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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un 20. 2021

소유: 단 하나의 욕망

장 자크 루소,『인간 불평등 기원론』

*유튜브 해설: https://www.youtube.com/watch?v=oFtsno-wuhI



오늘날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 중 하나는 다름아닌 평등입니다. 예컨대 양성평등이라든가, 기회의 평등, 교육의 평등, 그 밖에도 수없이 다양한 평등의 갈래가 있죠. 그 결과 정치권에서는 직업 내 성비율을 5대 5로 맞추는 할당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으며, 또한 학력과 출신을 기재하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 혹은 교육의 기회 균등을 명분으로 한 자사고 폐지에 이르기까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담론들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처럼 평등에 대한 정치적 논의가 활발한 현상은 뒤집어 말하면 현실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연 이 같은 불평등의 역사는 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가상의 자연상태를 상상하는 사유실험을 통해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추적한 오늘의 책, 장 자크 루소1)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2)입니다.







1.자연상태와 미개인


먼저 루소의 핵심 주장을 간단히 개괄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본래 평등한 삶을 누렸으나, 사회가 형성되고 사유재산이 인정되기 시작하자 자유와 평등 대신 속박과 불평등이 도래하게 되었다.’ 즉 루소의 논리를 정리하면 작금의 문명 사회에서 보이는 불평등의 원인은 다름아닌 사유재산이며, 이는 과거의 자연 상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문명의 소산이라는 이야기이죠. 따라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논리적 흐름은 자연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서술로 시작하여 자연 상태가 파괴되는 과정, 그리고 소유라는 관념이 인간 불평등을 초래하는 과정의 순서로 전개됩니다. 따라서 먼저 루소가 뜻하는 자연 상태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루소가 말하는 자연 상태는 문명 사회(사실 ‘시민 사회’라는 말이 더 적절합니다)와 대립되는 상상 속의 시공간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 상태3)란 역사 속에 실재했던 시공간이 아니라 루소가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상상한 가설적인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죠. 루소가 이처럼 자연 상태라는 개념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가 보기에 불평등은 문명 사회의 부작용인 것으로 보였으며, 따라서 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의 자연 상태를 분석해야만 불평등의 비밀을 풀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던 거죠. 이때 루소가 자연 상태를 사유하기 위해 선택한 추론 방식은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인위적인 것들을 하나씩 소거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스마트폰도, 거대한 기업도, 혹은 화폐도, 심지어 그 어떠한 사회 계약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를 구속하는 외적 강제가 없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바로 자연 상태의 모습이죠. 루소는 그러한 자연 상태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미개인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때 미개인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며, 어떠한 문명의 혜택에도 기대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라 할 수 있죠.



루소에 따르면 미개인의 대표적인 특징 두 가지는 자기애와 연민입니다. 첫째로 자기애란 자기 자신의 보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즉 미개인들의 개별적인 생존을 가능케하는 원리라 할 수 있고요, 둘째로 연민이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즉 미개인들의 상호 생존을 가능케 하는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미개인들이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자기 보존을 위한 자기애만 가진 존재였다면 그들은 타인을 해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루소가 상상했던 이상적인 자연 상태와는 거리가 멀죠. 따라서 루소는 개별적 보존과 상호적 보존이 조화를 이루는 자연 상태의 가설을 성립시키기 위해 미개인의 특징으로 자기애와 연민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미개인은 문명인과 비교하여 어떤 강점을 지니고 있을까요?


1) 첫째로 미개인은 강인한 신체를 자랑합니다. 현대인과 달리 도구에 기댈 수 없었던 미개인들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자연에 적응함으로써 신체 능력 또한 발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예컨대 문명인은 커다란 나무를 자르기 위해 톱이라는 도구에 의지하는 반면, 도구가 없는 미개인들은 나무를 자르기 위한 힘을 키울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자연스레 강한 신체를 지니게 되었다는 거죠. 이는 마치 야생 동물들이 인간의 손을 타는 가축이 되고 나면 약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이를 통해 루소가 주장하고 싶었던 점은 도구라는 인간적 문명이 도리어 인간을 약하게 만든다는 이야기4)이죠. 2)둘째로 미개인은 문명인들이 호소하는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루소에 따르면 오늘날 존재하는 수많은 질병들 대부분은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발생한 부작용이라 할 수 있죠. 예컨대 풍족한 음식이 가져오는 소화불량이라든가,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 혹은 인간 관계로 인한 우울증 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질병5)이라는 것입니다. 3)끝으로 미개인은 문명인보다 훨씬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우선 그들은 공동생활에 대한 관념이 없었으므로 오직 자신의 보존에만 관심을 갖고 이곳저곳을 자유로이 떠돌아다녔을 것입니다. 또한 무리를 짓지 않으므로 특별히 소통할 대상도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정교한 언어 능력도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언어가 발달하지 않으니 고도의 사고가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번민에 사로잡힐 염려도 없었을 테죠. 뿐만 아니라 미개인들은 욕망의 크기도 무척 작아서 쉽게 만족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무언가를 보관하거나 소유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미개인들은 쉽게 자족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 루소의 설명이죠. 그렇다면 이러한 자연 상태는 어떠한 이유로 파괴되어 버리고 만 걸까요?





2.자연상태의 파괴

: 완성가능성


루소에 따르면 자연 상태가 파괴된 근본적인 이유는 완성가능성이라는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완성가능성이란 자기 자신을 개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것으로, 즉 인간은 완성가능성을 통해 과거의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로 거듭날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죠. 예컨대 동물들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살아가는 모습이 크게 변함없지만, 인간의 생활 모습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은 주어진 자연 환경에 그대로 순응하며 살아갈 뿐이지만, 인간은 완성가능성을 발휘하여 자연적인 규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죠. 즉 미개인들은 완성가능성을 발휘하며 점차 문명을 건설해 나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 자연 상태는 서서히 훼손되어 갔다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소의 설명을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루소에 따르면 최초의 미개인들은 자기 보존의 본능에 따라 자연에 적응하고 힘을 키우며 개별적으로 살아갔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성욕에 끌려 자유롭게 이성과 결합하곤 했죠. 하지만 아직 가족이라는 관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던 터라 공동체를 이루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개인들은 생존 과정에서 점차 개별적인 어려움을 겪기 시작합니다. 그로 인해 미개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치는 것이 자기 자신의 보존에도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즉 미개인들의 보존 욕구는 개체의 보존에서 종 전체의 보존으로 확대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공동체 안의 구성원들과 더 긴밀하게 의사소통해야 할 필요가 생겼으며 따라서 언어가 발달하게 되죠. 또한 언어의 발달은 그들의 사고력을 성숙시켰으며, 이윽고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관념을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를테면 누가 더 아름답고 추한가와 같은 미추에 대한 관념이라든가, 혹은 누가 더 강하고 약하냐 하는 힘에 대한 관념처럼 말이죠.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소유라는 관념의 탄생입니다. 공동체에 속한 미개인들은 자연스레 가족이라는 개념을 학습하게 되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나의 가족과 남의 가족을 구별하게 되고, 나아가 우리 집, 우리 재산, 우리 물건 등 소유라는 관념을 인지하게 된 것입니다.



루소에 따르면 본격적인 비극은 소유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은 소유라는 관념을 통해 나의 재산과 타인의 재산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자기 보존 욕구에 따라 자신의 재산에 더 큰 애착을 갖게 되죠. 나아가 사람들은 뒤이어 발달한 야금술과 농업 기술을 통해 열심히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각자 소유하고 있는 재산의 양에 격차가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따라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도록 꿈꾸죠. 이로써 사람들의 가치 체계는 생존 욕구로부터 소유 욕구로 역전되어 버리고 맙니다. 즉 소유는 곧 생존과 다름아니며, 따라서 사람들은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기 위해 기꺼이 타인의 것을 뺏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부자들은 빈자들의 표적이 됩니다. 더 많이 소유한 부자일수록 더 커다란 위험에 직면하게 된 거죠. 이에 부자들은 법을 정비하여 빈자들에겐 불리하고 부자들에겐 유리하도록 시스템을 바꿔 나갑니다. 그들이 목표하는 바는 부자들에게 위협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꾀어 도리어 부자들을 보호하도록 조작하는 거죠.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예시로 오늘날 광화문의 시위 현장을 떠올려보셔도 좋습니다. 시위를 하는 사람, 그리고 시위를 막는 말단 경찰들 모두 부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죠. 즉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법과 준칙을 통해 자신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또한 불평등은 법에 의해 합법화되며, 회사원들의 궂은 노동은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로써 오늘의 책,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아주 간단히 소개해드렸습니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 세계에 불평등이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는 소유라는 관념의 탄생입니다. 소유가 발생하기 이전의 미개인들은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할 수 있는 연민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나와 남을 하나로 여기는 역지사지의 능력을 지닌 존재였죠. 하지만 소유라는 관념이 발생함과 더불어 미개인들은 연민의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나의 재산과 남의 재산을 구별할 수 있게 되자 나와 남은 철저히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죠. 이로써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는 ‘나는 소유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의 도식으로 해체됩니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화폐 경제의 시대에서 인간의 소유 욕구는 오직 화폐 그 자체에 대한 열망으로 아주 비좁게 축소되어 버렸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인간의 무한하고 다채로웠던 욕망들이 오직 돈이라는 단 하나의 욕망으로 지나치게 단순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살아 있지 않은 돈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끼려는 역설적인 소망을 갖게 된 것이죠. 이러한 맥락에서 루소의 철학을 현실적으로 계승해 본다면, 비록 오늘날 우리가 소유라는 관념을 철폐하여 자연 상태로 회기할 순 없을 지라도 무엇을 소유하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진 않을까요? 아무쪼록 ‘소유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길 바라며 영상을 마칩니다. 아울러 영상 제작을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혜윰책방이었습니다.





1) 장 자크 루소는 171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계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루소는 자식교육에 무관심했던 아버지 탓에 변변한 교육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이때의 경험은 향후 그의 교육철학이 담긴 저서 『에밀』을 집필할 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후의 루소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으며 방랑의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던 루소에게 한 가지 행운이 찾아오는데요. 그건 바로 바랑 부인을 만나게 된 일입니다. 루소는 그녀 덕분에 경제적 안정 뿐만 아니라 못 다 이룬 공부에도 전념할 수 있게 됩니다. 게다가 당대의 계몽주의 지식인들, 이를테면 디드로나 콩디야크 같은 사람들과도 지적인 교류를 펼칠 기회를 갖게 되며 루소의 사유는 더욱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들로는 『사회계약론』, 『에밀』, 『인간 불평등 기원론』 등이 있는데요. 이들 저서에서 한결같이 루소는 사회 구조가 인간에게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폭로하는 등 다소 급진적인 사상을 펼친 탓에 당대의 계몽 지식인들로부터 숱한 비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2)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당시 한 아카데미가 주최한 공모전에 루소가 제출한 논문입니다. 해당 공모전의 주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 루소는 이 주제를 통해 인간 불평등의 기원이 다름 아닌 역사의 진보 속에 있음을 폭로하고자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 상태를 거스르고 자꾸만 발전되어가는 문명 때문에 인간 사이에 불평등이 도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주제 의식 아래 쓰여진 논문의 구성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요. 먼저 1부에서는 자연 상태가 무엇이며, 자연상태에서의 인간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죽 서술하고 있고요, 이어지는 2부에서는 1부에서 논의된 자연 상태가 무엇 때문에 훼손되었는지, 그리고 훼손의 결과로 인간 사회에 닥쳐온 불평등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 사실 ‘자연 상태’라는 화두는 17세기 중반 이후 수많은 정치 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정치 철학자들이 천착한 주제는 시민 사회의 정당성을 밝혀내는 것이었는데, 예컨대 자연 상태(즉 시민 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의 사회)의 야수성을 폭로함으로써 시민 사회의 필연성을 입증하려는 식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소의 주장, 즉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선언은 시민 사회의 철학적 정당성을 마련하려는 사상가들과는 정반대의 행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4)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 살아가는 미개인이 오늘날 문명인보다 강한 신체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신체 능력의 차이가 도구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도구에 기댈 수 있는 문명인과 달리 미개인은 도구가 없이도 특정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신체 능력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죠. 그런데 일부에선 이 같은 루소의 주장에 대한 반례로 신체증강기술을 제시하곤 합니다. 즉 도구가 인간의 신체 내에 삽입되어 도구 자체가 인간의 ‘바깥’으로 사유될 수 없는 경우라면 도구의 해악에 관한 루소의 주장은 다소간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5) 현대인은 문명의 부작용으로 발생한 현대적 질병들을 고치기 위해 다시금 약학/의학 등의 문명에 기댑니다. 다만 이러한 현대적 치료 체계는 루소의 견지에서 볼 때 철저히 ‘대증 요법’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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