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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un 30. 2021

영업 사원이었던 아빠는 왜 죽었나?

『세일즈맨의 죽음』, 아서 밀러


미국 희곡사에 길이 남은 거장, 아서 밀러다. 마릴린 먼로와 이혼한 이력으로도 유명하다. 평소 그의 극작 모토는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사회 전체의 책임을 묻고자 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철저히 사회로부터 소외된 인간-사회 관계를 다시금 재생하고자 했던 그의 작가적 사명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아서 밀러의 사명이 십분 발휘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여겨지는 오늘날 다시금 그의 작품을 읽어보며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과 위로를 받아보시기를 바란다.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계산해서, 죽은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대형참사이고, 숫자가 적으면 소형참사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꺼번에 수백 명이 떼죽음을 당하면 대형참사이고, 동일한 유형의 사고로 날마다 한두 명씩 죽으면 대수롭지 않은 사고인가. 고공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있다. 떨어져서 부서지고 으깨진다.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은 땅을 치며 울부짖고 노동을 관리하는 정부관리가 와서 손수건으로 눈물 찍어내는 시늉을 하고 돌아가면, 그다음 날 노동자들은 또 떨어진다. 사흘에 두 명꼴로 매일 떨어진다.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작가 김훈의 칼럼 <아, 목숨이 낙엽처럼>의 일부다. 그의 칼럼을 읽노라면 건설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고스란히 꼬집으며 내쉬는 그의 한숨이 귓전을 웅웅 스친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노동 현장에서 낙사라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하염없이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이 사회는 그들에게 기초적인 안전 장치 하나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 현실이다. 화려한 첨단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노동자들의 참상은 우리 사회가 충분히 예방 가능한 자원과 기술을 마련할 여력이 있음에도 그지 없이 반복될 뿐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이들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너무 약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떨어질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그들의 죽음은 그저 통계로만 존재할 따름이다. 건설 노동 현장의 안정성을 측정하기 위한 지표로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마저도 ‘소형참사’로 분류되어 아무런 사회적 조치를 받지 못할 따름이다. 이러한 광경을 오랜 시간 지켜보던 작가 김훈은 끝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을 못 이겨 칼럼을 썼다. 죽은 사람의 숫자를 가지고 대형참사니, 소형참사니 논하며 그들의 죽음을 분류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를 개탄하며 말이다. 모든 것이 계량화되는 자본주의의 양화적 세태에 대한 작가의 염증이 절절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내면화 한 정신 양식 중에서도 꽤나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양화(量化)다. 양화란 숫자의 크기가 곧 가치의 척도로 기능하는 현상을 뜻한다. 양화 현상이 팽배한 사회에서 사안의 중대함이나 심각성은 오로지 숫자로 계량화 될 뿐이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생략되는 인간적 가치에 대한 재고는 거추장스럽거나,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가령 한 회사원의 업무 실적은 오로지 그가 회사에 기여한 바를 계량화한 수치로 평가될 것이며, 그 수치가 회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회사는 곧 그를 해고할 뿐이다. 설혹 그의 해고로 인해 그가 속한 가정이 벼랑 끝으로 몰릴 지언정 그것은 개인의 사정일 뿐, 개인의 사정은 사회의 관심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다. 오늘날 우리가 다시금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2005)가 1947년 발표하여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작품이 발표된 당시의 미국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못내 이룬 꿈을 향해 달려가던 시대다. 아메리칸 드림이 스멀스멀 꽃피우던 초기만 하더라도 도덕과 양심, 그리고 법을 준수하며 최대의 노력만 한다면 부귀나 명예는 금방 따라올 것이라는 순수한 열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 순수한 믿음 아래 사람들은 저마다 능력을 키우기만 하면 경제적 번영은 곧 따라올 순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그들의 가치 체계 체계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능력만 있다면 경제적 부는 천천히 따라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다같이 으쌰으쌰했던 지난 시간을 뒤로한 그들은 경제적 부가 곧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즉 경제력은 삶의 동기가 아닌, 타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척도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돈이 되지 않는 수많은 요소들은 비생산적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사회에서 도태하게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 윌리가 마찬가지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는 것이 유의미하다. 그의 해고는 윌리 한 개인의 삶에 내려진 미시적 사건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의 삶을 오직 능력으로만 평가하는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 대한 도덕적 사형 선고와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한 가정의 가장인 세일즈맨 윌리의 ‘죽음’을 통해 자본주의의 그늘을 고발하는 사회극적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극의 주인공 윌리는 60세가 넘은 세일즈맨이다. 그는 아내 린다와 함께 큰 아들 비프, 둘째 아들 해피를 열심히 키우며 살았다. 그러나 두 아들은 윌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삶을 살아 윌리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아버지 윌리는 두 아들이 다소 변칙적인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성공하길 장려했으나, 성과는 변변찮았다. 특히나 큰 아들 비프는 윌리의 교육 방식에 의문을 가지며 불만을 심심찮게 토로하기도 하고, 그런 비프가 못내 답답했던 윌리도 비프에 대한 불평을 내뱉으며 둘 사이의 대립각은 극의 마무리까지 지속된다. 그렇다고 윌리의 삶이 화려했던 것도 아니다. 변변찮은 삶을 산 건 윌리도 마찬가지다. 세일즈맨이었던 윌리는 나이가 들어갈 수록 그다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회사는 더 이상 윌리가 필요없어졌고, 때마침 연봉 협상을 하러 회사를 방문한 윌리는 그 자리에서 해고당한다. 뭐 하나 뜻대로 되는게 없던 윌리는 끝내 자살을 택하고, 그의 느닷없는 자살과 더불어 극은 막을 내린다. 그의 죽음 뒤엔 비프에게 사망 보험금을 남기고자 하는 가장의 희생이라는 짧은 수사만 따를 뿐이다.







극에서 윌리의 직업으로 등장한 세일즈맨이 50년대 미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꽤나 상징적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던 시절 세일즈맨의 역할은 퍽 중요하고도 필수적이었다. 제품이란 모름지기 팔리기 위해 만들어지는 법이며, 따라서 회사들은 자사의 물건을 가능한 한 많이 팔아줄 수완 좋은 세일즈맨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탁월한 영업 수완을 겸비한 세일즈맨들은 자본주의 시장의 일선에서 발로 뛰며 남부럽지 않은 돈을 벌어 들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세일즈맨과 회사의 관계는 능력, 혹은 필요에 의한 관계에 불과하다. 실적이 영 탐탁스럽지 않은 세일즈맨은 회사 입장에선 더 이상 효용 없는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세일즈맨은 자본주의의 도구이자 부품격이었다. 자본주의에 활력을 불어 넣는 존재인 동시에,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이니 말이다. 윌리도 마찬가지다. 연봉 협상을 하러 회사를 찾은 윌리는 연봉 인상은 커녕 더 이상 회사에 필요 없으니 나가라는 통보만 전해 듣는다. 수십년을 일했던 회사지만 효용 없는 윌리의 사정은 회사에게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윌리의 존재는 오직 실적으로만 평가 받을 따름이며, 윌리가 가진 인간적 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회사는 윌리가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느냐, 없느냐 만이 중요했다.







그렇다고 극 중 윌리의 위상이 자본주의의 선량한 피해자로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윌리는 자본주의의 피해자인 동시에 자본주의의 전파자였다. 먼저는, 세일즈맨이라는 직업 부터가 상징하듯 윌리는 자본주의의 일선에서 뛰며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자신의 아들에게 시험 현장에서 남의 답안지를 베끼라거나, 혹은 도둑질을 은근히 장려하는 등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그 과정의 탈선은 문제 삼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는 오로지 최후의 결과만으로 평가 받는 자본주의 사회의 양화적 가치관을 그대로 답습하고자 하는 윌리의 태도를 반영하며, 구세대로부터 신세대로 자본주의 가치관이 자연스레 옮겨가는 현상이 드러난 예라 할 수 있다.






아서 밀러는 평소 한 개인의 삶에 대해 사회가 가지는 책임을 작품에 녹여내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를 통해 아서 밀러는 자본주의 가치관이 뿌리 깊이 내면화 되어 있는 윌리의 모습을 매개로 당시 미국 시민의 전형을 폭로하고자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능력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평가 받는 당시 세태를 한탄하던 아서 밀러의 한숨이 윌리라는 세일즈맨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윌리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가 고무적이다. 윌리의 죽음은 소시민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거대 사회에 반항 한 번 못 해보고 무능하게 현실을 외면하려는 무기력한 선택처럼 볼 수도 있지만, 아서 밀러의 진의는 결코 그렇지 않다. 아서 밀러는 자식들을 교육하는 윌리의 다소 비도덕적인 모습을 조명하며, 우리 모두가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수많은 정신 양식을 내면화 당한 것을 순전히 인정한다. 그렇다면 아서 밀러가 윌리의 죽음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 내면화 된 자본주의 정신 자체를 죽이자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즉 윌리의 죽음이 가지는 극 중 위상은 결코 물리적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양식에 뿌리까지 스며든 우리네 정신을 다시금 최초의 순수한 정신으로 부활시키고자 하는 행위의 발로인 셈이다. 따라서 아서 밀러는 우리 안의 ‘자본주의적 윌리’를 죽이고 다시금 새로 태어나자는 메시지를 이 사회에 던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서 밀러도 인정한다. 극 중 윌리는 자살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하는 순간에도 아들에게 사망보험금이 지급될 것을 계획하는 다분히 자본주의적인 발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는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저항이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는 아서 밀러의 회의적인 통찰이 담긴 대목이다.







윌리의 큰 아들 비프는 윌리의 각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린 시절 비프에게 아버지 윌리는 슈퍼맨 같은 사람이었다. 능력 있고, 똑똑하고,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수 있는 마냥 훌륭한 아버지였다. 그러다 일련의 헤프닝으로 아버지의 사생활을 알아챈 비프는 큰 충격에 빠진다. 마치 정답과 같았던 아버지에 대한 믿음에 쩌억 금이 간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질서를 정답처럼 여기며 자본주의 정신을 수호하고 내면화 하던 한 인물이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는 지점이다. 이후 기성 질서로 대표되는 윌리와 새로운 가능성을 대변하는 비프 사이에는 크고 작은 다툼이 이어지며, 윌리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결말에 이르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 윌리의 죽음이 결코 물리적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죽음은 기성 질서의 붕괴 이후 새로운 가능성이 살아 숨 쉴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볼 수 있다. 즉 아서 밀러는 독자들이 비프와 같이 기성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교훈 삼아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대열에 동참할 의지를 나눠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도심마다 빼곡이 들어찬 마천루의 즐비함을 보며 건설 노동자의 노고를 떠올리는 이는 없을 것이다. 세련된 도시의 겉면을 보며 처참한 노동 현장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애당초 그러한 상상을 불허하고자 함으로 더욱 화려한 겉면을 내세운 걸지도 모를 일이다. 혹 그러한 추측이 크게 틀리지 않다면, 자본주의가 가진 겉면의 화려함은 실상 그 외양이 한껏 화려해 질수록 감추고자 하는 무언가만 가득한 것은 아닐까. 건물을 짓는 건설 노동자가 그저 화려함을 양산하는 부품에 지나지 않듯, 제품을 판매하며 자본주의의 활력을 견인하는 세일즈맨도 결국 소모품에 지나진 않느냐는 말이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한 인간을 인격적 존재로서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그저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역할’로 전락시키기 마련이다. 가령 당신이 오늘 아침 아파트 정문을 나서며 인사를 나눴던 ‘경비원’ 아저씨, 혹은 오늘 점심 끼니를 해결한 식당의 ‘종업원’, 그도 아니면 퇴근길에 마주한 ‘버스 기사’를 떠올려 보라. 그들은 그저 당신과 오늘 하루 ‘역할’과 ‘역할’로 대면했을 뿐이다. 당신과 그들의 만남에서 인격적 관계는 생략되고, 경비원-입주자, 종업원-손님, 버스 기사-승객이라는 역할 놀이만 그득한 것이다.







아서 밀러가 진단했듯 우리 사회에는 ‘윌리의 죽음’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한 명민한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대안을 찾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을 지녀야 한다. 나아가, 오로지 자본주의 가치관을 맹신하며 그 대안에 대한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는 작금의 폐쇄적인 태도를 지양하며, 우리가 잃은 수많은 인간적 가치를 재고할 공적 담론의 장을 활성화 해야한다. 설혹 숫자만 판치는 세상 속에서 숫자로는 알 수 없는 진실에 가닿기 위해 분투하지않는다면 언젠가 나와 당신도 숫자 속에 파묻혀 자본주의의 뒤안길 어느 곳엔가 자리한 그늘로 초라하게 쫓겨날지 모른다. 비프가 되어 윌리와 싸우자, 윌리의 숭고하고 장엄한 죽음이 헛되지 않게.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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