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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ul 03. 2021

옆구리를 칼로 찔러라?!

『동물원 이야기』, 애드워드 올비

<동물원 이야기The Zoo Story>는 미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Edward Franklin Albee)의 주요작 중 하나로, 미국식 부조리극이란 세간의 평가를 받고 있다. 번역본을 구하지 못해 영어로만 읽은지라 온전히 책의 내용을 다 이해했을지 스스로가 의심스럽지만 이런 저런 논문을 찾아 읽으며 원저자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희극이나 소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부조리극'이라는 개념은 양차 세계대전 이후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발점으로 삼는다. 기존의 작품들이 대개 논리적 구성을 따르도록 쓰여졌다면, 부조리극 작가들은 이에 반문한다. 논리가 무너진 눈앞의 현실을 왜 왜곡하느냐고 따져묻는 것이다. 논리와 이성은 작품 속에만 있을 뿐,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정녕 논리와 이성이 있다면 눈앞의 참상을 어찌 설명할 수 있냐며 말이다.


따라서 부조리 극작가들은 세상의 부조리함이 세상의 속성 그 자체임을 꼬집으며 부조리성을 작품 속에 잘 녹여내는 것이야말로 작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그들은 이 세상이 어떤 특정한 논리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도 질서도 없는 곳이라고 덧붙인다. 즉 세계 내 존재, 즉 인간 역시 아무런 목적 없이 세계를 표류할 뿐이라는 설명이다. 이는 곧 '실존주의'와 관계 맺는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에드워드 올비는 그의 주저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도, 또 오늘 살펴볼 <동물원 이야기>에서도 유독 인간 소외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설혹 그가 처한 가정 배경에 그 원인이 있다손 친다면 친부모에 대한 원망 탓일지도 모르겠다. 생후 약 2주만에 올비가(家)에 입양된 에드워드 올비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친부모에 대한 적대심을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입양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건강하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선 자료를 찾지 못했으나, '접촉', 혹은 '관계'에 대한 그의 갈증은 아마 메마른 가족 관계부터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올비의 작품에는 늘 인간이 소외받는 현실, 소통의 부재와 단절, 고립과 외로움, 상대에게 가닿지 못하는 언어의 무쓸모가 빼곡히 담겨있다. 기회가 되면 이후로도 남은 그의 작품을 더 읽어보며 실존주의와 부조리극에 대해 지평을 넓혀 보고자 한다.


<동물원 이야기>는 그 분량도 무척 짧은 편이라 어지간한 집중력이라면 앉은 자리에서 한숨에 읽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잘' 읽어내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겠지만 말이다. 나 또한 서사에서 벌어지는 사건에만 주의를 기울이며 읽었더니 극적 장치가 주는 메시지나, 여러 상징이 은유하는 바를 놓쳤음을 나중에 관련 논문을 읽을 때에서야 알아차렸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제리와 피터 단 두 명이다. 이야기는 어느 공원 벤치에서 제리와 피터가 질문과 답을 주고 받는 것으로 전개된다.제리는 피터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동물원에 다녀왔어요." 생면부지한 피터에게 제리가 대뜸 동물원에 다녀왔음을 고백한다. 처음에 피터는 설마 자신에게 하는 말일까 싶어 대답조차 않는다. 굴하지 않은 제리는 동물원에 다녀왔다는 생뚱맞은 말을 수차례 건넨다. 이렇게 시작된 둘의 대화는 막이 내릴 때까지 단 한 번도 논리적인 속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채로 끝난다.


작중에서 제리가 피터에게 처음 다가간 이유는 우리에게 '접촉'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앞서 제리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접촉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사건이라 함은 제리가 사는 하숙집의 주인이 키우는 개와 관련한 것이다. 이 개는 하숙집 현관 앞에 서서 제리가 올 때마다 그르릉 위협을 하곤 했다. 제리는 개 때문에 매번 현관을 지나는 것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제리는 꾀를 낸다. 맛있는 햄버거를 잔뜩 사서 개 앞에 던져 놓는 것이다. 이는 개에 대한 애정에서 기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친절을 가장해 더 이상 개와 섞이기 싫었던 데 진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제리만 보면 그르렁 울어대는 통에 결국 제리는 햄버거 속에 쥐약을 넣어 개를 죽이기로 마음 먹는다. 곧 제리는 이를 실행에 옮긴다. 한 가지 중요한 변곡점은 쥐약 작전(?)을 실행에 옮긴 후 제리의 마음에 일말의 죄책감이 생겼던 데 있다. 제리는 개를 죽이려 했던 것을 후회하며 개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다행히도 개는 죽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개는 그 이후 제리를 본체만체 한다. 제리는 분명 자기만 보면 달려드는 개가 귀찮고 성가셨음에도, 도리어 이젠 그 위협을 그리워한다.


이런 얘기를 처음 만난 사이에 장황하게 늘어놓으니 가만 앉아 듣고 있는 피터는 무척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것이 무슨 얘기일지 가늠도 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제리는 자신의 얘기를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피터가 답답했던지 이젠 막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그것도 모자라서 피터가 앉아 있는 벤치에서 그를 쫓아내려 사력을 다한다. 피터 또한 멀쩡히 앉아있던 벤치를 뺏기지 않으려 애쓴다. 둘의 싸움이 치열해지던 끝에 제리는 갑자기 칼을 꺼내 피터에게 건넨다. 제리는 영문도 모르고 칼을 쥐어든 피터에게 돌진한다. 제리는 칼에 찔려 죽고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리와 개 사이의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제리의 속성으로 미뤄보아 그는 고립된 삶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적어도 개가 죽을 뻔하기 전까지는). 일례로 하숙집 주인 여자가 육체적 접촉을 위해 다가갔을 때 제리는 이런 저런 핑계로 빠져나갈 생각 뿐이 없었다. 덧붙여 제리네 집 안 이곳저곳에 자리 잡은 물건들 또한 그의 '단절'된 상태를 여실히 드러낸다. 가령 빈 액자가 그렇다. 액자란 '과거'의 추억을 담는 기능을 하는 장치다. 왜 액자가 비어있냐는 피터의 질문에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는 제리의 대답은 언뜻 타당한 대답인 듯 보이지만 이는 사실 엉뚱한 대답이다. 물리적으로 부재한 사람도 액자 속 사진으로 얼마든지 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빈 액자를 통해 저자는 과거와 단절된 제리의 모습을 묘사한다. 더불어 고장난 타자기는 현대식 기계문명과의 단절을, 피터와의 동문서답 언어교환은 소통의 단절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리는 온통 단절 투성이로 점철되었다.


그랬던 제리가 개를 죽이기로 계획한 이후 달라진다. 일말의 죄책감을 통해 개와 일방적 유대감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일방적이라 한 이유는 이후 개가 제리에게 보이는 무관심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 올비는 독자에게 '관계'가 무엇인지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일전에 개가 제리에게 보인 위협은 그 표면에 드러난 형식은 차치하더라도 일종의 '접촉' 시도였다. 또한, 제리가 개에게 맛있는 햄버거(쥐약을 넣지 않은)를 가득 준 것은 그 겉면에 드러난 것은 '친절'이었지만 관계를 끊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제 제리는 개에게 그토록 바라던 무관심을 이끌어냈지만 고독해졌다. 한 때 자신을 귀찮게 했던 접촉이 그리워졌다. 피터에게 제리가 다가간 이유는 자신이 깨달은 접촉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자 했음이다.



피터가 제리와 마주친 그 화창하고 따사로운 어느 한가한 오후 피터는 가족과의 접촉을 피해 벤치에 앉았다. 벤치는 피터의 피난처이며, 또한 제리가 머무른 조그만 독방에 대응하는 곳이다. 유대를 기피한채 자신만의 세상으로 도망쳐나온 피터가 제리에겐 불쌍한 존재였다. 이내 어떻게든 벤치를 빼앗으려는 제리의 '계몽운동'과 피터의 처절한 반항이 잇따르며 끝내 제리의 죽음까지 다다른다. 접촉을 거부하던 지난한 삶의 끝이 영원한 단절을 불러일으켜야만 피터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을까? 소설은 피터의 내면을 비추지 않은채 마무리된다. 올비는 독자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다. 바로 당신이 피터라고, 이래도 고립된 채 살거냐고 말이다.



소설 <광장>의 '이명준'은 독방과 광장 사이에서 고민하던 끝에 중립국을 택한다. 전체주의에 실망하고, 개인주의에 상처 받은 것이다. <광장>의 저자 고 최인훈 선생님 말씀대로 유대감만 강요하는 사회도, 개인의 자유만 강조하는 사회도 결국 커다란 독방 아니면 작은 광장일 뿐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올비의 제안이 바로 접촉이 아닐까 싶다(시대순은 역순일지라도). 물론 인간 근원에 흐르는 본질적인 외로움과 고독감은 홀로 해결불가능한 것은 당연하거니와 비록 타인에게서도 해소 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하지만 홀로 고독한 두 존재가 비로소 접촉할 때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외롭구나 하는 그 유대감, 바로 그 동질감만이 작은 희망이 아니냐고 올비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작은 희망에 기대 살아가는 이 삶이 바로 부조리지만 말이다.


**찔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접촉이 필요한 이유는 영화 <그래비티>의 '중력'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인간관계에서 으레 경험하는 상처에 질려 우주로 떠난 주인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잡아끄는 힘이 삶에 필연적임을 깨닫는다. 중력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면 삶을 지탱할 수 없는 법이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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