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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ul 01. 2021

②메를로 퐁티, "몸, 살, 그리고 세계"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은 이제막 철학에 발을 뗀 이들에게 퍽 좋은 참고서가 아닐 수 없다. 쉽지만 얕지 않고, 넓지만 산만하지 않다. 사르트르, 레비나스, 푸코, 들뢰즈 등 비교적 일반 대중에게도 친숙한 철학자부터 블랑쇼, 크리스테바 등 전공자가 아니라면 생소한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사상가들의 분투를 알곡만 추려 성실히 기록한 책이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몸과 살의 철학자라 불리며 프랑스 철학의 우아함을 한 스푼 더한 철학자 메를로-퐁티에 대해 소개할 것이다. 사유와 이성 중심 주의에 갇힌 이들에게 메를로-퐁티의 사유와 더불어 새로운 시야가 트이길 소망하는 바다.



*참고로 이 책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메를로-퐁티 파트 해제를 맡은 이는 정지은 씨이며, 본 포스팅에서 다뤄지는 내용 또한 전적으로 정지은 씨의 성취를 바탕으로 했음을 밝혀둔다.






1. 고유한 신체

: '나'는 나의 '신체'다.



메를로-퐁티를 설명하는 여러 요소가 있을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일단 그는 현상학자이다. 그렇다면 현상학이란 무엇일까. 거칠게 설명하자면 그것은 현상을 중시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현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를 서양 철학사에서 오랜 탐구의 대상이었던 '본질'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플라톤이 이데아라고 사유해왔던 절대적 본질, 그리고 근대 철학의 칸트가 그것을 '물자체'로 받아치기까지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충분하다. 이처럼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연구되어 왔던 주된 대상은 눈에 보이는 현실 그 자체라기보다 그 너머에 있는 본질적이고도 근원적일 것으로 기대 받아 왔던 형이상학적 관념이었다. 현상학은 이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한다. 후설이 선언한 '에포케(판단 중지)'와 하이데거가 외친 구호 '사태 자체로'의 의미도 그러한 맥락에서 수렴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사변을 멈추고, 우리가 자명하게 인식 가능한 현실 그 '자체'의 감각과 현상에 집중하자는 것이 현상학의 태도인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그 중에서도 '신체'에 주목한다. 우리는 그 어떤 관념을 외따로 학습하기에 앞서 그저 신체로서 이 세계를 경험하고 체득하기 마련이다. 가령 인간은 '뜨겁다'라는 감각과 그러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무엇이 있느냐를 학습하기에 앞서, 그저 뜨거움을 부지불식간에 '체험'할 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겪는 최초의 체험은 몸을 통해 세상과 맞닿는 경험 그 자체이지, 그 어떤 관념의 주입과 학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메를로-퐁티의 지적은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특히 근대 철학 이후의 사조에서 매우 도발적인 분석이 아닐 수 없다. 코기토를 제창했던 데카르트의 영향력 아래 서양 철학의 지배적 흐름에서 인간은 '신체'이기보다 '정신'으로 사유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나'는 행동하는 존재--신체로서의 나--이기에 앞서 생각하는 존재--정신으로서의 나--로 분석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감히' 메를로-퐁티가 이 같은 주류적 해석에 과감히 반기를 든 것이다. 요컨대 신체의 감각을 불확실/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하는 데카르트적 지적 전통이 맞다면 과연 정신은 신체와 무관할 수 있는 것일까, 혹은 신체와 분리된 정신의 개별성이 선재할 수 있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정지은 씨에 따르면 데카르트적 주체를 한 줄로 표현하면 '나는 사유한다', 반면 메를로-퐁티적 주체는 '나는 할 수 있다'로 요약된다. 전자는 정신적 능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심지어 이때의 정신은 신체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처럼 사유되는 식이다. 반면 후자의 주체는 '육화된 주체'로서, 즉 정신적으로 무언가를 표상하고 사유하기에 앞서 먼저 세계와 신체로서 관계 맺는 주체로 상정된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가 신체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던가. 따라서 메를로-퐁티의 관점을 채택할 때 우리는 신체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체가 '지향'하는 대상은 곧 신체 바깥의 세계이니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메를로-퐁티가 현상학자라 불리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현상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후설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우리의 마음은 자꾸 어디엔가 들러 붙으려 한다는 말이다. 이때 마음이 향하는 대상을 '노에마(noema)'라 하고, 지향하려고 하는 성질 자체를 '노에시스(noesis)'라 한다. 길을 걷던 중 아름다운 꽃이 눈에 들었다면 이때 꽃은 노에마이고, 꽃을 품은 마음의 작용을 노에시스라 하는 것이다. 메를로-퐁티 식으로 해석한다면, 노에마라 불리우는 외부 세계는 노에시스를 불러일으키는 동기로 작용 가능하다. 즉 '꽃을 본다'라는 신체의 행동은 먼저 '꽃'이라는 노에마가 존재하기에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쉽게 이해해보도록 하자. 메를로-퐁티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정신활동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신체활동을 가능케하는 외부의 동기나 원인이다. 예컨대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이때 세계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 즉 노에마로서 '나'의 지향성, 즉 노에시스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이 어려워지기 전에 메를로-퐁티가 제시한 예시를 살펴보자. 그는 자신의 저서 『지각의 현상학』을 통해 장례식장을 방문한 한 사람의 예화를 들려준다. 장례식장에 들른 한 사람이 상을 당한 친구를 위로해주려 그를 부둥켜 안는다. 근데 때마침 친구의 어깨 너머로 한 아름다운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이 시선의 주인은 누구인가? 친구를 위로해주고자 하는 나의 순수한 의지 밖에 있는 그 자연스러운 시선의 발생 말이다. 자명하게도 시선의 주체는 '나'이며 따라서 메를로-퐁티는 신체로서의 나, 행동하는 존재로서의 나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2. 현상적 신체

: 몸은 감각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의 신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몸'을 우리 '자신의 것'이라 인식하는 것이다. 즉 '나'는 '나의 신체'이다. 따라서 우리의 내밀한 사유와 정신 활동 또한 결국 신체가 전제됨으로부터 발생 가능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니 신체를 정신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지적 전통은 메를로-퐁티에게 우스꽝스러운 인상으로 비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존재한다는 것은 곧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메를로-퐁티는 주체(신체의 주인이랄까)와 세계의 연결 방식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주체가 세계를 체험하는 동시에 세계는 주체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상호 소통의 과정이다. 우선 주체가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신체 능력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기 마련이다. 예컨대 눈을 통해 바라보거나, 귀를 통해 듣거나, 즉 지각하고 감각하는 신체를 통해 세계의 드러남을 체험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본다면 주체는 세계의 드러남을 통해 스스로의 신체를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눈을 통해 세상을 발견하지만, 발견된 세상을 통해 눈의 존재를 역추적한다는 말이다. 이렇듯 주체와 세계는 동시에 태어난다. 뿐만 아니라 메를로-퐁티는 세계를 의미의 '장'으로 이해한다. 요컨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체험되는 고정된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세계는 결코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다. 만약 사람이 수없이 많은 공간에서 우연히 이상형을 발견했다고 해보자. 이상형을 발견한 주체가 느끼는 공간의 의미는 동일한 공간 속 다른 사람들의 체험과 결코 같을 수 없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설명하기 위한 예시로 콘서트홀의 비유를 든다. 콘서트홀에 처음 들어선 사람은 압도적인 공간감에 놀라곤 한다. 하지만 이내 음악 소리가 들려오며 그에 집중하다보면 점차 공간이 작아지는 듯한 느낌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몸에 의한 앎'이라 한다. 신체가 수행하는 감각들의 조합 속에서 우리는 공간을 때때로 다른 의미로 체험하곤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자유에 대한 상이한 입장을 취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주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무화해야 하는 주체이다. 즉 인간의 실존적 성격은 '무(無)'에 있으며, 그 어떠한 본질에도 포획되지 않으려는 실존적 노력 속에서 인간은 실존적 지위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르트르는 '세계 속에 있는 나의 위치'를 부정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신체를 중시하는 메를로-퐁티는 '세계 속에 있는 나의 위치' 또한 긍정할 수밖에 없다. 신체는 곧 세계 속에 찍힌 주체의 좌표와 다름아니니 말이다. 즉 메를로-퐁티의 관점에서 자유는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세계와 잘 연관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연관'이란 주체가 세계에 일방적으로 포획 당하는 관계가 아닌 '상호적 소유'를 뜻하는 연관이라 할 수 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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