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적인 조건으로 인해 차별 당해 본 경험이 있는가? 이를테면 성별을, 혹은 외모를, 혹은 가정 환경을, 혹은 피부색을 근거로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때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는가. 억울함? 무력함? 분노? 자괴감? 아마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의 복합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보자. 나는 그러한 차별의 주체였던 적은 없는가? 혹시나마 일러두지만, 피부색 따위의 같은 거대 담론까지 비약하여 '난 그런 차별을 해 본 적이 없어' 따위의 변명을 늘어놓지는 말자. 꼭 거창한 근거의 차별만 차별이란 법은 없다. 이를테면 눈매가 찢어졌다고, 입고 다니는 옷이 볼품 없다고, 말이 어눌하다고 차별해본 적이 없느냔 말이다. 만약 있다면, 차별로 인해 경험한 극도의 좌절감을 너무 억울해 하진 말자.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차별을 당하고, 또한 행하며 살아가니 말이다. 하지만 도대체 이 슬픈 비극은 왜 그리도 당연해야만 하는 걸까? 간단치 만은 않은 그 비극의 역사를 담담히 그려내는 소설,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이다.
『풀잎은 노래한다』는 작가 도리스 레싱의 자전적 성격이 많이 베어든 리얼리즘 소설이다. 1919년 지금의 이란 지방에서 영국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레싱은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남부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에서 자란다. 그녀는 그곳에서 백인들이 흑인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직접 보고 경험하며 컸고, 그러한 경험은 이후 그녀 소설이 주로 다루는 '정체성 갈등'적 요소들의 기반을 이루게 된다. 이를테면 레싱 소설의 주요 주제라 할 수 있는 페미니즘, 체제 갈등, 인종 차별 등등 말이다. 그녀는 한 사회에 속한 사회 구성원들이 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가는 과정을 매우 치밀하고 은근하게, 그리고 아주 일상적인 인물의 삶을 빌려 이야기한다.
줄거리
우리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선천적 요인을 근거로 세계가 우리에 대한 대우를 규정하는 것, 이것이 '혐오'의 출발이다. 즉 혐오란 애당초 불합리한 조건에 기반하고 있다.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노인이라는 이유로, 혹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상대를 증오한다면, 상대방은 무기력하게 증오를 감당할 뿐 탈출구란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혐오는 '혐오 주체'의 식을 줄 모르고 뻗어 나가는 증오 에너지와, '혐오 대상'의 무기력한 좌절이 충돌함으로써 빕어지는 극단적인 결말 속에서만 마무리 된다. 요컨대 혐오 주체의 증오 에너지가 혐오 대상을 압도하던가, 혹은 혐오 주체에 대한 혐오 대상의 반발심이 주체의 기세를 보기 좋게 꺾던가(참고로 소설의 결말은 저 중 후자다), 둘 중 무엇이든 갈등의 근원은 해결될 수 없는 '비합리성'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혐오는 일방적이다.
소설의 주인공 메리는 어렸을 적에 대한 기억이 그닥 좋지 않다. 무능력한 아버지와,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린 메리에겐 부담이었다. 어머니는 메리에게나마 기대려 했지만 어린 메리에게 무슨 별다른 힘이 있었겠는가. 이후 나이를 먹은 메리는 점차 능력을 갖추며 가정으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고 제법 성공궤도에 올랐다. 마침내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 도시의 작은 회사에서 나름 유능한 여성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유감스럽게도 메리는 동료 여성들이 자기에 대해 뒷담화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내용인즉슨, 그 나이 먹도록 결혼도 안 하는 메리에겐 분명 어딘가 결점이 있을 거라는 둥 하는 얘기였다. 충격을 받은 메리는 그들의 시선에 맞추고자 결혼을 서두른다. 이때 만나게 된 남자가 리차드이다.
리차드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아가던 농장주였는데, 아직 농장일로 큰 돈을 번 건 아니지만 그의 근면한 태도가 메리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둘은 혼인하기로 하고 리차드의 집에서 같이 살기로 한다. 이제 메리는 직장도 그만두고 리차드의 충실한 아내로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가꿔가는 일만 꿈꾸게 된다. 그런데 얼마 후 리차드의 집에 도착한 메리는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집안 몰골이 정말이지 허름하고 남루하기 짝이 없었던 거다. 메리는 일순간 자신의 어린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가난하고 무능력한 아버지와, 고통 받는 어머니의 모습 말이다. 그리고 이내 메리가 경악 끝에 다다른 상상은 리차드가 마치 메리의 아버지 같고, 메리 본인은 그녀 자신의 어머니가 됐다는 상상이었다. 메리의 부모가 비참한 결혼 생활에 이른 것처럼, 메리 본인의 결혼 생활도 비참하리라는 예언적 기분이 몸을 감쌌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리차드의 아내로서 그저 그렇게 운명에 순응하며 살게 된다. 적어도 당분간은 말이다. 비록 따분하고 지루한 시골 생활이었지만 메리는 자기 나름대로 할 거리를 찾아 나서며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하려 노력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남편 리차드가 농장에서 수익을 극대화하고자 시도했던 여러 사업들이 연이어 실패하자 메리는 다시 악몽 같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히게 된다. 둘의 관계엔 점차 희망이 사라져갔다. 커다란 기대도, 커다란 실망도 없는 그저 그런 관계로 부부관계라는 허울 만이 간신히 지탱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모세'라는 이름의 흑인 노예가 새로 집에 들어온다. 다부진 체격의 모세는 맡은 바 일을 잘 수행해내는 믿음직한 노예였다. 하지만 메리는 모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사실 메리에겐 맘에 드는 흑인 노예가 하나도 없었다. 흑인들 특유의 꿈벅거리는 눈 하며, 게으른 천성, 하얗게 이를 드러내 보이며 짓는 웃음 등 모든 게 불만이었다. 메리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모세를 구박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메리의 구박에 이내 행동을 수정하는 듯 했지만 전면적인 굴종의 제스처를 취하진 않았다. 다만 노예로서의 도리만 다할 뿐 메리와 나름대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메리로서는 공분할 일이었다. <노예> 주제에 자꾸 <사람> 흉내를 내는 것이 무척 황당했고 심히 못마땅했다. 그런데 우연히 메리가 모세에게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 후로 둘 사이는 다소 '묘한(?)' 관계로 변화한다. 이전엔 메리가 모세를 철저히 혐오하기만 했다면, 지금은 커다란 두려움과 약간의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억눌러야 한다는 자기 최면이 뒤섞여 아주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된 거다. 모세는 그뒤로 메리를 열심히 보필한다. 하지만 그러한 긴장 상태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이윽고 외부에서 찾아온 손님이 메리에게 흑인을 왜 '사람처럼' 대하느냐고 따진 거다. 이에 용기를 얻은 메리는 모세를 내쫓아버린다. 잠시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메리는 얼마뒤 모세에게 죽임을 당하고 소설은 마무리 된다.
감상
소설 전반에 흐르는 혐오적 분위기, 즉 흑인에게 응당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에 대한 백인들의 <당연한> 태도는 소설을 넘어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는 특히 메리가 모세를 <물건>처럼 대하지 않고 마치 백인 대하듯 하는 태도를 목격하자 화들짝 놀라서 메리를 나무란 백인의 태도에서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그는 메리와 모세와의 관계에 있어 엄연히 제3자다. 요컨대 모세가 메리를 친근하게 대함으로써 굴욕을 입었다손 친다면 그건 메리이지, 제3자 백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자 백인이 메리에게 모세를 대하는 태도를 고치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메리의 행동이 <백인 전체>를 욕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메리와 자신을 동일한 백인 집단의 일원으로 동일시 하고 기꺼이 그녀와 한 편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 정체성의 이데올로기다. 백인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 동일시된 개체들은 그저 한 울타리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 아군으로 간주하고, 울타리 외부에 대치된 '적'들과 구분되려 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들에겐 세상 모든 것들이 적 아니면 동지라는 이분법적 사고만 발동하는 것이다.
당시 식민 국가의 백인 사회에선 흑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그들만의 규율과 질서가 있었다. 그들의 가치관에서 흑인은 물건이었고, 도구였다. 하지만 그렇듯 흑인을 물건으로 대하는 방식에 있어 방해가 되는 인간 본성이 하나 있었으니, 다름아닌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죄책감이다. 백인들은 이 죄책감이 잘못 작동하기라도 하여 흑인들에게 언뜻 '약한' 모습이라도 보였다가는 자신들의 지위가 불안해질 것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그들은 두려움을 더 커다란 광기로 잊으려 했고, 그 결과 흑인에 대한 그들의 처우는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곤 했다. 메리와 모세의 '묘한' 관계를 무마하려 한 백인의 태도는 백인 집단 전체의 존속에 대한 걱정에서 유래했으리라.
마침내 메리가 백인의 도움으로 모세를 '도구'처럼 버리자 모세는 메리를 살해한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흑인이 백인을 죽인 사건이다. 좀 더 상술한다면 <버림 받은 흑인>이 자신의 <주인인 백인>을 죽인 사건이다. 모세는 끝내 '도구' 이상의 존재로 성장할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자기를 도구로 규정한 시스템 자체를 부숴버린 것이다. 물론, 메리 또한 시스템의 하수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세는 알 수 없었다. 하기야 영화 <기생충>만 하더라도 인물들은 하나 같이 집 자체를 부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지하방이나 차지하려는 가난한 자들의 다툼을 이어가지 않던가.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반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반감 : 우연적으로 슬픔의 원인인 어떤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
메리가 리차드에게 느낀 감정이 반감의 예다. 메리는 어렸을 적 아버지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리차드의 모습과 겹쳐 보였고 그것이 '우연적으로 슬픔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리차드에게 '반감'을 가졌다. 이해가 안 된다면, 새로운 사람을 마주했을 때 문득 나에게 상처를 주고 떠나간 옛연인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싫어해본 경험을 떠올려보라.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감정의 원인이 상대방 그 자체가 아닌 상대의 외부에 존재하는 상황 말이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정의한 반감의 핵심이다. 반면 반감을 당하는 상대편의 입장을 떠올려보자. 나를 자신의 옛연인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싫어하는 상대에게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한단 말인가. 이로써 반감은 앞서 상술한 혐오의 메커니즘과 맞닿아 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가 나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게 된다는 점이 그렇다.
심지어 반감은 끝없이 확산되며 덩치를 키우기까지 한다. 처음에 메리는 리차드가 흑인을 고압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보며 일말의 불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불쾌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메리는 리차드와의 결혼생활 시작부터 이미 반감이 싹트기 시작했고, 식을 줄 모르고 커진 반감의 불길은 리차드를 넘어 흑인 노예들에게로 번진다. 이 점에서 오늘날 <정체성 정치>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끝내 우주 전체로 자신들의 증오 에너지를 확장하는 것도 이와 다름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혐오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혐오는 또다른 갈등의 원인일 뿐이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좌절, 쓰라린 과거를 투사하려 하지 말자. 구조를 고친다는 대의명분 아래 개인의 책임까지 방기하지 말자. 메리는 끝내 아버지의 덫을 벗어나지 못했고, 백인 사회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가혹한 <피해자>라는 점이 우릴 구원해주진 못할지니.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