라고 하며, 경이의 기분 속에서 시인의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감상적 사유'라 한다. 계산적 사유에 익숙한 현대인은 자꾸만 사물을 이해하려 하고 분석하려 한다. 현대인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채로는 사물을 두지 못한다. 그저 존재하는 그대로는 두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반면 감상적 사유는 사물의 고유한 존재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달리 말하자면, 감상적 사유를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존재자의 '존재'가 드러나도록 돕는 역할을 맡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하이데거가 인간을 '현-존재'라 부르는 이유이다. '현존재'에서 '현'은 '나타날 현(現)'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존재자의 존재가 드러나고 나타나는 장'이다. 이는 인간의 책임이며 의무이다. 존재가 존재자로부터 달아난 작금의 사태는 인간이 현존재로서의 의무를 방기한 결과이다.







4.죽음과 불안


현대인에게 시인의 태도를 요구하는 하이데거의 말은 특히 요즘 같은 때에 철없고 한가로운 소리로 들리기 딱 좋다. 모두가 도태되지 않기 위해 분주하게 살아가는 때에 사물의 존재를 여유롭고 그윽하게 바라보라는 것은 현실에 치여 지친 현대인에게 공연한 피로만 선사할 훈화 말씀으로 들리기 딱 좋다. 하지만 동화 『어린왕자』를 떠올려보자. 어린왕자는 무엇이 중요한 줄도 모른 채 바쁘게 살아가는 어른들을 보며 '어른들은 모두 이상해' 라는 말을 하염없이 되뇌인다. 어린왕자가 어른들을 보았던 시선을 빌려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의 분주함은 무엇을 위한 분주함일까. 에리히 프롬이 말한 네크로필리아의 사례처럼 우리 역시 인공물들을 사랑하느라 정작 생명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하이데거의 이야기처럼 존재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할 대체물만 만드는 데 혈안이었던 건 아닐까. 이러한 지점에서 '죽음'이라는 사건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작용 가능하다.


자명하게도 그 누구든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또한 그 누구도 우리의 죽음을 대신 짊어질 수 없다. 이때 전자는 우리에게 무력감을, 후자는 고독감을 준다. 이러한 기분 속에서 인간은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 '죽음'이라는 관념이 없이 그저 때가 되면 죽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죽음'을 상상하고 두려워하며 죽음을 거꾸로 뒤집어 낸 '삶'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의 삶과 존재를 문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을 실존적 존재라 부른다. 실존이란 쉽게 말해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뜻한다. 이는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르트르는 의식 여부를 기준으로 인간을 대자 존재로, 사물을 즉자 존재로 구분하지 않았던가. 즉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반성적 존재이며, 바로 그 거리 속에서 실존적 고민이 인간의 삶을 찬란하게 꽃피울 가능성을 간직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애에서 죽음은 바로 그 실존적 고민을 인간에게로 현전하게 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근원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은 삶의 찬란함을 송두리째 뒤흔들며 삶의 허무와 무상감을 느끼도록 도우니 말이다. 예컨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에게 돈이나 명예, 쾌락 등이 차지할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인간의 실존적 고민을 도래하게 하는 것은 죽음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근본 기분' 중 하나, 바로 '불안'이다. 불안은 공포와는 구분하여 이해해야만 한다. 공포란 특정한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불안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의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다. 바로 그 미지의 두려움 속에서 인간은 여태껏 중요하게 생각해왔던 가치들을 다시금 숙고하게 된다. 즉 '불안에 빠진 인간'은 고독한 단독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대면하게 되며, 이때 그는 지금껏 발 디뎠던 친숙하고도 익숙한 세상에 의지할 수 없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제서야 인간은 존재자 너머의 존재를 숙고할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다만 이것만으론 아직 완벽하지 않다. 이때 인간은 단지 일상적 삶의 허망함을 감각적으로 체험했을 뿐 아직 친숙한 세계에 대한 애착을 벗어던진 단계는 아니다. 불안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존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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