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삶』, 수 프리도
아무렴 철학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니체'라는 이름 두 자를 듣지 못한 이는 없으리라. 그마만큼 니체의 철학은 근현대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력을 펼쳤으며 '신이 죽은' 이후의 붕괴된 세계관을 건설하는 데 일조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가령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뭉크의 『절규』는 니체가 마주한 '초인이 되기 위한 인간의 운명적 공포'의 반영이며, 전후 시대를 주름 잡은 실존주의 철학의 모태 역시 니체의 초인 개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그밖에『데미안』을 쓴 헤르만 헤세와, 칼 구스타프 융, 조지 버나드 쇼, 유진 오닐 등 니체 철학에 심취한 지식인은 일일이 셀 수 조차 없으리라.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같은 '훗날의 명성'을 니체는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 니체가 활발한 집필 활동을 하며 열심히 책을 냈을 당시 사람들은 아직 니체의 철학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신은 죽었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사람 들은 아직 '신은 죽었다'라는 아포리즘--깊은 생각을 간결하게 담은 글--뒤에 숨은 니체의 함의를 읽어내지 못했다. 해서 니체를 불경하다고 간주했으며, 읽어내기 어려운 아포리즘을 구사하는 니체의 작품을 읽을 '의지'를 발휘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니체는 알았다. 훗날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신의 작품이 진가를 드러내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다행히 니체의 작품에 대한 세계적 열광의 기미는 니체가 죽기 수 년 전 부터 시작했다. 다만 그 땐 이미 니체가 정신을 잃은 지 오래라는 비극적인 현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 책 『니체의 삶』은 니체의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맨먼저 읽을 것을 강권하고 싶은 책이다. 비록 니체 철학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돕기엔 부적절할 지 모르나 니체의 철학 이전에 '니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니체에 대하여 '듣는 귀를 닫고 보는 귀를 여는' 것이 가능해진다고나 할까. 평생토록 처절한 자기 초극의 삶을 자발적으로 걸어가, 초인 그 자체가 되길 소망한 니체, 디오니소스와 차라투스트라의 화신이 되길 바라 마지 않은 니체의 삶으로 성큼 걸어가는 데 긴요한 지팡이가 될 책이라 생각한다.
1844년 10월 15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가 태어났다. 니체의 가정은 3대째 기독교를 이어오는 기독 가정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배우자, 그러니까 니체에겐 할머니와 어머니 역시 독실한 신자였다. 그렇다보니 니체 역시 성장과정에서 기독교를 진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나아가 어머니의 바람을 이뤄드리고자 목사가 되기로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기도 했다. 훗날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외친 배경을 여기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당연스레 전해지는 전통이자 관습 으로 전락한 기독교는 니체에게 그저 사회적 도덕의 내면화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즉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도덕과 담론이 내 안에서 나도 모르는 새 나를 형성하게 두지 말라는 것이 니체의 속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니체는 피아노 연주에 소질을 보였다. 특히나 즉흥연주에 대해서라면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연주를 보일 정도였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루트비히로부터 물려 받은 재능이다. 아버지 루트비히는 직업은 목사였지만 그의 연주를 보기 위해 먼 곳에서도 손님이 방문하는 일이 많았을 정도라 전해진다.)
아버지 루트비히 니체가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날 때 니체의 나이는 고작 4살이었다. 이듬해엔 동생 요제프도 사망했다. 남은 가족이라곤 어머니 프란치스카와 여동생 엘리자베스 뿐이었다. 프란치스카는 아들 니체가 목사로 크길 희망하며 돔 김나지움에 보낸다. 공부에 흥미를 느낀 니체는 자정에 자고 새벽 5시에 일어나 공부를 시작하는 등 열심히 학업에 임하며 당시 독일의 명문학교라 할 수 있는 슐포르타에 합격한다. 당시 슐포르타의 학업 과정은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체조로 시작하는 일과는 자정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수업, 자습의 반복이었다. 이때부터 이미 니체의 건강은 적신호를 보이기 시작했다. 잦은 구토와 두통이 그를 괴롭힌 것이다. 아마도 니체는 죽은 아버지 루트비히와 동생 요제프를 떠올리며 자기도 역시 마찬가지로 단명하리라는 두려움을 놓지 못했으리라. 슐포르타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고전어와 고전문헌학이었다. 이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학과 역사, 철학에 대한 중요성을 높이 샀기 때문이며, 훗날 니체가 바젤 대학교에 고전문헌학 교수로 취임하게 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어렸을 적 까지만 하더라도,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니체가 기독교에 '동의'했을 때 까지만 하더라도 니체와 두 모녀의 사이는 썩 훌륭한 편이었다. 니체가 슐포르타로 떠나던 날 니체와 엘리자베스가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 흘린 것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마침내 니체가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기독교를 버리기로 했을 때--즉 신을 죽이기로 했을 때--니체와 두 모녀 사이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처음은 아마도 1866년, 니체가 부활절을 맞아 집을 방문했을 때 벌어진 사건이 아닐까 싶다. 니체는 성찬식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며, 두 모녀는 니체의 '불경한(?)'한 발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로 니체는 두 모녀를 가리켜 '멀미의 사슬'이라 부르곤 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멀미가 나는 듯한 어지러움이 느껴졌던 걸까. 아마도 니체가 초인--위버멘쉬--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가장 첫 '사슬'이 바로 두 모녀, 혹은 그들로 대변되는 기독교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1864년 슐포르타를 졸업한 니체는 본 대학--니체가 좋아하던 프리드리히 리츨과 오토 얀이 교수로 있던 곳--의 신학학부로 입학한다. 본래 더 관심 있던 학문은 고전문헌학이었으나 어머니의 바람 대로 목사가 되기 위함이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니체는 '초인'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대학에 들어간 니체는 '프랑코니아'라는 단체에 가입한다. 본래 프랑코니아의 목표는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자유문화적인 철학을 학습함에 있지만 오늘날 대학의 많은 동아리들이 그렇듯 사교와 향락으로 물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일설에 따르면 프랑코니아 학생들은 쾰른 사창가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니체가 여행을 목적으로 쾰른에 방문한 날의 일이다. 니체는 쾰른의 여행 가이드를 불러 식당에 데려가달라고 부탁했으나 가이드가 니체를 데려간 곳은 다름아닌 사창가였다. 가이드는 니체 역시 여느 프랑코니아 학생들처럼 사창가에 가고 싶지만 부끄러워서 식당 핑계를 댄 것이라 지레짐작한 것이다.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그곳에서 니체는 놀라서 뛰쳐나온 것으로 전해지지만, 여느 학자들은 니체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왔으리라 짐작하기도 한다.
니체는 오로지 '이성'만을 중시하는 당대의 철학에 신물이 났다. 그는 '이성'을 '아폴론적인 것'으로 비유하며, 그것과 반대되는 인간의 비이성적인 측면, 즉 '광기' 또한 인간의 일부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광기적 측면을 일컬어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비유한다. 쉽게 말해 아폴론적인 것이 이성, 합리성, 설명될 수 있는 것 등을 나타낸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란 감성, 비합리성, 설명될 수 없는--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것을 나타낸다(이러한 니체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미셸 푸코는 그 자세한 해제로 『광기의 역사』를 펴내기도 한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대하여 동양의 태극 이론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양과 음은 상호의존적이다. 양이 있기에 음이 있고, 음이 있기에 양이 있으니 말이다. 동양 철학에서 사유되는 만물의 근원--태극--은 오로지 양과 음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니체의 세계관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여지가 있다. 이성과 광기, 양과 음, 설명 가능한 합리성과 설명 불가한 '그냥'의 정신은 인간의 특성이며, 세계의 본질일지 모른다.
니체가 보기에 바그너의 오페라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절묘한 균형을 이뤄낸 완벽한 예술이었다. 이를테면 인물간의 대화나 나레이션을 통해 설명되는 극의 내용이 아폴론적 특성을 도맡는다면, 인간의 감성을 휘어잡는 바그너 특유의 곡조가 디오니소스적 특성을 담당한다. 훗날 둘 사이가 망가졌을 때에도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만큼은 완벽했다고 할 정도니, 니체가 젊은 시절 바그너로부터 받은 위로의 크기는 이루 짐작할 수 없으리라.
『니체의 삶』에서 저자 수 프리도가 밝히는 니체-바그너 의절의 결정적 원인은 다름아닌 바그너의 편지 한 장이라고 한다. 편지의 수신인은 망가져가는 몸을 회복하려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 니체의 주치의였다. 바그너는 의사에게 니체의 정신이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원인으로 잦은 자위 행위를 거론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부터 니체는 바그너의 맹목적인 애국주의와 반유대주의,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맹신으로 인해 소원해지기 시작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 수프리도가 보기에 그것들은 바그너와의 관계를 단절할 만큼의 절대적인 반목을 불러일으킬 정돈 아니었다. 훗날 니체는 바그너가 주치의에게 쓴 편지의 내용을 알게 되며 미련 없이 마음 속의 '우상'을 부쉈고, 이른바 '우상의 황혼'이 지난뒤 상쾌한 '아침놀'을 맞이했으리라.
니체의 삶에서 꼭 빼놓을 수 없는 여인 중 한 명이 바로 루 살로메다. 그녀는 매혹적인 외모 만큼이나 평범치 않은 사상의 소유자였다. 이를테면 루 살로메가 니체와 파울 레 두 남자에게 한집살림을 제안한 이야기가 그렇다. 루 살로메의 지적인 면모에 반한 파울 레는 니체에게 루 살로메를 소개한다. 니체 역시 마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파울 레는 몰랐던 걸까. 니체를 만난 루 살로메는 니체의 허무주의적이면서도 모든 걸 긍정하는 듯한 신비스러운 포용력에 빠져들고 만다. 그리하여 파울 레와 니체 모두에게 한집살림을 제안했으리라. 하지만 사랑에 빠진 니체는 그 같은 '기괴한 동거'에 승낙하고 싶지 않았다. 해서 호기롭게 루 살로메에게 청혼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하며 좌절하고 만다. 이후 파울 레와 결혼한 루 살로메는 다행히도 니체와의 관계를 잘 이어가던 중 돌연 하루 아침에 연락도 남기지 않은 채 잠적한다. 이때 크게 상처 받은 니체의 일기엔 루 살로메에 대한 절절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루 살로메가 니체에게 남긴 상처는 단연 그 뿐이 아니다. 바그너와 니체의 사이를 갈라놓은 편지 내용을 발설한 것 역시 루 살로메였으니 말이다. 바그너의 공연이 한창이던 바이로이트의 연회장에서 루 살로메는 바그너가 언급한 니체의 잦은 자위--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를 폭로하는 등 입방정을 떨며 니체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이러한 루 살로메에 대한 니체의 마음을 완벽하게 단념시킨 건 니체의 동생 엘리자베스였다. 엘리자베스는 특유의 상상력--내가 보기엔 거의 리플리 증후군이 아닐까 싶은 정도다--을 가하여 루 살로메의 '만행'을 니체에게 폭로한다. 엘리자베스 본인이 일방적으로 조작한 만행을 말이다. 이를 전해들은 니체는 루 살로메를 완전히 잊게 되었으며, 오직 그녀를 떠올릴 때 니체의 맘 속에 피어오르는 감정은 분노 뿐이었으리라. 엘리자베스의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니체가 그의 말년에 병석에 눕기 시작한 이후 니체가 남긴 작품의 반향이 스멀스멀 세계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미 니체는 정신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했기에 자신이 세계에 끼친 영향력을,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본인이 받는 호평과 찬사를 인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알았다. 니체가 '돈'이 될 수 있으리라는 사실 말이다. 그리하여 엘리자베스는 니체의 작품들을 모아 일종의 아카이브를 만드는가 하면, 엘리자베스 본인에 대한 니체의 안 좋은 기록들은 삭제하는 등 검열도 서슴지 않았고, 나아가 방문객들에게 니체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볼 수 있게 하는 등의 악행도 서슴지 않았다.
약 600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두께의 책이지만 철학자의 생애를 생동감 있는 문체 덕에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그리 무겁진 않았다. 한 사람의 생애를 다룬 책이 꼭 위대한 문학작품을 읽는 기분을 자아낸 건 단순히 수 프리도의 탁월한 연출력 때문은 아니었으리라. 초인이 되길 바라지 않고선 지독하게 외로울 수밖에 없던 니체의 삶, 하루하루 자신의 운명을 아모르파티의 삶으로 긍정하지 않고선 좌절이 더욱 가까웠던 그의 삶을 더듬어보자니 쓸쓸한 그의 눈동자가 내 앞에서 나를 지켜보는 듯 정신이 아득하다--물론 니체는 '연민'이란 열등한 의식이라 비웃었을 테지만.
니체의 가족--프란치스카와 엘리자베스--이 니체의 작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읽었을 때 니체는 가족의 느닷없는 수치였따. 하나님의 감화감동하심 속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의 시선에서 니체의 책은 반기독교적 정서로 가득한 불경스럽기 그지 없는 책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말했다. 신을 죽이고 나면 보다 새로운 관점이 가능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니체의 입장에서 '믿음'이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었다. 사실이 그렇다. 기존에 우리가 믿고 있던 '관습'을 의심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지독하리만치 피곤하게 하지 않는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혹은 내 옆사람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을 나 또한 동의하는 삶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편하다. 그것은 마치 단단하게 다져진 땅에 발을 딛고 일어서는 것 만큼 안온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에 대해 과감히 망치를 들고 일어설 것을 주장한다. 그것이 정말 믿음직한 땅인지, 겉보기에만 그럴싸하고 실제론 우리의 영혼을 좀먹는 지옥의 땅은 아닌지 깨부숴보자는 것이다.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그의 별칭처럼 말이다. 아마도 니체에게 영원한 진리란 '진리는 없다'라는 사실 뿐이 아니었을까. 그 어떤 '본질'로도 규정되길 거부한 초인의 삶, 바로 실존주의의 삶이 그가 바란 삶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의 초기 철학에서 드러난 '디오니소스적 요소'는 그의 말년까지 이질감 없이 녹아든다. 아폴론적 요소만이 가득한 통념적 질서의 세계에 반기를 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광기로 가득한 디오니소스적 열정 뿐이니 말이다.
모쪼록 설명될 수 없는 삶의 요소를 낙타처럼 긍정하며, 확실함의 아폴론적 세계에 사자와 같이 반항하는,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허무를 느끼고 새로 태어난 아기의 망각하는 태도로 삶을 초극하기를.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