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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Jul 04. 2021

사람을 죽이는 무시무시한 처형기계

『유형지에서』, 프란츠 카프카


19세기 말에 태어나 40년 남짓한 짧은 세월을 살고 금새 눈감은 시대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학과에 지원했지만 도저히 변호사가 될 마음은 없었던 그는 보험 회사의 법률 고문으로 근무하며 근근이 자신을 위로할 소설을 쓰곤 했다. 아버지로부터 강요 받은 삶과, 자신이 살아가고 싶은 삶 사이의 절충주의랄까. 그에게 삶이란 부조리였다. 인간은 사회로부터 소외 당하며, 또한 사회는 결국 인간의 집합과 다름아니므로 결국은 인간이 인간을, 서로가 서로를 소외하고 소외 받는 부조리한 세상. 어디 그뿐일까. 인간은 서로 소통할 수 없으며, 심지어 말을 내뱉은 사람은 자신이 내뱉은 말로부터 조차 외면 당하는 세상. 자아실현이란 없으며, 오직 사회가 원하는 바를 수행해야 하고, 외로움을 숙명으로 삼아야 하는 세상. 그는 중편소설 『유형지에서』를 통해 부조리한 세상의 비합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합리적 이성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작중 세계의 모습을 통해 그는 묻는다. '당신의 이성은 합리적인 줄 아는가? 그렇다면 왜 합리적 주체가 비합리적 사회를 이루는가?'






줄거리

*등장 인물 : 탐험가, 장교, 죄수, 병사 등


한 탐험가가 여행길을 나선 도중 우연히 유형지--죄인들이 유형(유배)살이 하는 곳--에 도착한다. 마침 그곳에선 한 죄수의 처형이 이루어지고 있던 중이었다. 탐험가는 현장 관리인들의 안내를 받아 처형 현장을 구경하게 된다. 처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씩씩해 보이는 장교였다. 이윽고 현장에 들른 탐험가를 발견한 장교는 탐험가에게 다가가 처형 방식에 대해 친절히 설명한다. 사실 처형 방식이란 별 게 없고, 다만 '처형 기계'의 작동 방식이라 하는 편이 적절한 설명일 것이다. 아무튼 장교는 강력한 자부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탐험가에게 '처형 기계'의 작동 방식을 친절히 설명해준다. 이를테면 그것은 커다란 바늘로 죄수의 몸에 '죄명'을 새겨넣는 기계이며, 약 12시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죄수를 사형하게--되고, 바늘에 찔린 몸에서 흐르는 피는 어떻게 처리되는지, 이 오래 된 기계의 전통은 어떻게 지금껏 이어져 왔는지 등등이었다. 사실 탐험가는 기계의 작동법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이방인으로서의 예를 갖추기 위해 지루함을 감내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탐험가는 처형을 기다리는 죄수에겐 조금 관심이 있었다. 지독하리 만치 지저분하고 남루한 몰골의 죄수를 바라보던 탐험가는 장교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지금 자기의 죄가 뭔지 압니까?' 장교는 '아니요.' 라고 짧게 대답했다. 탐험가는 금방 다시 물었다. '그럼 자기의 죄에 대해 항명할 기회도 갖지 못한 건가요?' 이번에도 장교는 '그렇죠.' 라고 짧게 답했다. 상황 파악이 이쯤되자 탐험가는 저 커다란 처형 기계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도 없는 죄수--죄수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가 영문도 모른 채 처음 보는 괴상한 기계 밑에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다니, 게다가 죄명이 다 새겨지면 사망에 이른다니 탐험가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곧 장교는 탐험가가 '처형 기계'의 전통을 불편히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전통의 필요성을 열심히, 오래도록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탐험가는 설득되지 않았다. 장교는 좌절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이때부터 소설은 카프카 소설 특유의 'kafkasque(기괴한, 환상적, 몽환적)'함을 여실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긴 생각에서 깨어난 장교는 이내 정신을 차리더니 죄수를 풀어준다. 그러고는 알몸으로 처형 기계의 밑에 눕더니 스스로 처형 기계를 작동시킨다. 탐험가는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황한 모양이었지만 장교의 결연하고 단호한 추진력을 넋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웬걸, 처형 기계는 굉음을 내며 오작동하기 시작한다. 장교가 조금 전까지 입이 마르토록 칭찬한 처형 기계의 허술한 실체가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처형기계는 장교의 몸에 '공명정대하라!'라는 말을 12시간 동안 새기며 장교를 '심판'해야 했지만, 처형기계는 장교를 '사형'시킬 뿐이었다. 탐험가는 넋을 놓고 바라봤다. 죄수와, 죄수를 감시하던 병사도 넋을 놓긴 마찬가지였다. 장교는 죽었다. 일대 소란이 지난 후 탐험가는 병사와 죄수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이윽고 그들이 다다른 곳은 허름한 찻집이었다. 그때 병사가 탐험가에게 말했다. '장교님한테서 이 얘기는 틀림없이 못 들으셨을 겁니다. 노인네(전임 사령관)는 여기 묻혔습니다.' 병사가 가리킨 곳은 찻집에 놓인 한 테이블 밑이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테이블을 옆으로 치우니 초라하기 짝이 없는 비석이 놓여 있었다. 탐험가는 남루한 비석 위에 적힌 비문을 천천히 읽었다. '여기 전임 사령관 잠들다. 한 예언에 따르면 사령관은 시간이 흐른 뒤 부활하여 유형지를 다시 정복할 것이라고 한다. 믿고 기다릴 지니.' 탐험가는 찻집을 터덜터덜 걸어 나온다. 그 길로 곧장 탐험가는 배에 올랐다. 뒤따라 나온 죄수와 병사가 뒤늦게 뛰어봤지만 허사였다. 장교는 죽었고, 탐험가는 떠났고, 죄수와 병사는 남겨졌으며, 소설은 막은 내린다.







감상


『유형지에서』를 카프카적 관점에서 감상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처형 기계'의 의미를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묘한 기계가 뜻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처형 기계의 작동 과정을 천천히 되짚어 보자. 먼저 죄수는 기계 밑에 눕는다. 잠시 후 기계는 죄수의 몸에 '규율'을 새겨 넣는다. 12시간에 걸친 작업 끝에 죄수의 몸에 죄명이 온전히 새겨지면 죄수는 곧 죽는다. 즉 처형 기계가 죄수의 몸에 '규율'을 새겨놓는 작업이 완성되면 죄수는 죽는 것이다. '죽음'은 카프카의 소설에서 지겹도록 반복되는 메타포가 아니던가. 『선고』에서 게오르크의 죽음이 사회적 자아의 죽음을 가리켰다면, 『유형지에서』의 죄수가 겪는 죽음은 오히려 실존적 자아의 죽음을 가리킬 것이다.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다시 생각해보자. 규율--이를테면 '공명정대하라', 정직하라' 등등--이 우리 몸에 각인됨으로써 죄수는 사망에 이른다. 준수해야만 하는 사회적 규율이 내재화 됨으로써 곧 나의 실존을 자유로이 창조해 나갈 자유는 '사망'하는 것이다. 가령 '남자는 이래야해', '아내는 이래야해', '학생은 이래야해' 등등 '나'라는 존재가 사회로부터 은연 중에 부여 받은 규율들을 상기해 보라. 우리는 규율에 대해 쉽사리 저항할 수 없다. 공동체의 규율이란 곧 공동체에 속하기 위한 필수 이행 사항, 즉 시민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권리를 획득한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 우리는 공동체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규율을 준수해야만 하며, 이때 '규율을 준수하는 나'가 곧 '시민적 자아', 혹은 사회적 자아인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에 속한 존재는 규율적 존재이자, 시민적 자아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카프카는 처형기계의 잔혹성을 한껏 부각시킴으로써 인간의 실존이 사망하고 사회적 자아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른바 '나'는 죽고 '너'로 사는 세상이랄까. 그치만 카프카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죄수의 해방과 장교의 죽음을 통해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던 거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은 단연 탐험가다.



앞서 말했듯 사회 구성원은 모름지기 자신이 속한 사회의 규율을 준수해야 한다. 사회적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사회적 권리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탐험가는 사회의 이방인이다. 또한 이방인은 사회의 외부자다. 이방인은 규칙의 바깥에 존재하며, 객관적 관찰자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방인은 규율로부터 자유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규칙과 기준으로서 존재한다. 장교는 그러한 이방인, 즉 탐험가로 인해 자신의 가치관에 큰 도전을 받는다. 장교가 온 생애를 바쳐 신봉해 마지 않았던 처형 기계를 이방인은 너무나도 쉽사리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때 장교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규율--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도 말했듯 관습적 규율이란 시간이 지날 수록 그것들을 필요로 했던 시대적 요구(혹은 규율의 목적)는 희미해지고 오직 권위만 남기 마련이다--을 진리로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하지만 진리의 절대성을 확보하기가 어디 쉬운 일일까. 장교는 탐험가로 상징되는 새로 등장한 가치관--내지는 규율--아래 곧 스러지고 만다. 이때서야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 한 가지는 '장교=처형 기계'라는 도식이다. 장교는 처형 기계가 죄수들에게 '규율'을 기록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도면을 갖고 있는 '규율의 담지자'였다. 즉 규율이 내재화 된 사람은 어느새 '규율 자체'가 되어버린다. 오늘날 우리 사회만 돌아보더라도, '쟤는 여자애가 조신하지 못하게 이랬다더라' 하는 말이 쉬이 들리지 않는가. 규율로부터 강제 당했던 과거의 인간이 스스로 규율 자체가 되어 버린 모습이다. 아무튼 장교는 탐험가와의 대립에서 그 패결을 쉽게 인정하고 이내 붕괴되고 만다. 이때 장교가 죽는 과정도 꽤나 희극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처형 기계는 장교가 자부한 만큼 정교한 작동을 보이기는 커녕 오작동으로 인해 비참한 죽음만 불러일으킨 것이다. 장교가 전 생애 동안 맹신했던 전통과 관습의 허약한 비진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혹은 '장교=처형기계'라는 도식 아래 자아와 자아의 충돌이 빚어잰 자아 붕괴의 현장이랄까. 다만 장교와 탐험가의 대립 관계를 비합리와 합리의 충돌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다소 조심할 필요가 있다. 비합리와 합리란 칼로 무가르듯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현재의 합리--탐험가--도 미래의 비합리가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 말이다.





소설을 읽으며 다음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새로운 온건파는 견해가 달라요. (···) 사내가 끌려가기 전에 그의 목을 사탕 과자로 가뜩 채웠어요! 평생을 냄새 나는 생선으로 연명하다가 이제 사탕 과자를 먹어야 하다니! (···) 하지만 제가 3개월 전부터 요청을 했건만 왜 새 펠트 토막을 사 주지 않는 건가요? 백 명 이상의 사내들이 죽어 가며 빨고 깨물어 댄 이 펠트 토막을 어떻게 구역질 없이 입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프란츠 카프카, 『유형지에서』中)


유형지 내부에 자리잡은 최신 기득권층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죄수들의 먹을 거리를 보다 풍족하게 개선해주었다. 예전엔 생선 찌꺼기 따위나 먹이며 죄수들을 연명시켰다면 이젠 사탕 과자 씩이나 배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장교는 말한다. 왜 정작 죄수들에게 정말 필요한 펠트 토막--재갈용으로 입에 물리기 위한 것--은 바꿔주지 않느냐고.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기득권이 내보인 인도주의적 지원이 그들 스스로를 위한 자기 만족용 봉사에 지나지 않을 뿐 인간에 대한 진정한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이다. 더 비꼬자면 그들은 이른바 '사회적 자아'의 위세를 위해 행동했을 뿐이었으리라.



스스로 합리적 주체라 자부하던 장교는 이방인의 눈에 비합리의 화신이었으며, 유형지 기득권들이 베푼 아량 속에서도 여지 없이 비합리는 발견된다. 카프카에게 부조리란 규율이라는 합리가 비합리성을 갖지 않는다는 무수히 많은 착각들을 먹고 자란 끝에 사회 전체로 퍼진 암덩어리는 아니었을까.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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